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박복하다 비웃지 말라

막소생애박 莫笑生涯薄 내 생애 박복하다 비웃지 말라

요현일소도 腰懸一小刀 허리에 찬 작은 칼 하나로

등등천지내 騰騰天地內 하늘과 땅 사이에 늠름하나니

처처진오가 處處盡吾家 이 세상 모든 곳이 내 집이라네

이 시의 작자 침굉(枕肱:1618~1686) 스님은 조선조 숙종 때의 스님이다. 출가 수도자의 기백이 넘치는 이 시 한 편이 그의 생애를 돋보이게 한다. 법명이 현변(懸辯)이었던 그는 9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나 10년이 지난 19살 때 고산 윤선도가 양자로 삼아 환속시키려 하였으나 울면서 애원하여 승려로 남았던 사람이다. 그런 뒤 을사사화 때 윤선도가 광양에 유배되었을 때 찾아가 창랑가(滄浪歌)를 지어 위로한 일도 있었다. 소요태능(逍遙太能)의 법을 이어 선암사, 송광사 등 호남의 여러 사찰에 주석하면서 법을 폈다.

부귀영화 멀리하고 가진 것 없어도 허리에 패도하나 차고서 천지 안에 꿀리지 않게 살았다. 운수행각으로 천하를 떠도니 어디든지 내 있는 곳이 내 집이 된다. 작은 칼은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 곧 지혜의 칼을 상징하는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9월 제82호

네티즌이라는 시민계급

6월의 이 나라는 온통 붉은색이다. 적어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풍경은 그렇다. 이 거대한 쇼를 연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만도 하다. 그러나 50여년전 6·25를 겪은 세대나 그날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섬짓함을 느낀다. 물론 긍정적인 면을 전적으로 부인하자는 뜻은 아니다. 이따금씩 손뼉치고 소리도 지를 줄 안다. 그러나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일들이 붉은 물결에 가리워져 적당히 처리될까 두려운 것이다.

얼마전 중국과 브라질의 축구경기가 서귀포에서 벌어지던 날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의 광화문이나 시청앞 광장에서처럼 대형 화면을 설치하고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데, 도중에 당국에서 이 시설을 철거하여 화가난 군중들이 난동을 부렸다는 외신을 들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이 외신은 중국의 정규 언론사들이 취재하여 전한 것이 아니라 한 ‘네티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중국과 같이 거대한 국가 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온 나라의 힘도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출발은 네티즌이란 시민계급으로부터 출발되었다고도 한다. 1990년대 초반 마이클 허번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 네티즌(netizen)은 인터넷 위에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새로운 공동체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 네티즌은 정보통신이라는 새로운 기술환경 즉 기술의 혁신으로부터 태동한 것이다.

전통적인 시민사회가 산업사회의 기반에 부르조아적 실체를 바탕으로 사회내적 존재로의 사회적 책임감과, 이성적 판단, 합리성과 계몽주의에 기초해 사회를 형성하는 집단이라면 네티즌은 기술연관적 존재로서 기술에 기초해 기술이 만든 공간에서 활동한다. 그들은 기술연관적 가능성과 행위의 틀 안에서 그들만의 세계에서 활동하면서 전통사회, 시민계급에 도전하고 있다.

문제는 네티즌의 세계가 상호작용성과 익명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회적 공통성보다는 전문화되고 기호화된 취향과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욕구의 분출로 이어지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라는 공통성보다 개인적인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에 그 기능에 회의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그들 스스로는 공개된 사회속으로 나와 떳떳하게 참여하는 것 보다 재미와 이익을 따라 네트를 즐기며 그 속에 빠진다. 그렇다면 네티즌은 사이버 공간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개인적 욕망의 분출구가 아닌가.

그러나 인터넷 등장의 가장 큰 효과는 뭐니뭐니해도 사회투명성의 증대라고 본다. 인터넷을 통해 사회구조가 바뀌고 분열 효과를 가져 왔는가 하면 구조적 규범성, 중앙집권적 통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고발, 시공간의 단축, 독과점 기업구조의 파괴, 유통질서의 단순화, 정보와 기술의 확산,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참여의 유도 등 과거의 성역을 무너뜨리는 선각자, 선도자의 역할도 한다.

이제는 네티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사이버 공간에서 나름대로의 여론을 형성하여, 기업이 흥망하는가 하면, 다양한 정치체제를 실험하고, 새 정치세력을 탄생시키는가 하면, 새로운 세계를 여는 등 보다 긍정적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데 기여할 것을 기대해 본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2년 7월 (제20호)

백운사의 가사불사

백운사는 전북 완주의 시골에 있는 절이다. 역사가 깊은 고찰은 아니고 한 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30여 년 전에 창건된 절이다. 대전에서 복지시설을 설립, 치매노인들을 극진이 보살피고 있는 혜광 스님과의 인연으로 나는 이 절을 몇 번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가사를 짓는 불사를 백일기도와 함께 봉행해, 회향하는 날 열리는 대 법회의 법문초청을 받게 되어 방문하게 되었다. 그사이 법당을 새로 짓고 도량을 정리하여 절이 매우 아름답고 청결하였다.

절이 농촌의 야산에 자리하고 있어 깊은 산중 절도 아니고 도회지에 있는 절도 아니라 그야말로 촌절이다. 그러나 촌절이라 해서 절이 초라한 것은 아니다. 법당이 세 개나 있고 선방도 있으며 요사채가 매우 넓다. 처음 갔을 때에도 나는 이런 곳에 어떻게 이렇게 절을 잘 지을 수 있었나 하고 감탄을 한 적이 있었다.

백운사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농촌 사람들을 위한 농촌의 절이다. 절 밑의 마을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것도 우리나라 농촌사정이 어디를 가나 다 그렇듯이 젊은 층이 아닌 나이가 많은 노인 분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백운사 신도는 거의가 농촌의 나이가 많으신 노보살님들이다. 이분들은 절을 다니며 열심히 기도를 하거나 특별히 정진을 하는 신도들이 아니라 절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일처럼 와서 절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그저 이웃집 일을 도와주듯이 절을 돌보며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절에 등을 하나씩 켜기는 한다. 가난한 형편이라 많은 돈을 내지 못하고 만 원씩 혹은 이만 원씩 절에 시주를 하고 등을 켠다. 음력 초하루가 되면 절에 가는 날이라 생각하고 절에 와서 법당에 참배하고 기도를 잠시 하고 가는 신도들도 조금씩 생겼지만, 그러나 농번기에는 농사일이 바빠서 초하루가 되어도 아무도 안 온다.

이 절을 창건한 지향(智向) 스님은 70대 초반의 연세로 남다른 원력을 가지고 이 절을 세웠다. 스님의 뜻은 농촌의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부처님 법을 펴 그들이 부처님의 가피와 은혜를 입도록 하는 것이다. 법당에 들어가 축원을 할 때마다 삼재의 재난이 없기를 빌어주고 건강을 빌어주고 복덕과 지혜가 성취되기를 빌어드린다. 스님의 성품은 언제 부지런하고 매사를 성심성의껏 하는 헌신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 소박한 농촌의 노인분들이 가장 믿고 따르는 말하자면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는 스님이 되었다.

이번에 스님이 삼보에 공양을 올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사불사를 하게 되었다. 가사란 스님들이 입는 네모난 천을 이은 일종의 의복이다. 이 가사를 지어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신도들에게 동참하여 복을 짓게 하자는 것이 스님의 의도였다. 가사를 복전의(福田衣)라고 번역하듯이 예로부터 가사를 지어 올리면 큰 복을 짓는 일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 가사불사가 꽤 돈이 많이 드는 불사이다. 옷감 값이 올라 한 벌을 짓는데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백 벌만 하여도 수천만 원의 불사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농촌의 경제사정은 뻔하다 1~2만 원이 귀한 곳이다. 기만 원씩 동참한 농촌의 신도님들도 있었지만, 지향스님은 이 불사금을 시주금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사비와 권속스님들의 도움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6월 1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