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물소리가 부처님 설법이니

계성변시광장설 溪聲便是廣場舌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 설법이니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산색이 어찌 부처님 법신이 아니랴

야래팔만사천게 夜來八萬四千偈 밤새 내린 비로 불은 물소리 법문을

타일여하거사인 他日如何擧似人 남에게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소동파(蘇東坡)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시는 불도를 닦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이다. 당대의 시인이요 학자였던 동파거사가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동쪽 언덕에 초암을 지어 놓고 기거하였다 하여 동파란 호가 붙었다. 처음에는 불교를 우습게 알았던 그가 옥천사 승호(承浩)선사의 할(喝)에 눌려 선(禪)을 시작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 후 그는 많은 고승들을 방문하면서 법문을 듣고 선지(禪旨)를 익혔다. 한번은 상총(常聰)선사를 찾아가 법문을 청했더니, 사람이 설해 주는 말만이 법문이 아니라 우주 만상이 모두 법을 설하고 있으니 그 법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으라는 말이다. 마침 절을 나와 돌아오는데 골짜기 계곡 밑을 지나자 폭포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전날 밤에 비가 와서 물이 불어 폭포의 물이 더욱 세차게 흘렀던 것이다. 순간 소동파의 머리에 섬광이 번쩍이는 것이었다. 그때 바로 이 송을 지었다고 한다. 산과 물이 부처의 몸이요 부처의 설법이라는 이 말은 우주의 근원을 사무쳐 알고 난 오도의 경계에서 나오는 말이다. 현상에 미혹해 속고 있을 때는 어림없는 이야기다. 두두(頭頭)가 비로(毘盧)요 물물(物物)이 화장(華藏)이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요 존재의 세계는 모두 부처의 세계라는 이 말의 뜻을 알 때 부처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2년 7월 (제20호)

시냇가 띠집에 한가롭게 홀로사니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 띠집에 한가롭게 홀로사니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달은 밝고 바람 맑아 흥취가 남아돈다.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바깥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니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숲으로 평상 옮겨 드러누워 책을 본다.

때로는 사람들이 숨어 사는 은자(隱者)들을 동경하는 시절도 있었다. 안빈낙도를 즐기며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초연히 자기 삶을 부귀영화 밖에서 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사회풍조를 보면 이런 사람들은 고준한 삶의 정신이 더욱 빛나 보이는 모범이 있는, 삶의 견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의 시다. 어려서 고향인 선산의 도리사에서 글공부를 한 인연이 있는 야은은 학문을 좋아하였다. 려말(麗末)의 충신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려진 사람으로 조선조의 학자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세운 대학자로 높이 평가 받는다. 인품이 고매한데다 효심이 지극하였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공손한 예를 철저히 지킨 당대의 사표가 되는 큰 덕망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7월 제80호

수행한 몸은

연득신형사학형 鍊得身形似鶴形 수행한 몸은 학처럼 우아하고

천주송하양함경 千株松下兩函經 소나무 아래 두어 권 책뿐이네

아래문도무여설 我來問道無餘說 도가 무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운재청천수재병 雲在靑天水在甁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이 시는 당나라 때의 유학자요 호부상서 등 조정의 고위직 벼슬을 역임했던 이고(李翶)가 약산유엄(藥山惟儼 751~834)선사를 만나고 지은 시이다. 그가 한때 낭주(朗州) 자사로 있을 때 약산과 교분을 맺어 불교에 심취하였다. 어느 날 유엄선사를 찾아가 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 유엄선사가 답해준 말이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는 말이었다. 이후 이 말은 이고가 도를 물은 공안(公案)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를 읽어보면 사람을 관념적 분별의 세계를 떠나도록 하는 매력이 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생각으로 묻기 이전에 이미 도는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이다. 만물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 그것 자체가 도이다. 장안에 함원전이란 궁전이 있었다. 함원전에 있는 사람이 장안을 묻는 것은 도(道) 속에 있는 사람이 도를 묻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7월 제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