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의 적삼을 빌려

차파삼자배파문 借婆杉子拜婆門 노파의 적삼을 빌려 노파 문전에 절하니

예수주선이시분 禮數周旋已十分 인사 차릴 건 충분히 다 차렸네

죽영소계진부동 竹影掃階塵不動 대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월천담저수무흔 月穿潭底水無痕 달이 못 밑을 뚫어도 수면에 흔적이 없네

선(禪)은 마음에 일체의 분별의식이 떠나간 상태를 유지한다. 마음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으면 선이 아니다. 시비곡직을 애초에 외면해 버렸기 때문에 선에 들어온 것이며, 선에 든 마음은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동시에 주객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의 할 일은 다 해 마쳐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도리를 예의라 한다면 선심 속에서는 그 예의가 실은 차릴 것 없이 다 차려진다. 마음 자체는 능소(能所: 주체와 객체관계)가 없으므로 아무리 마음을 움직여도 움직임이 없다. 마치 대그림자가 계단 밑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으며, 달이 물 속을 비추어도 물에 흔적이 없는 것처럼, 모든 상대를 초월하여 여여부동(如如不動)하기만 한 그 자체가 선인 것이다. 선의 정수를 바로 읊었다고 평가받는 이 시는 야보도천(冶父道川)스님의 작품이다. 『금강경오가해』 중 야보송에도 나오고 있는데, 특히 3구와 4구는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인간사 모두가 공중에 일어나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인데, 구태여 우리는 자기생애의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쓰니, 어찌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어느 선사가 “나는 평생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더불어 살아왔다”고 독백한 적이 있다. 알고보면 모든 사람이 다같이 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2년 12월 (제25호)

빛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어느 고3 여학생이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걸림돌과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 친 어머니를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걸림돌처럼 생각하다니, 옛날의 유교윤리로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효막심한 흉측한 말이다. 하지만 이 고3의 딸은 우리 사회가 안겨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수험생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공부와 생활에 대한 이런 저런 간섭이 귀찮아, 어머니로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심정을 순간적으로 토로했을 뿐이라 여겨진다.

세상 살기 힘든 것은 남녀노소가 없는 것 같다. 어른은 어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또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힘들다. 힘들다는 것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해 편치 못한 심리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하고 불편해 지는가? 그것은 살아가는데 있어 내가 겪어야 하는 현실적인 장애가 너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장애물 경주라고 표현하는 말도 있지만 뜻하는 바의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는 않고, 사회 환경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공연히 스스로를 짜증스럽게 만든다. 그 원인은 또 있다. 하기 싫은 경쟁을 억지로 하면서 살아야 한다. 수험생이 겪어야 하는 입시경쟁 같은 것처럼 피하고 싶은 일을 어쩔 수 없이 겪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생의 행로에는 넘어야 할 산이 첩첩이 있다. 창을 만들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과 남이 하는 일이 서로 반대의 기능을 나타내기도 하며, 같은 기능을 가진 경우라도 언제나 우열을 따지는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랭킹으로 우열을 따지는 현대사회는 확실히 경쟁의 사회다. 참으로 많은 경쟁의 대상이 오늘의 사회 안에 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남도 나와 같은 일을 하려하는 동업자의 경쟁이 있는가 하면 물건 생산을 통한 상품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미 사람이 사는 생존자체를 경쟁으로 보고 생존경쟁이라는 통념화 된 말을 쓰고 있기도 하지만 문명의 발달 속에 인간 사회의 경쟁은 더욱 가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어느덧 사회적 생리현상이 속도경쟁으로 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마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처럼 좀 더 빠른 속력을 내어 앞차를 추월하려는 것과 똑같은 과속을 내면서 스피드 경쟁을 유발, 더욱 더 달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추월이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직선적 돌진은 기차의 추돌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부모의 말이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자식의 말이 부모에게 상처를 주는 시대가 되어 윤리, 도덕적 안전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마음속에 마군이 침입해 있고 찌푸리고 어두운 얼굴로 못마땅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의 육근이 서로 장애를 일으키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가 않는다.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

화엄법문의 중요대의를 사사무애(事事無礙)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서로 장애가 없이 존재하는 이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이치의 카테고리를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 한다. 모든 존재는 근본본질에서는 서로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본래는 장애가 없는 것인데 중생들의 망업(妄業) 때문에 장애가 생긴다는 것이다. 망업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생의 마음이 밝은 빛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본래 우리들 마음은 밝은 빛이었던 것이라 한다. 심광(心光) 곧 마음의 빛을 쓰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전도된 가치의식에 잘못 빠져 들어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는 삶을 불식시키고 어둠을 밝혀 주는 빛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빛은 절대 싸우는 일이 없다. 한 개의 전등에서 나오는 빛이나 백 개 천개의 전등에서 나오는 빛은 결코 서로 장애하지 않고 서로 합하여 광도를 높일 뿐이다. 마음과 마음의 빛이 서로 합하여 심광의 광도를 높여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내 마음을 써서 누구에게든지 밝음을 전해주면 된다. “마음의 빛은 언제나 밝아 만고에 아름답다 (心光不昧 萬古徽猶).” 문제는 망업 때문에 끼어드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번뇌에 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5월 제 78호

노곤한 봄잠 자다

춘면불각효 春眠不覺曉 노곤한 봄잠자다 날 새는 줄 몰랐더니

처처문제조 處處聞啼鳥 곳곳에 우짖는 새소리 들린다.

야래풍우성 夜來風雨聲 밤새 거센 비바람 불었으니

낙화지다소 落花知多少 피어 있던 꽃들이 많이 떨어졌겠다.

봄 날 아침 정경이 해맑게 묘사된 명시이다. 제목이 춘효(春曉)라고 되어 있는 이 시는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시이다. 성당(盛唐)의 자연파 시인으로 시재가 뛰어났음에도 벼슬을 못해보고 불우한 생애를 마쳤던 그는 평생을 처사로 살면서 산수를 벗하여 시를 읊었다. 운이 없어 과거에 낙방하고 녹문산(鹿門山)에 은거, 시를 짓다가 40세에 장안으로 올라가 장구령 왕유 등과 교유하여 시재를 인정받았으나 그가 지은 부재명주기(不才明主棄)란 시구 하나가 현종의 비위를 거슬러 끝내 벼슬길이 막힌다. “재주가 없어 밝은 임금이 버리셨다”는 이 구절을 읽은 현종이 임금을 책망한 말이라 하여 노여워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벼슬을 원했다가 좌절되고 방랑과 은둔으로 생애를 보낸 그는 왕창령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한다. 청려(靑麗)하고 아정(雅正)한 시 263수를 남겼다.

요산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6월 제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