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 밖에는

소우추산외 踈雨秋山外 가을 산 밖에는 성근 비 내리고

사양고수변 斜陽古樹邊 늙은 나무 가에는 석양이 비친다.

모천고안향 暮天孤雁響 저문 하늘에 외로운 기러기 울음소리

하사객수견 何事客愁牽 무슨 일로 나그네의 근심을 당겨 주는가?

가을이 되면 객지에 가서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생각이 일어난다고 한다. 아무래도 가을은 생각나는 것이 많은 계절인가 보다. 그래서 사색의 계절이라고 불러왔는지 모른다.

조선조 영조 때의 허정법종(虛靜法宗1670~1733) 스님은 시를 잘 짓는 시승(詩僧)으로 이름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화엄의 원돈법계설(圓頓法界說)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시문(詩文)을 수록해 놓은 허정집(虛靜集)에 고향을 생각한다는 ‘사향(思鄕)’이란 제목으로 위의 시가 실려 있다. ‘늙고 병든 부모님이 고향에 계시기에’라고 부제를 붙인 걸 보면 출가 수행자가 되어 사는 산사에서 가을을 맞은 어느 날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을비에 산이 촉촉이 젖다가 비가 그치고 석양의 햇빛이 나뭇가지에 걸린다. 이내 해는 지고 어두워 오는 하늘에 기러기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고향에 계신 부모님 안부가 생각난 것이다. 몸이 편찮아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나그네 근심을 당겨주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병환인 것이다.

월간반야 2008년 11월 제96호

2. 대승불교의 정신과 발자취

2.대승불교의 정신과 발자취 이 대승불교 운동의 여명은 보살(菩薩)이라 불리는 새로운 불교 개혁 세력에 의해서 전개됩니다. 보살이란 진리의 길로 들어서 자각적 존재로서 구도자(求道者)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보살을 여성불자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보살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각적 존재로서의 보살은 한편으로는 진리를 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체득하여 그들을 그 고통의 질곡에서 구제하기 위해 애씁니다. 아파하는 이웃들과 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서고자 하는 보살의 이상을 상구보리(上求菩堤)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합니다. 보살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피안에 이르는 길인 육바라밀(六波羅密)이 요청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반야(般若)바라밀입니다. 반야란 초월적인 지혜를 일컫습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 사물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직관적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마음을 잘 다루고 관리해 행복은 물론 일체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루고 깨우치기까지는 스스로의 주체적인 행위가 요구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교를 자력불교(自力佛敎)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 천당이며 극락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나약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렇게 생존 자체마저 위협받는, 그래서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나약한 의지의 소유자에게 불교는 부처님의 가피력에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타력(他力)신앙을 내겁니다. 이들에게 자력으로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타력신앙에서 그 믿음의 대상은 아미타부처님이며,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곳은 안락세계인 극락정토(極樂淨土)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수명이 무한하여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부릅니다.『법화경』에서도 부처님을 굳건히 믿고 예배하는 신앙을 통하여 성불에 이르는 길을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이렇게 반야의 지혜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도도한 불교사의 맥을 형성하게 됩니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를 태동시켰으며 정토 타력신앙도 꽃피웠습니다. 이러한 인도의 불교는 중국으로 전해져 동북아시아 대륙에 전파됩니다.

초기경전 (17)42장경(2)

<사십이장경>은 일상의 수행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덕목을 간추려 설해 놓은 경전이다. 특정 부류의 곧 출가자나 재가자를 구별해서 설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 교훈을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하고 있다. 더욱이 소승적인 차원을 넘어 자비와 인욕의 행을 설하고 보시를 권장하며 참회를 강조하는 대승적인 수행 정신을 알기 쉽게 설해 놓고 있다.

부처님께서 복은 항상 자비를 베푸는 데 있으며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화를 가져온다고 하시면서, 악한 자가 어진 자를 해치려는 것은 마치 하늘에 대고 침을 뱉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불도를 배우기 위해 힘써서 중생들을 널리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덕을 베풀고 재물을 베풀어주는 착한 일을 한다면 얻는 복이 한없이 클 것이라고 설했다. 설사 남이 악으로 대하더라도 자기는 선으로써 대하라고 가르쳤다. 깨달음의 길을 생각하여 순간도 쉬지 말 것이며 흡사 뗏목이 강의 양쪽에 닿지 않고 흐르듯이 수행해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중도의 실천도 강조한다.

또한 부처님은 수행에도 자기의 근기에 맞게 하는 조현지법(調絃之法)이 있다고 하면서 극단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하라 하였다. 조현지법이란 거문고 줄을 알맞게 조여 놓고 곡조를 연주해야 제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너무 느슨하게 해 놓으면 거문고의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으며 또 너무 팽팽히 조여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줄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 했다. 여기서 중도(中道, Madham ma- pratipad)라는 말씀을 하였다.

이 중도의 뜻이 불교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불교를 사상적으로 표현할 때 중도사상이라 하기도 한다. 대승소승을 막론하고 중요시되는 불교의 근본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중도이다. 중도란 치우치지 않은 중정(中正)의 도(道)란 뜻으로 곧 양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 중도설은 불교의 각 종파와 경전에 따라서 약간씩 다른 방법으로 설해지기도 한다. 가령 {아함경}에서 설해지는 팔정도(八聖道)의 실천에 있어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 생활태도를 버리고 중도에 의하여 지혜를 완성하여 열반을 얻으므로 팔정도를 중도라 한다. 또 12연기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는 것은 常見(중생의 생명의 주체인 아(我)는 영원히 존속한다는 생각)과 斷見(사후에 아무것도 없는 滅無로 돌아간다는 생각) 또는 有無에 치우친 생각에서 떠나는 것을 중도라 했다.

또 대승의 중관파(中觀派)에서는 반야바라밀을 근본 수행으로 삼으면서 모든 집착과 분별을 떠난 공해진 경지의 무소득 상태에 있는 것을 중도라 한다. 또 중국의 천태사상에 있어서는 삼관(三觀)을 설하면서 공으로 보는 관점인 공관(空觀)과 현상의 가상을 기준하는 가관(假觀)에서 공관·가관을 함께 초월하면서 ‘공(空)’이 ‘가(假)’이고 ‘가(假)’가 ‘공(空)’인 양변을 회통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 하며 이것이 곧 중도라 한다. 우리 불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은 곧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아니하다는 중도의 사상을 설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의 낙을 버리는 것이 중도라 하기도 하고 이것을 부처님의 근본법륜의 중도대의라고도 한다.

세상에는 두 변이 있으니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첫째는 애욕을 탐하여 욕망은 허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견으로 형체를 괴롭혀 도의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이 두 변을 버리고 곧 중도를 얻느니라.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온갖 욕망으로 애욕에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고로움으로써 현성이 아니고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한전의 『오분율가』, 남전의 『율부』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이다. 이것을 부처님의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4년 1월 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