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등

가을볕이 좋은 오후,

흰 목덜미를 말리는 해안선이 있는 곳으로 마실을 갔다가, 한쪽 귀퉁이로 밀려난 해당화를 보았습니다. 버림받은 아이처럼, 가출 소녀처럼, 노숙자처럼, 태풍에 밀려온 지푸라기를 이불 삼아, 쓸쓸하고 적막한 세월의 한 귀퉁이를 가을볕과 함께 기도하듯 밝히고 있었습니다. 지난여름, 온몸으로 비바람을 막아주던, 방풍림의 노고에, 죽을 힘 다해, 가장 따뜻한 불을, 잠시나마 지피고 싶었나 봅니다.

간절한 마음이 길을 낸다고

향기로운 길이 되어 기쁨 된다고

물빛도 산빛도 나비처럼 날아와

연인처럼 속삭이며 작은 등燈을 답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다고

오랜 고단함속에서도

더러는 행복한 날들도 있었었다고

아주 가끔, 내 불빛이 나를 안아주기도 합니다.

文殊華 하영 시인 글. 월간 반야 2010년 12월 121호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거년빈미시빈 去年貧未是貧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금년빈시시빈 今年貧始是貧 금년의 가난이 진짜로 가난일세.

거년무탁추지지 去年無卓錐之地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추야무 今年錐也無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어져 버렸네.

가난 타령을 한 이시는 오도의 경지를 가난에 비유 읊은 시이다. 도를 닦는 공부는 비우고 비워 가는 공부라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학문은 날로 더해 가는 것이요, 도는 날로 덜어 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爲學日益 爲道日損). 학문이란 욕망을 더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허위와 번뇌가 일어나는 반면, 도란 지식을 덜고 욕망을 없애며 마음을 비움으로써, 하는 것이 없는 경지, 곧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라 하였다. 깨달음의 상태를 무의 상태 혹은 공의 상태로 표현해 온 것은 선가(禪家)의 일반적인 묘사였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깨닫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에도, “꿈속에선 육취가 분명하더니 깨닫고 나니 공하고 공해져서 아무것도 없네(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라고 하였다.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도 이러한 연유로 생긴 것이다.

작년에 깨닫고 비로소 주객이 모두 없어진 것을 체험하였다. 다시 말해 무를 체험하고 공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깨달았다는 희열감 내지 충만감이 꽉 차 있었는데, 금년에는 그것마저 사라져 버리더라는 말이다. 어떤가? 깨닫고 나서 깨달았다는 기쁨이 남아 있는 상태가 좋은 것인가? 그것마저 없어진 것이 좋은 것인가? 공부가 깊어지면 깨달았다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향엄지한(香嚴智閑?~898)스님이다. 전등록에 나오는 이 시는 그의 오도송 격이다. 향엄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처음 백장(百丈)문하로 출가했으나 후에 위산 영우(靈祐)스님에게 가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가 되지 않아 울면서 떠났다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산중에서 풀을 베다가 자갈을 집어 던졌는데 그 돌이 날아가 대밭의 대나무에 맞아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한다. 그때의 오도송이 별도로 전해진다. 돌이 대에 부딪치는 소리에 깨달은 순간을 “한번 부딪치는 소리 듣고 모든 것 다 잊었네(一擊忘所知)”라고 읊조렸던 것이다. 그는 위산의 법을 전해 받은 제자가 되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

자연으로 돌아가는 에코 다잉

며칠전 이승을 떠난 전직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화장되어 고향마을의 한 사찰에 임시 안치되었다. 화장은 원래 불교식의 장례방식이다. 죽음의 문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전반적 변화를 겪게 되듯 한국의 전통적인 장묘문화 또한 시대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석기시대에는 토장과 지석묘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까지는 토분 및 화장이,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으로 화장을 금하고 매장제를 강력하게 시행하는 등 유교적 장묘문화가 극을 이루었다. 지금은 국토이용의 효율성을 내세워 매장을 억제하고 화장을 통한 납골 및 자연장 제도를 장려하고 있다.

자연장은 화장한 유골을 용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강이나 산, 바다 등에 뿌리는 산골장과 유골을 지정된 나무 아래 묻거나 땅에 묻은 후 나무를 심는 수목장과 같이 인간의 주검을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환경 친화적 장례를 뜻한다. 그래서 자연장을 에코 다잉(eco-dying)형 장례라고도 한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자연장이 새로운 장법으로 유행하고 있다.

자연 그 자체가 하나의 장례방식이 되는 자연장에는 풍장, 조장, 수장 등이 있다. 풍장風葬은 사체를 매장하지 않고 공기 중에 놓아두는 방법으로 도서지방을 중심으로 치러진 장례절차이다. 사체를 놓는 방식에 따라서 동굴에 안치하는 동굴장, 나무에 걸어두는 수장樹葬, 벼랑이나 산기슭에 두는 애장崖葬 등으로 나뉜다. 조장鳥葬은 사체의 처리를 새들에게 맡기는 자연장법이다. 이 장례법은 하늘을 신성시하고 육체는 새에 의해서 하늘로 운반된다는 티베트인의 생각에 근거를 둔 것이다. 수장水葬은 시신 혹은 분골을 물에 떠나보내는 방식으로 전례되고 있으며, 강이나 물에 종교적 의미를 담는 지역, 특히 인도에서는 4대 장례법의 하나로 꼽히는 장법이다.

그 밖에도 현대에 와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개발된 장법으로는 냉동장이 있다. 시신을 냉동시킨 후 진동기계로 1분만에 가루로 만든다. 이 가루를 땅에 묻는 방식이다. 장례방식이 화장과 달리 유해가스를 발생하지 않아 훨씬 환경친화적이며 분해과정도 빠르다. 또 화장한 유골을 비행기로 공중에 뿌리는 스카이장도 있다. 중국의 등소평 등이 이런 장법으로 바다에 흩뿌린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장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현재 널리 시행되지는 않고 있다. 풍장이나 조장은 사체를 유기한다는 의식에서 유교정신이 지배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시행되기 어려운 장법이다. 그리고 화장한 유골을 강이나 바다에 뿌리는 수장은 경제적인 비용이 들지 않고 방법의 간편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많이 이용되어 왔으나 오늘날은 환경오염의 우려가 있어 문제가 되고 있으며 유교적인 의례에 따라 추모의 기회를 가질 상징물이 없다는 점에서도 선호하지 않는 장법이다.

냉동장은 화장과 달리 유해가스가 발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친환경적이나 최신기술이라 그 시설의 도입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변우혁, ‘수목장’) 스카이장 역시 비행기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서민들에게는 경제적인 부담이 될 것이므로 일반적인 장법으로 보급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수장과 마찬가지로 추모의 상징물이 없다는 점도 유교적 정서를 지닌 우리 국민 대부분의 호응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자연장도 환경문제, 경제적 부담, 종교적 정서에 맞지 않는 등 여러 문제점들이 있지만 근년에 들어와 수목장이 새로운 대안적 장묘방법으로 주목되고 있다. 스위스나 독일에서는 수목장이 상당히 일반적인 장례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유골의 40%가 나무에 뿌려지고 있으며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유골 위에 장미꽃을 심는 장미묘원과 같은 정원장이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5월부터 수목장에 관한 법이 발효된 후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렇게 수목장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목장은 묘지라기보다 숲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한국인들은 그 어떤 편리한 시설보다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 주는 혜택들에 공감하고 있다. 즉,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묘시설보다는 자연스러운 산림 속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숲은 친숙함의 대상이다. 산과 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우리에게 숲은 농경문화에 대한 향수를 담은 대상이자 휴식의 공간이다.

장례법의 선택은 반드시 철학적 판단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장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은 기氣의 취산聚散이라고 했다. 죽음이란 기氣가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나무의 거름이 되어 물화物化하는 수목장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흐르고 있는 도가적 자연주의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자연장과는 달리 추모의 상징물이 자연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에서 유교적 계세繼世사상에 따른 효孝의례를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장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서는 수목장 시행상의 문제점도 적지 않다. 먼저 추모목에 대한 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고가高價의 추모목이 거래되고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소비자들의 과시욕구를 부추기는 사설업자들에 의해 어떤 추모목은 수천 만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고가로 분양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 수목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부족하므로 수목장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수목장은 화장된 유골을 수목의 뿌리 주위에 묻어주는 방법 외에도 땅을 파서 유골을 먼저 땅에 묻고 그 위에 수목이나 장미와 같은 화목을 심는 방법도 있다. 그러므로 꼭 수십년된 고가의 나무를 선택할 필요가 없고 작은 묘목으로도 가능하다는 수목장의 다양성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나무뿌리가 시체를 감싸고 있을 경우 자손들에게 화가 미친다는 생각에서 나무뿌리가 유골과 접촉되는 것을 꺼리는 비합리적인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묘지의 부족, 죽음관의 변화 등으로 인해 화장률이 부산시의 경우는 80%에 달하고 전국적으로 60% 가까이 된다. 매장과는 달리 화장인 경우 그 유골을 처리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이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mozi@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