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년빈미시빈 去年貧未是貧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네.
금년빈시시빈 今年貧始是貧 금년의 가난이 진짜로 가난일세.
거년무탁추지지 去年無卓錐之地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추야무 今年錐也無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어져 버렸네.
가난 타령을 한 이시는 오도의 경지를 가난에 비유 읊은 시이다. 도를 닦는 공부는 비우고 비워 가는 공부라 한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학문은 날로 더해 가는 것이요, 도는 날로 덜어 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爲學日益 爲道日損). 학문이란 욕망을 더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허위와 번뇌가 일어나는 반면, 도란 지식을 덜고 욕망을 없애며 마음을 비움으로써, 하는 것이 없는 경지, 곧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라 하였다. 깨달음의 상태를 무의 상태 혹은 공의 상태로 표현해 온 것은 선가(禪家)의 일반적인 묘사였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깨닫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에도, “꿈속에선 육취가 분명하더니 깨닫고 나니 공하고 공해져서 아무것도 없네(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라고 하였다.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도 이러한 연유로 생긴 것이다.
작년에 깨닫고 비로소 주객이 모두 없어진 것을 체험하였다. 다시 말해 무를 체험하고 공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깨달았다는 희열감 내지 충만감이 꽉 차 있었는데, 금년에는 그것마저 사라져 버리더라는 말이다. 어떤가? 깨닫고 나서 깨달았다는 기쁨이 남아 있는 상태가 좋은 것인가? 그것마저 없어진 것이 좋은 것인가? 공부가 깊어지면 깨달았다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향엄지한(香嚴智閑?~898)스님이다. 전등록에 나오는 이 시는 그의 오도송 격이다. 향엄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처음 백장(百丈)문하로 출가했으나 후에 위산 영우(靈祐)스님에게 가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가 되지 않아 울면서 떠났다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산중에서 풀을 베다가 자갈을 집어 던졌는데 그 돌이 날아가 대밭의 대나무에 맞아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한다. 그때의 오도송이 별도로 전해진다. 돌이 대에 부딪치는 소리에 깨달은 순간을 “한번 부딪치는 소리 듣고 모든 것 다 잊었네(一擊忘所知)”라고 읊조렸던 것이다. 그는 위산의 법을 전해 받은 제자가 되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