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바람에 풍경 소리 멀리 날아가고

曉風飄磬遠(효풍표경원) 새벽바람에 풍경 소리 멀리 날아가고

暮雪入廓深(모설입곽심) 저녁 눈발 창틈으로 날아드는데

念在禪房宿(염재선방숙) 자나 깨나 선방을 떠나지 않고

慇懃自洗心(은근자세심) 은근히 마음 씻으며 살고 있다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세월이 깊어져 연말이 가고 연시가 왔다. 만류가 무상 속에 생멸하는 것인데 때에 따라 생각이 일어나면 감회도 생긴다. 공간이 있어야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있어야 공간이 있는 법. 언제 어디라는 말에서 역사의 자취가 만들어지고 중생이 업을 짓는 무대가 등장한다.

일생을 도를 닦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일이지만 쓸쓸한 일이다. 생존의 근본 뿌리를 뽑는 일이며, 모든 현상을 공화(空化)시키는 일이다.

매계수상(梅溪守常) 선사는 생몰 연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 원나라 때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시는 참선을 하면서 산다는 선거(禪居)라는 제목의 시이다. 마음 씻는 선공부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잘 산다는 것은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벽바람 저문 비 눈 날리는 동산에

晨風暮雨雪飄園(신풍모우설표원) 새벽바람 저문 비 눈 날리는 동산에

寂寂香銷未返魂(적적향소미반혼) 쓸쓸히 사라지는 향기, 돌아오지 못하는 넋이여!

佇立驚呼留不得(저립경호류부득) 발 구르며 불러 봐도 붙잡지 못하는데

萬山孤月又黃昏(만산고월우황혼) 온 산의 외로운 달마저 저물어 가네.

매화를 소재로 한 아름다운 시이다. 반발했던 꽃잎이 다 떨어져갈 무렵 그윽했던 향기가 사라지는 것을 돌아오지 못하는 넋이라 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인연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자연현상이지만 왔던 것은 가야하고 생겨났던 것은 없어져야 한다는 이치에서 보면 천지 안의 모든 것은 스스로 운명殞命의 종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는 매화를 보고 살던 한 선비의 고독한 정신이 매화 향기처럼 묻어 있는 시이다. 꽃이 지는 낙화의 슬픔 속에 인생 황혼의 우수를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이 시의 작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 1560)이다.

시문에 능했던 그는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기기도 했지만 성리학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산수를 노래한 시조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속에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절로 하리라.”은 시조가 많이 애송되어 왔다.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곳

일조불명처 一鳥不鳴處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곳

이인상대한 二人相對閑 두 사람이 한가롭게 마주 앉았네

진관여법복 塵冠與法服 속세의 유자와 산중의 스님

막작양반관 莫作兩般看 승속을 구분하여 둘로 보지 마시게

이조를 대표하는 고승 서산스님은 평안도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서산스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아 구국의 선봉장에 서기도 했던 스님이 묘향산 성불암에 기거하고 있을 때 기이한 손님을 한 사람 맞이했다.

조선 중기 풍류객으로 이름 높았던 백호(白湖) 임제(林梯)가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차를 나누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때의 상봉을 임제가 한 수의 시를 지어 남겨 놓았다. 그날 따라 산 속이 너무 적적하였는지 새 소리 마저 들리지 않았다고 묘사하였다.

유자의 차림을 한 백호와 승복을 입은 스님이 마주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신분이야 승속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마음은 대화 속에 어울러져 하나가 되었는지 둘로 보지 말라는 마지막 구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시를 지은 임제는 풍운아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당파싸움에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이 비위에 거슬려 벼슬에 환멸을 느끼고 유랑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때 성운(成運)을 사사하여 글공부를 하여 생원, 진사 알성시에 급제하여 홍양현감, 서도병마사, 북도병마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내기도 하였다. 학업에 매진할 때 중용을 8백번 읽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불우하게도 유랑으로 끝난 그의 생애가 39세의 일기로 마감을 하였다. 황진이 무덤가에서 지었다는 유명한 시조도 남겼다.

“방초우거진 곳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뇨?

잔 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슬퍼하노라.

인생무상을 노래한 이 시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는 명시로 남았지만, 이 시조가 그의 관운을 빼앗아버리기도 하였다.

그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가던 도중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이 시조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가 임지에 채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을 당했던 것이다. 막중한 국사를 수임한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일개 기생의 무덤을 참배 제사를 지낸 것이 사대부의 체신을 크게 그르치게 했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임종에 임해서 자식들에게 자신이 죽어도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죽음을 슬퍼할 것이 없다고 한 말은 생사를 초탈한 도승(道僧)들의 경지를 닮아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11월 (제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