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의 은둔 생활 병까지 들고 보니

三年竄逐病相仍(삼년찬축병상잉) 삼년의 은둔 생활 병까지 들고 보니

一室生涯轉似僧(일실생애전사승) 한 칸 집에 사는 신세 스님을 닮았네.

雪滿四山人不到(설만사산인부도) 눈 덮인 사방 산엔 찾아오는 사람 없고

海濤聲裏坐挑燈(해도성리좌도등) 눈보라 소리 속에 앉아 등불의 심지를 돋운다.

산간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겨울밤의 풍경을 묘사해 놓은 시이다. 작자는 고려 말의 문신 최해(崔瀣: 1287~1340)로 신라 때의 최치원의 후손이다. 못난 늙은이라는 뜻의 졸옹(拙翁)이라는 호를 썼다. 성균관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 벼슬에 나아가고, 34살 때는 연경에 가 원나라의 과거에도 급제하여 원나라의 벼슬을 잠시 하기도 하였다.

5개월 만에 귀국하여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벼슬을 누렸으나 말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몰두 저술에 힘썼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에 아부를 못하고 때로는 남을 호되게 비판하여 파란을 겪으며 출세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해도라는 말은 바다의 파도소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에는 바다가 있을 턱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눈보라 소리를 말한 것으로 봐야 하겠다.

삶이 고단할 때 필요한 것은 수행정신, 바로 ‘진리의 빛’

어두운 밤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나 횃불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하신 일이 밤길 가는 나그네를 위하여 횃불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이 간명한 비유로 우리는 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가는 길을 바로 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로 보려면 내 마음속 생각의 어둠이 없어지고 밝은 지혜의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때로는 어둠의 장애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거나 그릇된 처신을 하는 수가 자주 있다. 때문에 빛을 따라 가면 올바른 길이 보장되며 실수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어둠 때문에 길을 잘못 보고 뜻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여 명예의 실추를 당하는 황망한 일도 우리 사회에는 많이 일어난다. 인생을 ‘장애물 경주’라고 말하듯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삶 자체에 수많은 장애가 있다. 이러한 장애는 대부분이 마음의 어둠 때문이다.

마음의 어둠은 삼독(三毒)이라 하는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 근본이 되어 일어나는 심리적 독소이다. 따라서 수행이란 이 독소를 없애는 해독작용이라 할 수 있다. 선근이 부족하면 곧잘 이 삼독에 중독되어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수도 있다.

“똑같은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를 이루지만 독사가 마시면 독을 이룬다” 하였다. 부처님이 밝혀 놓은 횃불의 빛을 따라 살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불의와 비리, 부정부패에 관한 뉴스가 속보가 되어 터져나오는 요즈음, 도를 실천하며 진리의 빛을 따라 살아가던 옛 선인들의 고고한 수행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생활이 고단할 때, 삶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수행정신이며 이 수행정신은 바로 마음에 빛이 번뜩이는 밝음 그 자체인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4월 137호

산하와 대지가 눈앞의 꽃이요

산하대지안전화 山河大地眼前花 산하와 대지가 눈앞의 꽃이요

만상삼라역부연 萬象森羅亦復然 만상 삼라도 또한 그럴 뿐이네

자성방지원청정 自性方知元淸淨 자성이 청정한 줄 바야흐로 알았으니

진진찰찰법왕신 塵塵刹刹法王身 진진찰찰이 법왕의 몸이구나.

산하대지가 눈앞의 꽃이라는 것은 눈이 피로할 때 나타나는 헛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한자로 공화(空花)라 쓰기도 하는데 곧 허공 꽃이라는 말로 허망한 인연에 의해 나타나는 실체가 없는 것이란 뜻이다. 삼라만상도 그럴 뿐이라는 말도 산하대지가 허공인 바에야 그 속에 있는 만상이니 이 역시 허공 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허공 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기의 본 성품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꽃이 아닌 허공자체와 같은 것, 이것이 바로 모든 공간을 이루고 있는 부처님의 몸이다. 시방을 다 포함하고 모든 시간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때로는 깨달음 자체인 각체(覺體)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의 본체라 하여 심체(心體)라 하기도 한다. 그대의 마음이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을 다 포함하고 있다면 이것을 믿겠는가? 이것을 믿지 못하면 부처가 될 수 없는 영원한 범부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 시는 여말(麗末)의 고승 나옹선사가 지었다. ꡒ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ꡓ하는 의문을 품고 있다가 20세 때 출가를 한 스님은 이미 화두를 들고 절에 들어와 스님이 된 셈이다. 양주 회암사에서 정진하다 도를 깨치고 원나라 북경에 가서 지공화상을 만나 법담을 나눴다. 그 뒤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만나 그에게서 법의와 불자를 받고 다시 지공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법의와 불자를 받았다. 39세에 귀국하여 여러 곳에서 법을 설했으며 나중에 공민왕의 청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법을 설하기도 했다. 그런 후 52세 때 왕사가 도고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57세 때 우왕의 명을 받고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시호는 선각(善覺)이었으며 목은 이색이 비문을 지었는데 그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있다.

지안스님 글. 눨간반야 200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