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시는 카피샤의 음역. 迦毘尸國이라고도 함. 나라 이름. ⇒ 가필시국(迦畢試國).
[월:] 2016년 01월
남북으로 갈라진 산의 작은 오솔길에
산북산남세로분 山北山南細路分 남북으로 갈라진 산의 작은 오솔길에
송화함우락빈분 松花含雨落繽紛 비 머금은 송화가 어지럽게 떨어지는데
도인급정귀모사 道人汲井歸茅舍 도인은 물을 길어 띠집으로 돌아가고
일대청연염백운 一帶靑煙染白雲 푸른 연기 띠를 둘러 흰 구름을 물들이네.
산중의 띠를 엮어 지붕을 만든 움막집에 한 도인이 샘에서 물을 길어가 밥을 지었는가 보다. 굴뚝에서 솟아 오른 푸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 흰 구름을 물들인다. 마침 산에 들어와 오솔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이 광경을 보고 시를 한 편 지었다. 고려의 문신 이숭인(李崇仁1349~1392)이 지은 이 시는 푸른 연기(靑煙)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시이다.
고려 말의 문신으로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도은(陶隱) 이숭인은 대학자이면서도 정치적 파란만장을 겪은 인물이었다. 문장이 출중했던 그는 정몽주와 더불어 실록을 편수하고 벼슬도 역임 동지사사 등에 전임되기도 했지만 여말의 혼란한 정치적 와중에 수차례의 유배를 당하고, 조선조의 개국에 이르러 정도전과 처세를 같이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도전이 보낸 자객 황거정에 의해 유배지에서 장살(杖殺)을 당해 비운의 생애를 마감한다.
바위에 글씨를 새기듯이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의 입구에는 간혹 석벽이나 바위가 나타난다. 통도사 입구에도 선자바위가 있고 무풍교에서 보행로를 따라 조금 올라오면 용피바위(龍穴岩)가 있다. 구룡지(九龍池) 전설에 나오는 용이 쫓겨 가다 떨어져 피를 흘린 곳이라 한다.
절이 아닌 명승지 부근에도 석벽이나 바위 돌에 사람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을 탁명(托名)이라 하는데 바위에 이름을 의탁해 놓았다는 뜻이다. 왜 탁명을 하느냐 하면 옛날 사람들이 집안의 가문번창을 기원하거나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 석공에게 부탁하여 바위에 이름을 새기게 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공명심이 작용하여 새긴 것들도 있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또 하나의 욕망이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초기 어떤 작가분이 금강산에 다녀온 후 감상의 글을 신문에 기고했는데, 가장 안타깝게 느꼈던 것은 아름다운 금강산 곳곳에 바위마다 새겨 놓은 사람 이름을 적은 글씨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자연경관을 해치고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바위에 이름을 새길까? 맨땅이나 나무에는 새기지 않고 왜 굳이 바위나 돌에 새기는 것일까? 이유는 분명하다. 돌에 새긴 글씨는 바위가 풍화되어 없어질 때까지 지워지지 않고 오래 오래 남기 때문이다. 비석을 세워 기록을 남겨 두는 것이 어떤 증거를 남겨 놓는 가장 확실한 방법의 하나였기 때문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비석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비석에 새겨 글씨를 남기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오래 표시해 두겠다는 보존의지의 발로임이 자명한 일임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이 옳은 일에 대한 의지를 돌에 새긴 글씨처럼 지워지지 않게 가지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 또 반대로 화를 빨리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화를 빨리 풀지 않는 것은 바위에 새긴 글씨와 같아 원망과 증오는 되도록 빨리 풀어 없애야 한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바위에 새긴 글씨와 같은 사람과 모래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 그리고 물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이다. 바위에 새긴 글씨와 같은 사람이란 화를 내고 그 화가 오래 되어도 풀리지 않는 사람이니, 마치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오래도록 비바람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모래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이란 화를 내기는 하지만 그 화가 모래에 쓴 글씨처럼 오래가지 않는 사람이다. 물에 쓴 글씨와 같은 사람이란 물에 쓴 글씨가 곧 흘러 자취가 없어지는 것처럼 남의 욕설이나 언짢은 말을 들어도 조금도 마음에 그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화평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지내는 사람이다.”
이상은 『증일아함경』에 설해져 있는 내용으로 성내는 마음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업습(業習)에 의해 일어나는 의지가 다르다. 어떤 때는 착한 의지로 좋은 일을 하고 싶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증오와 원망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한 사람 개인의 의지가 때에 따라 달라지는가 하면 개개인 각자의 의지가 서로 달라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한 의지는 길이 보호하여 없어지지 아니 하도록 해야 하며 악한 의지는 빨리 없애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신념의 부재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옳은 일에 대한 신념을 굳게 가지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묘수를 찾는 일에만 혈안이 된 판국이다. 내 주장이 바른 것인지 틀린 것인지 충분히 성찰하지도 않고 남이 주장하는 것을 꺾기 위해 일부러 또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이념의 갈등을 야기하고 자꾸 시비만 증폭해 가는 양상이 되어간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훈에 “법을 의지해야 하며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는 말씀이 있다. 옳은 소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치에 맞는 법다운 것이라야 된다는 뜻이다. 중생을 위한 진정한 회향의 의지가 없는 것은 설사 말이 옳더라도 결국은 사법이 되어버린 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른 사람(正人)이 그릇된 법(邪法)을 말하면 사법이 정법이 되고 반대로 그른 사람이 정법을 설하면 정법이 사법이 된다”고 했다. 옳은 뜻은 바위에 새긴 글씨처럼 지켜 가고 나쁜 뜻은 물에 쓴 글씨처럼 빨리 지워지게 해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1월 제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