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한 관심

우리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은 ‘금수강산(錦繡江山)’도 ‘삼천리 화려강산(華麗江山)’도 아니다. 농사짓기에 좋은 비옥하고 넓은 평야도 아니고, 경제성이 높은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된 땅도 아니다. 일본인들은 일찍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적당한 구실을 찾다가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을 제시하였다. 조선은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 사이에 놓여 양쪽 강국의 눈치를 보면서 가늘고 길게 역사를 유지해 오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사대(事大)를 하고, 안으로는 당파성(黨派性)을 갖게 되었으니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이끌어 갈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과 합병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참으로 궤변 중의 궤변이다. 사실 우리의 여건은 이처럼 좋은 조건은 아니다. 철저하게 착취당하고 빈손으로 맞은 해방 앞에는 이념의 갈등과 외세의 놀음에 동족상잔의 처참한 비극을 겪고도 우리는 이처럼 일어섰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을까. 이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이점 나는 주저 않고 ‘이 땅의 어버이들의 교육열’이라고 생각한다.

나라가 어려워도, 집안이 어려워 끼니를 걸러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어버이들의 갸륵한 정신이 이 땅밖에 또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렇게 공부시켜 놓은 인재들이 근대화의 역군이 되었고, 온 세계시장을 누비며 우리 물건을 팔았고, 유학이나 이민을 가서 세계 도처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는가 하면, 수 차례의 정치적ㆍ경제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주역이 되지 않았던가. 때로는 그 열의가 지나쳐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순기능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본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교육열은 어제오늘에 생긴 것이 아닌 것 같다. 근세 한국의 실학(實學)과 경학(經學)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다가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40세 때부터 무려 18년 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5백 여권의 방대한 실학관계 저작과, 2백 여권의 경학관계 연구서를 비롯하여 시문집 등을 남겼는데, 수시로 두 아들 학연(學淵), 학유(學游)에게 편지를 써서 수신(修身), 제가(齊家), 학문(學問) 등을 지도하고 때로는 꾸짖고 독려하곤 하였다.

유배지에서 그 자신의 생활도 힘들었을 텐데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힘쓰면서 두고온 가족걱정은 물론 두 아들에게 읽을 책의 선정, 책의 편찬 방법, 시 짓는 법, 효도하는 법, 남을 도우는 태도, 과수 재배법, 진실에 관한 것 등을 일일이 가르치고 과제를 주어 확인하기까지 하였으니 다산의 교육열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비록 아비가 죄인이 되어 유배된 폐족이라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이나 문장가는 될 수 있다며 두 아들을 다그치고 직접 유배지로 불러내려 가르치기도 하였으니 초연하게 처세하면서도 아들 교육에는 대단한 집념을 보였던 것 같다.

이즈음 교육 일선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녀교육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관심, 즉 교육열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 자녀에 대한 이해, 교육에 대한 이해, 미래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부모의 교육열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겨울에 얼어붙은 보리밭을 밟아주는 농부의 심경을 아는가. 얼어서 서릿발이 솟아 보리의 뿌리가 떠 있는 것을 밟아서 제대로 자라게 해주기 위함이다. 너무 힘주어 밟으면 보리가 상처를 입고, 너무 약하게 밟으면 그대로 뿌리가 들떠서 보리가 말라죽게 된다. 너무 세게 밟아도 너무 여리게 밟아도 안 된다. 농부가 보리를 밟는 심경으로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4월 (제17호)

구지화상

구지화상은 마조도일 문하의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의 법과 항주의 천룡(天龍)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무주 금화산의 작은 암자에 살면서 매일 구지불모준제다라니를 독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지화상이 머물고 있는 작은 암자에 어느 날 실제(實際)라는 비구니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비구니 스님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머리에 삿갓도 벗지 않은 채 구지화상의 주변을 세 번 빙빙 돌더니 이윽고 말을 했습니다. “ 한마디 일러 주시면 갓을 벗지요.”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는데도 구지화상은 한마디도 대꾸를 못했습니다. 선사가 대답을 하지 못했으므로 비구니 스님이 그냥 떠나려고 하자 구지 선사는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묵었다 가시지요” 하고 만류를 하니 비구니 스님이 말했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묵어가겠습니다.”

결국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스님은 그길로 바로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지화상은 멀어져가는 비구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비록 대장부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대장부의 기개가 없도다” 하고는 암자를 버리고 제방으로 다니면서 선지식을 두루 친견할 것을 결심했는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르되 “스님은 여기를 떠나지 마십시오. 머지않아 큰 보살이 오셔서 화상께 설법해주실 것입니다”고 하더니, 과연 열흘이 지나지 않아 천룡선사가 찾아왔습니다. 구지화상은 정성을 다해 스님을 모시고 앞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사뢰니, 천룡선사는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우뚝 세워 보였습니다. 구지화상은 그 손가락을 보는 순간 크게 깨달아 버렸습니다.

이로부터 구지화상은 누가 찾아와 무슨 질문을 해도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니, 마침내 그의 일지두선(一指頭禪)은 온 선객들 사이에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뒷날 구지화상을 시봉하는 동자가 한 명 있었는데, 구지화상이 외출하였을 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구지화상께서는 어떤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묻자, 동자는 자기의 스님이 하듯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상대가 놀라워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서, 스님이 돌아오자 그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구지화상은 동자에게 물었습니다. “아까 너는 손가락을 어떻게 세웠느냐?”

그래서 동자가 손가락을 세우는 순간, 구지선사는 칼로 잽싸게 손가락을 잘라버렸고, 동자는 아픔을 참지 못해 울부짖으며 내달렸습니다.

이때 구지선사는 “동자야!” 하고 불렀습니다.

동자는 얼떨결에 머리를 돌려 화상을 쳐다보았더니, 구지화상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바로 그때 동자는 홀연히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지선사가 언제나 사람들이 불법에 대하여 물어오면 단지 손가락만을 세워 자신의 선의 경지를 나타내 보였다는 것은 선의 경험경지를 개념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나타내 보이려 했던 것입니다.

참선은 실참실오(實參實悟)하여 불법을 자기 자신의 지혜로 만들어 자기의 불법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말씀이나 선사들의 언어문자를 알음알이로 흉내 내는 중생심의 입장의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지화상이나 동자가 손가락 세우는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깨달았다는 것은 진실로 깨달음이 손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은 방편으로 제시되었을 뿐, 손가락을 세운 일지두선(一指頭禪)의 참된 법문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닌 우리의 본래면목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구지화상의 이야기는 『벽암록』, 『무문관』, 『종용록』 등의 선적에 나오는 친숙한 이야기로서 그에 대한 생몰 연대나 속성 등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

녹음의 그늘 속에 여름을 보내며

산간 생활에서 가장 지내기 좋은 계절은 여름이다. 날씨가 더워도 계곡에 물이 흐르고 산의 숲이 짙은 녹음을 드러내어 싱싱하기만 한 모습만 바라봐도 더위가 잊어지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보다 여름이 좋은 것은 한더위가 계속될 무렵에는 인적이 드물어 산속의 고요를 더 즐길 수 있어서다. 공산무인(空山無人)이라는 말처럼 인파가 밀려든 산은 제격이 아니다. 야호! 야호! 질러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 아마 산은 제일 피곤할 것이다. 산은 원래 말없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바람소리 물소리도 때로는 크게 들리는 것을 싫어한다. 가끔 밤에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고요를 깨뜨리는 때도 있으나 간헐적으로 들리는 이 소리는 산의 분위기를 해치지는 않는다.

여름으로는 낮에 매미가 운다. 이 매미소리는 숲의 왕음악이다. 얼핏 파정(破靜)의 방해군 같기도 하지만 매미들은 파한(破閑)을 알리는 여름 특유의 전령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수년 전에 중국에 가 우리나라 스님들이 과거 신라나 고려 때에 머물었던 선종사찰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어느 사찰 근처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붓으로 쓴 글씨를 포구한 족자가 눈에 띄어 이를 사왔다. 가게 주인은 이 글씨가 중국에서 제법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라 하면서 값을 꽤 비싸게 달라하여 주저하다가 보시하는 셈 치고 사자하여 사왔는데 지금도 은해사의 내 방에 걸려 있다. 대구(對句)로 되어 있는 오언절구인데 “용등해랑고(龍騰海浪高) 선조임유정(蟬噪林猶靜)”라고 쓰여 있다. “용이 오르니 바다 물결이 높고 매미가 우니 숲이 더욱 고요하다” 는 뜻이다. 글씨가 품격이 있고 뜻도 마음에 들어 사왔던 것이다.

이제 매미소리를 들을 때마다 뒤의 구절을 음미하는 습관이 생겼다. 떠드는 것이 조용하다는 건 상식을 무시하는 말이지만 한더위가 느껴지는 여름의 정서로는 매미소리가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여름 숲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 매체가 된다. 그렇다면 짙푸른 녹음 그늘 속에 긴긴 여름날의 전체 분위기는 매미소리 하나로 더욱 살아나고, 산은 깊어지며 숲은 고요해져 버리는 것이다.

흔히 정중동(靜中動)이니 동중정(動中靜)이니 하면서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는 사물의 본체와 작용을 동시에 드러내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적 차별 경계에 있는 두 가지 상황을 하나로 일치시켜 전체적인 묘(妙)를 살리는 이야기이다. 중도로 회통하는 본질적 이치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 치우쳐서는 얻어지지 않는다.

옛날 어느 선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하면 더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선사의 대답은 이랬다.

“벌겋게 달아 있는 난로 속으로 들어가면 될 거야.”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는데 더워 죽겠다는 사람에게 불을 활활 지펴 벌겋게 달아 있는 난로 속으로 들어가라니 피서법 치고는 상식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격외담(格外談)으로 통하는 선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상식이 된다. 물론 30 도의 더위도 못이기는 사람이 어떻게 40도의 더위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이론을 달겠지만 더 큰 더위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작은 더위쯤은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크게 먹는다는 말이 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를 할 때도 ‘마음 크게 먹어라’ 고 말한다. 사실 마음을 크게 먹고 살면 괴로움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또 우리의 본래 마음은 모든 것을 이기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래 마음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다시 말해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번뇌나 망상의 마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무심했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마음으로 돌아가 살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선수행의 가르침이다. 하기야 정의(情誼)에 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아무렇지 않는 무심이 될 수 있으랴. 하지만 마음의 병을 이기게 하는 것은 분명 무심의 약 뿐인 줄도 알아야 한다.

시집간 딸이 아직 나이가 20대인데 갑자기 죽었다. 죽은 딸의 어머니가 절에 재를 붙여 놓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 어떤 때는 북받치는 설움을 견디지 못해 통곡을 한다. 49재 날이 다가와서 이제 딸을 잊어라 했더니 “내가 어떻게 내 딸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울었다. 그러나 잊어도 잊지 않는 것이고 잊지 않아도 잊는 것이 있다. 이 속에서 딸을 잊어야 한다. 이 묘법을 쓰고 살줄 알아야 한다. 섣달 부채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때로는 여름 추위가 있고 겨울 더위도 있는 수가 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7월 제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