햇빛소나기 – 청령포

절벽과 물로 사방이 막힌 이곳에 와서

그 때 그 어린 임금처럼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나를 보았어요

나무계단 돌계단 간신히 올라

천 길 낭떠러지 앞에 발 돋우고 서서

서강 물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햇빛소나기를 보았어요

햇빛소나기 따라

빨려 들어가는

내 몸뚱이, 그 몸뚱이의 살과 피를 보았어요

그 물빛 감옥 속에 나를 버리고서야

관음송 맨 꼭대기 연약한 가지 끝에

자울자울 졸던 가을햇살이

잠시, 아주 잠시

아직도 낭떠러지에 서 있는

내 마음 속으로 쑤욱 들어가

집 한 채 짓는 것을 보았어요

아주 잠깐, 또 다른 적막의 집 한 채를 보았어요

아, 적멸보궁이었어요

하 영 文殊華(시인, 반야불교학당) 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

해가 뜨면 달이 지고

일상월하 日上月下 해가 뜨면 달이 지고

산심수한 山深水寒 산이 깊으면 물이 차네.

선시 가운데 가장 짧은 단구(短句)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일본의 유명한 백은(白隱)선사의 시다. 간명한 표현으로 단적인 핵심을 부담 없이 쉽게 표현한 이 시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한 것은 백은의 선지(禪旨)가 출중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 또는 현대 임제종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백은혜학(慧鶴1685∼1768)은 24살 되던 어느 봄날 깊은 밤 좌선하던 중 먼 절의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 다시 도경혜단(道鏡慧端)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더욱 정진하여 자기 공부를 확인 받고 도경의 인가를 받는다. 32세 때 처음 출가했던 절인 고향 정강현(靜岡縣)의 송음사(松陰寺)로 돌아와 후학 제접에 힘쓰면서 선풍을 드날렸다. 그에 얽힌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가 자비행(慈悲行)에 얽힌 이야기들이다. 일화를 소개한다. 추운 겨울 절 밖에 떨고 있는 거지에게 스님이 외투를 벗어 주었을 때 눈만 껌벅거리는 거지를 보고, “내가 옷을 벗어 주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지 왜 눈만 껌벅거리느냐”고 했더니 그 거지는 “스님이 내게 고맙다고 해야지. 내가 왜 스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이에 스님이 “받은 사람이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자, 그 거지가 “나 때문에 스님이 선행을 하게 됐으니 스님이 나에게 고마워해야지요.”라고 대꾸하자, 스님이 “그래 그렇기도 하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또 어떤 불쌍한 여자가 낳아서 절문 밖에 버린 아기를 거두어 키워주면서, 주위로부터 스님의 아이일 것이라는 오해를 받고도 끝내 변명이나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자신은 지극히 검소한 극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비행을 실천한 스님의 법덕을 그가 죽고 나자 더욱 흠모하게 되었다. 불법홍포를 위하여 송음사를 중창한 외에 관음사, 신무량사, 용택사 등 절을 창건하기도 했다. 84세를 일기로 메이지 5년에 입적하였다.

“해가 뜨면 달이 지고 산이 깊으니 물이 차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사실 이 말에 굳이 뜻을 찾을 필요가 없다. 밤이 가면 낮이 오고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 드는 법.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 바로 여기에 격외의 소식이 있는 것이다. 평범한 가상도리(家常道理), 진리가 별 것 아니다. 토끼 뿔을 찾거나 거북이 털을 구하는 것이 도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묘(妙)가 있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9월 (제34호)

한촉 차가운 등불에

일수한등독불경 一穗寒燈讀佛經 한 촉 차가운 등불에 불경을 읽다가

부지야설만공정 不知夜雪滿空庭 밤눈이 빈 뜰에 가득 내린 줄도 몰랐네

심산중목도무뢰 深山衆木都無籟 깊은 산 나무들은 아무런 기척 없고

시유첨빙타석상 時有檐氷墮石牀 처마 끝 고드름만 섬돌에 떨어지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계절의 서정을 깊이 느낀다. 물론 감상이 남달리 풍부한 탓도 있겠지만 내면 관조를 통한 사물의 관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깊은 밤 절간 방에서 불경을 읽고 있던 어떤 스님이 있었다. 간경삼매에 빠져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밤중이 훨씬 넘은 시간이 되었는데 밖의 기척이 여느 때와 사뭇 다른 것 같다.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던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가끔 처마 밑에서 울던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왜 이리 조용할까? 잠시 밖에 귀를 기울였더니 섬돌 위에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 살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처마 밑에 달려 있던 고드름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떨어져 부셔지는 소리였다. 산중의 한겨울 눈 오는 밤의 풍경이 정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시이다.

이 시의 작자 혜즙(惠楫1791~1858)은 이조 말엽의 스님으로 교학에도 밝았고 선지도 출중했다. 호를 철선(鐵船)이라 했으며, 14살에 대흥사에 출가하여 제방을 다니면서 경전을 수학하고 20년을 강의를 하며 수많은 학인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20년 동안 좌선을 익혔다. 학식이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써 다방면의 재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생애를 살아 이름을 내는 것을 싫어하였다. 철종 9년에 입적하였는데 문집 1권이 남아 전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2월 제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