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새벽에 옛절로 들어가니

지안스님의 선시산책

청신입고사 淸晨入古寺 맑은 새벽에 옛 절로 들어가니

초일조고림 初日照高林 아침 해는 숲을 비춘다.

곡경통유처 曲經通幽處 산모퉁이 언저리 그윽한 곳

선방화목심 禪房花木深 선방에는 꽃과 나무가 무성하고

산광열조성 山光悅鳥性 산색이 좋아 새들은 지저귀며

담영공인심 潭影空人心 연못의 그림자 사람 마음 씻어준다.

만뢰차구적 萬籟此俱寂 만상이 모두 고요에 젖은데

유문종경음 惟聞鍾磬音 오직 풍경소리만 울리고 있네.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서북쪽에 파산사(破山寺)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 뒤에 참선 수행하는 선방이 있었는데 상건(常建·708~765)이라는 당대(唐代)의 시인이 이곳에 들려 지은 이 시는 절의 풍경을 잘 묘사해 놓은 명시로 알려져 있다.

상건은 왕창령(王昌齡)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서로 교유하면서 시를 지어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처럼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사람이다. 일찍이 진사에 합격한 적은 있었으나 벼슬살이가 여의치 않아 거문고를 들고 명산대천을 유랑하면서 시를 지었다 한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3월 제100호

맑은 새벽 나뭇가지

청신고수앵류명 淸晨高樹鶯留鳴 맑은 새벽 나뭇가지 높이 꾀꼬리 울음

문이하심아이경 問爾何心我耳驚 묻노니, 네 무슨 마음으로 내 귀를 놀라게 하냐?

원득원통무애력 願得圓通無碍力 원컨대, 막힘없는 원통의 힘을 얻어

보문진성불문성 普聞眞性不聞聲 널리 진여의 본성을 듣고 소리는 듣지 말자.

오암(鰲巖 1710~1792)대사는 이조 중엽의 스님이다. 시를 잘 썼던 스님으로 유명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문단에 데뷔한 승려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문집 『오암집』은 시집이라 할 수 있는 문집이다. 시가 270여 수 수록되어 있고 문은 14편에 불과하다.

오암 대사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여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가 21살 때 모친의 상을 당해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하여 청하 보경사(寶鏡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때의 법명은 의민(毅旻)이었다. 청하의 오두촌(鰲頭村)에서 태어나 이 인연으로 자호를 오암이라 하였다.

새벽 꾀꼬리(曉鶯)라고 제목을 붙인 이 시는 꾀꼬리 울음을 듣고 듣는 성품인 문성(聞聲)을 듣는다는 오도(悟道)의 경지가 피력되어 있다. 이는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 나오는 말로 성진(聲塵)인 소리를 들을 때 소리를 듣지 말고 듣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라는 말이다. 이를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 한다. “꽃을 보고 색이 공함을 깨닫고 새소리 듣고 듣는 성품을 밝힌다”는 시구(看花悟色空 聽鳥明聞性)처럼 보고 듣는 경계에서 진여본성을 찾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공부다.

만약 누군가 도를 닦는다고 하면 닦아지지 않는다

약인수도도불행 若人修道道不行 만약 누군가 도를 닦는다고 하면 닦아지지 않는다.

만반사견경두생 萬般邪見競頭生 온갖 그릇된 소견만 다투어 일어날 뿐

지검출래무링물 智劍出來無一物 지혜의 칼을 빼내 한 물건도 없게 하면

명두미현암두명 明頭未現暗頭明 밝음이 오기 전에 어둠이 밝아지리.

“도를 닦는다고 하면 도를 닦지 못한다.” 이 무슨 말인가? 설명하자면 도에 들어맞는 마음은 생각을 앞세우는 유위심이 아닌 무위심란 말이다.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설치는 마음은 도를 닦는 마음이 아니다. 이런 저런 계교를 가지고 도를 행하려 해 보아야 그릇된 소견만 다투어 일어날 뿐이라 하였다. 일체의 관념에서 벗어날 때 도에서 나오는 밝음을 보게 된다. 그 밝음은 바로 어둠이 없어진 것일 뿐이다.

임제종을 수립한 임제의현(臨濟義玄:?~867)선사의 임제록에 나오는 시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임제가풍이 엿보이는 시로 살활자재(殺活自在)한 기백이 있다고 평가 받는다. 스승 황벽에게 법을 물으려다 세 차례에 걸쳐 방망이로 얻어맞았다는 삼도피타(三度被打)의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