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을 가꾸자

꽃이 피고 새잎이 나고 대지에 푸른 기운이 감돌더니만 어느새 산과 들은 파스텔화로 변해버렸다. 또 달이 바뀌면 신록이 짙어가면서 서서히 유화로 그 모습을 바꾸겠지만. 한참을 유화 감상에 젖다보면 가을 단풍과 함께 수채화의 투명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테고. 그러다가 잎이 지고 대지의 풀들이 말라버리면 자연스레 수묵화의 은은함을 보여주겠지. 어떤 위대한 예술가나 화가가 이 자연 앞에서 자기 솜씨를 뽐내고 아름다움을 논하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을 통해 무상(無常)의 진리를 배우고, 대지의 품속에 들어서면 차례로 생의 교훈을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흙의 향기를 맡으면서 흙을 밟고 흙을 만져보자. 풀 위에 벌렁 드러누워 까치레한 풀밭에 볼을 가져다 대어보자. 흐르는 시냇물에 맨발로 들어가서 5분간만 서 있어 보자. 까마득히 잊혀졌던 고향마을과 부모님, 따뜻한 이웃, 그 옛날의 친구들, 그리고 추억…. 여기에 어디 거짓이 있고 탐욕이 있는가. 이 시간에 어디 명예와 권세를 꿈꾸겠는가. 어떻게 감히 성냄과 어리석음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 속에 머물다 보면 어느새 세속을 떠나 멍청한 바보가 된다. 그리고는 말없이 땅을 파며 이마의 땀을 훔치게 된다.

이제 우리 사회도 한 주일에 닷새만 근무하면 되는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고 있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공무원들이 먼저 토요 휴무를 하고, 이어서 이 제도는 산업현장에 도입될 것이고, 아마 교육계는 가장 늦게 시행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이 제도는 피해갈 수 없고, 선진사회로 가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인 제도라 보여진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을 일 중독증에 걸렸다고 비꼬는 외국인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일도 중요하지만 쉬고 싶고, 놀고 싶고, 즐기고 싶어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려되는 바도 크다. 이웃 일본은 십여년 째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반해서 우리나라는 너무도 쉽게 빨리 불황을 벗어난다고들 좋아하고 정부에서는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 수긍이 가지 않는다.

나라일이나 가정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빚이 많다고 빚을 갚기 위해 문전옥답을 팔아 버리는 방법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견실한 기업을 팔아 빚을 갚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하나 걱정되는 것은 국민들의 소비심리나 소비성향이다. 일본은 지금 내수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백화점이나 할인매장도 손님이 없어 쩔쩔매고 있는데 우리네는 어떤가. 백화점 주변 교통상황을 보면 알만하지 않는가.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가난하여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인가. 일본은 구조조정 할 기업이 없어서 못하는가. 외국에 팔만한 기업이 없어서 못 파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쯤해서 우리의 눈을 백화점이나 할인매장, 해외관광에서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일주일에 닷새를 일하고 이틀을 쉬게된다. 닷새동안 번 돈으로 이틀을 놀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하루쯤은 자연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텃밭을 가꾸자. 텃밭을 만들자. 텃밭을 마련하고 텃밭에서 배우자. 도회에서 1시간 내외 정도의 거리이면 적당할 것이다. 요즈음 시골에는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묵혀둔 농토가 지천이다. 여유가 되면 땅을 사면 더욱 좋고, 말만 잘하면 얼마든지 빌어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시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땀흘리며 일을 하다보면 운동 또한 이만한 게 있을까. 온가족이 같이 땅을 파고, 돌을 가려내고,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물을 주고, 햇볕을 가려주고, 수확을 하는 것이다. 가족의 건강은 물론, 가정의 화목과 자녀교육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버릴게 없다. 생명의 존귀함을 느낌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과 애정을 쏟는 것만큼 거둘 수 있다는 삶의 진리도 깨달을 수 있으리라.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5월 (제18호)

인생은 바람이고 구름인 것을

누가 날더러 청춘이 바람이냐고 묻거든

나, 그렇다고 말하리니

그 누가 날더러 인생도 구름이냐고 묻거든

나, 또한 그렇노라고 답하리라.

왜냐고 묻거든 나, 또 말하리라.

청춘도 한번 왔다 가고 아니오며

인생 또한 한번가면 되돌아 올수 없으니

이 어찌 바람이라, 구름이라 말하지 않으리요.

오늘 내 몸에 안긴 가을 바람도

내일이면 또 다른 바람이 되어

오늘의 나를 외면하며 스쳐가리니.

지금 나의 머리위에 무심이 떠가는 저 구름도

내일이면 또 다른 구름이 되어

무량세상 두둥실 떠가는 것을

잘난 청춘도, 못난 청춘도

스쳐가는 바람 앞에 머물지 못하며

못난 인생도, 저 잘난 인생도

흘러가는 저 구름과 같을 진데

어느 날 세상 스쳐가다가

또 그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가는 생을 두고

무엇이 청춘이고 그 무엇이 인생이라고

따로 말을 하리까.

우리네 인생도

바람과 구름과 다를 바 없는 것을.

경허선사 ‘경허록’ 중에서. 월간 반야 2012년 6월 139호

춘추복이 필요없다

우리 옛 어른들 말씀에 “보리 누름에 중늙은이 얼어죽는다”고 하였다. 아직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려면 제법 기다려야 한다. 통상 절기 상으로 ‘망종(芒種)’에 햇보리를 먹으니까 ‘소만(小滿)’ 무렵이면 보리가 누렇게 변하니 한 달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날짜로 보면 5월말쯤 되니까 아직도 추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올해 초의 장기 기상예보로는 예년보다 우리 남부지방에서는 벚꽃이 1주일쯤 빨리 핀다기에 귀한 손님을 4월초에 모셨는데 꽃이 피지 않아 곤혹스러움을 겪었다. 날씨의 변화가 종잡을 수 없기에 기상 당국도 어려움이 많겠지만 예보를 믿고 일을 계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황당할 따름이다. 매년 이맘때쯤은 주문한 녹차가 배달될 때도 되었기에 생산 농가에 전화를 했더니 날씨가 예년에 비해 추워서 아직 찻잎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청명’ 전후의 ‘명전’이 아니라도 ‘곡우’ 전후의 ‘우전’ 맛이라도 보아야 할텐데 아직 소식이 없다.

일전에 인근 도회에서 30여 년 간의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남덕유산 자락의 고향으로 낙향한 지인이 찾아와 차담을 나눈 적이 있다. 3년째 시골생활을 하면서 건강하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야기 중에 “산에 사니까 춘추복이 필요 없다”고 했다. 물론 일할 때 입는 작업복은 모두 동복(冬服)이라고 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가 싶으면 더워서 하복을 입어야 하고, 여름의 무더위가 가는가 싶으면 추위를 느껴 겨울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고 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계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중국 한나라 때 오랑캐에 끌려간 궁녀 ‘왕소군’의 비애를 노래한 ‘동방규’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봄이 와도 진정 봄 같지 않다’고 한 것은 계절의 봄보다는 중국의 4대 미녀 중의 한 사람인 ‘왕소군’을 오랑캐에 빼앗긴 아쉬움(?)을 계절에 비겨 표현한 것이 아닐지.

올해 봄 날씨로 보면 남부지방에서는 비가 잦고 예년에 비해 기온이 낮아 농작물에도 많은 피해가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기상이변도 천재지변으로 하늘 뜻이거니 생각하면서 백성들이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요즈음 농어민들은 반대다. 국가에 대해서,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장기적인 관점에선 ‘지구 온난화’가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좁은 땅덩어리라서 그런지 수목의 분포나 농작물 재배 지역의 변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남부지역에 한정되어 있던 밤이 중부지방에서도 재배되고, 사과의 재배지도 북상하는가 하면, 죽변ㆍ죽암 등의 지명에서 보여주던 대나무의 자생지도 서서히 북상한다고 한다. 이미 남부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아열대 식물들을 들여와 재배하고 있는가 하면, 바다에서도 수온의 상승으로 제주 근해 등 남쪽바다에서 잡히던 갈치와 같은 어족이 남해안으로 이동하였고, 저온의 한류를 따라 이동하던 명태와 같은 어족이 우리 동해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구 온난화 현상은 우리만의 국지적 현상은 아니다. 연전에 캐나다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록키산맥을 따라 빙하지대를 찾은 적이 있다. 여기 저기 남아 있는 만년설의 모습을 보면서 안내자가 빙하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오래 전에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들이 붙인 이름을 소개하여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꾸만 이 빙하가 녹아 내리는데도 그들이 붙여놓은 이름은 그대로라는 데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웃으며 이의를 제기하고 안내자더러 당신이 새로운 빙하의 이름을 붙여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날씨가 좀 더워져도 또 좀 추워져도 인간의 삶에 크게 영향은 없을 것이다. 이즈음의 과학 기술문명은 추우면 난방을, 더우면 냉방 시설을 통해 쾌적한 환경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별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생태환경이다. 이들은 인간의 뜻대로 변화되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 환경을 변화시킬 능력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의 능력이 무한해도 자연을 지배 정복할 수 없고, 자연의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을 떠난 인간을 생각할 수 없기에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지구환경을 후손에게도 잘 보존하여 물려줄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5월 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