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귀일 일귀하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물었습니다 (僧問趙州).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一歸何處)”

조주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州云). “내가 청주에 있을 때(我在靑州), 베 적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作一領布杉), 그 무게가 일곱 근 이더라(重七斤)”

여기에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은 승조의 저서『보장론(寶藏論)』에서 처음으로 쓰인 말로, 그 내용은 만법(萬法)은 온갖 존재의 뜻으로 차별이요, 일(一)은 그런 차별이 감춰진 평등의 세계를 이르는 것으로 우주의 모든 것은 궁극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하나로 귀착된다는 뜻입니다. 또한『유마경』에서도 만법즉진여(萬法卽眞如)라 하여 비슷한 용례가 있습니다.

승의 물음에 조주스님께서는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적삼 한 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 이더라”라고 말하셨습니다. 이는 승의 물음이 알음알이의 개념적인 물음에 관계없는 조주스님의 선의 절대 경지를 무심한 말로 표출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 차별과 평등을 여읜 절대 중도를 일상사에서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인해스님 (동화사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2월 제51호.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굽이치나니

심수만경전 心隨萬境轉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굽이치나니

전처실능유 轉處實能幽 굽이치는 그 자리가 실로 그윽하다네

수류인득성 隨流認得性 이 흐름을 따라 본성을 알아버리면

무희역무우 無喜亦無憂 기쁠 것도 없고 또한 슬플 것도 없다네

마음은 언제나 경계에 부딪혀서 가지가지 감정을 일으킨다. 소위 희로애락이란 사람의 감정이 마음의 경계에 부딪혀서 일어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식이 흐르는 마음의 작용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일 찰라에 900번의 생멸이 있다고 하였다. 1초가 75 찰라이니까 1초동안에 67,500번(75×900)이나 마음의 진동이 있다는 말이다. 마음에 진동이 일어나는 것이 경계를 따라 굽이치는 물줄기와 같은 의식의 흐름이 된다. 이 이치가 참으로 미묘하여 알 수 없는 불가사의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 시작되는 근원인 본성, 굽이치는 성질을 갖고 있는 본성 자체를 알아버리면 기뻐도 기쁠 것이 없고 슬퍼도 슬플 것이 없는 무심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원래 이 게송은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22대 조사인 마나라(摩拏羅)존자가 그의 제자 학늑나(鶴勒那)존자에게 설해 주었다는 게송이다. 혹 어떤 이는 『경덕전등록』에 양기방회(楊岐方會)가 이 게송을 읊은 것이 있다하여 양기스님의 작품으로 보는 이도 있다.

사람은 감정에 북받쳐 울고 웃는다. 그러나 슬픔도 기쁨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파동일 뿐 정체가 없다. 그런데도 감정을 주체못하여 본성을 잃고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9월 (제22호)

마음의 실체에 대한 개인적 小考

초등학교 때 나의 쌍둥이 동생에게 내가 느끼는 세계에 대한 느낌을 너도 똑같이 느끼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현재의 삶에 대한 독특한 나만의 느낌을 동생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느끼고 있는 현재의 삶의 느낌이나 어떤 사물에 대한 느낌을 동생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결국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어떤 실험(?)을 해보게 되었는데, 몇 가지 공통된 경험적 사항들에 대해서는 느낌이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 예를 들면 투명한 파란색 플라스틱의 색깔은 어렸을 적 함께 선물 받았던 장난감 자동차의 묘한 느낌을 떠올렸다. 물론 그 느낌이 완전하게 나의 느낌과 일치하는 느낌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쌍둥이였고 자라온 환경이 거의 같았기에 사물을 통해 떠오르거나 느껴지는 생각들이 대체로 비슷하였다. 하지만 같은 상황이나 사물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서로 떠올리거나 느끼던 바가 다른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왜 나와 다른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을까하며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음은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 또는 언어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어떤 뇌신경학적 인지방식이라고도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나’가 아니라 경험(자극)에 따른 반응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뇌의 특정한 작용방식이 ‘나’라는 외부사물과 구별된 생각을 도출해내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의 경험에서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그것의 의미를 만들어 개념화 시키고, 익숙한 상황에 대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생성한 어떤 작용방식을 적용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개성이나 가치관)이 왜 다른지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욕실에 쥐 한마리가 나타나서 어른들이 쥐덫을 놓아두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쥐가 덫에 걸려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다. 아침에 세수를 하러 들어갔다가 그 광경을 보고 무척 가슴이 아팠었다. 그리고는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던 적이 있었다. 쥐도 생명체였고 나도 생명체였다. 따라서 나도 언젠가는 늙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어났다.

그리고 죽는 대상인 나라는 것이 지금 죽음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면서 세수를 하고 있는 아주 독특한 존재임이 떠올랐다. 이렇게 고유한 나라는 존재가 죽으면 그냥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거부반응이었고 ‘나’라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믿고 그것에 애착한 마음에서 발생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나’라고 지칭해보았는데 그 상황에서 나를 나라고 지칭하고 있는 나가 있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무한히 지칭하고 있는 내가 겹쳐졌다. 마치 앞뒤로 비친 거울에 무수히 많은 내가 있듯이… 이후에 어린이 법회에서 우리는 죽으면 새로운 몸을 받아 계속 태어난다는 어느 스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냥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그 생각들을 묻어두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저 ‘믿음’이었다.

이렇게 과거의 경험이나 언어의 틀 속에서 주조된 나라는 관념도 있고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자의식적 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아마 우리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관념들이 모두 어떤 물질적 대상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육체적 기관,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고 있는 어떤 것이 모두 ‘연기적’으로 작동 되어야만 가능한 것들이다.

우리가 움직이고 결정내리는 그 주체가 무엇일까라고 생각할 때에도 이미 물질적 존재와 관계된 마음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몸에서 발생되는 작용을 마음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물질이나 경험 그리고 언어에 갇힌 것이 되어버린다. 언어나 물질적 존재들이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떤 행위에 능동적 마음이 작용하느냐 아니면 생리학적 반응일 뿐이냐 하는 단순한 구분은 불필요하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어떤 것을 먹을 것이냐 하는 것은 미리 정해질 수도 있고 선택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의 환경이라는 연기적 상황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 인과법칙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그러한 모든 것들을 초월한 존재를 상정한다면 그것 또한 물질이다.

‘진정한 마음’이란 물질을 초월해 있지만 초월한 존재나 실체가 아니라 ‘초월해 있음 그 자체’이다. 팔다리에도 뇌에도 그리고 육신을 벗어난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고정된 어떤 존재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마음을 현상적 작용의 측면에서 본다면 물질적 대상들과 연기된 어떤 것이기에 어디서도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초월해 있음 그 자체로 본다면 또한 어느 곳에나 보편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스님, 반야사, 월간반야 2010년 4월 제1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