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16)42장경(四十二章經)

“마음의 때가 다하면 영혼이 오고가는 곳, 생사가 나아가는 곳을 알게 되리라(心垢盡乃至靈魂所往來生死所起向).”

부처님이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예, 밥 한끼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도 도를 모르는구나.”

세번째로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예, 숨 한 번 쉬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장하다, 그대는 도를 바로 알았구나!”

이상은 <42장경>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 말씀이다. <42장경>은 무척 간단명료한 경이다. 짧은 경문을 통하여 수도자들의 수행관을 밝게 명시해 놓은 경전이다. 전문이 모두 42장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42장경>이라 한다. 이 경은 흔히 <유교경(遺敎經)>과 치문에 나오는 <위산경책(僞山警策)>과 더불어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고 한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가장 먼저 번역된 경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이 경의 서문에는 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채 이 경이 중국에 전해 온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후한의 효(孝) 명제 때이다. 왕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이마에서 금빛을 발하고 있는 이상한 신인(神人)이 그의 궁전 앞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꿈을 깬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이 신인이 누군인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신하 중 한 사람이 그 신인이 천축(天竺)의 성인 부처님일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황제는 곧 사람을 파견하여 월지국으로 보내 불경을 얻어 오게 하였다. 이때 필사해 온 것이 이 <사십이장경>이었다 한다.

효명제가 사신을 월지국으로 보내 불경을 얻어 오게 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설해지고 있다. 중국의 불교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출삼장기(出三藏記)>나 그후에 저술된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 등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을 후한 명제 영평 10년(서기 67년)으로 보는 설이 생겼다. 달마 스님이 선(禪)을 가지고 온 때는 서기 527년 양나라 무제 때이다. 그러니까 선종의 선이 중국으로 수입되기 이전 460년 전에 불경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경을 번역한 사람이 <역대삼보기> 등에 가섭마등과 법란 두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한역으로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고려대장경>, <송장경>, <원장경>에 수록된 것과 명장에 수록된 송나라 진종 때의 주 <42장경> 그리고 송의 중기 11C에 선종인 조동종에서 수축이 주한 불성 『42장경 주』와 도패가 지은 <불조삼경지남(佛祖三經指南)>에 든 것 등이다. 마등과 법란이 번역한 원형과 자구(字句)가 상이한 것도 있고 형식과 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 경도 여러 경전에서 인용하여 뽑은 인초경임이 형식과 내용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각 장을 따라 경 이름을 붙인 것이 유교의 십팔 장으로 되어 있는 효경(孝經)과 비슷하며 내용에 있어서 <유교경> <법구비유경>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등에 설해진 내용과 같은 것이 많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 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든 이 경을 불조삼경에 넣어 중국 초기 불교에서는 대단히 중요시 여긴 경인 점은 분명하다. 이 경에 설해진 내용도 아함부에서 설해 놓은 ‘고(苦), 공(空), 무아(無我)가 주된 내용이다.

<35장>에 ‘사람은 태어남으로부터 늙음에 이르고, 늙음으로부터 병에 이르고, 병으로부터 죽음에 이른다. 그 괴로움은 한량이 없다. 마음은 괴롭고 죄는 쌓인다. 그러면서도 생사 또한 쉬지 않으니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설하여 인생의 괴로운 상황을 말하며 또 하늘과 땅과 산과 냇물 등 천지만상 그 모든 것이 한결같이 무상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더욱 절실하게 나타낸 것이 사람의 목숨이 호흡지간에 있다고 한 말이다.

<18장>에서는 무아를 설하여 몸 속의 4대(四大, mah bh ta) 곧 지(地)·수(水)·화(火)·풍(風)의 화합물인 이 몸뚱이를 ‘나’라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그리고 이 같은 어리석음과 고뇌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31장>에서 설명하면서 ‘사람은 애욕으로부터 근심을 낳고, 근심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이 없으면 근심도 없고, 근심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고 하였다. 애욕을 고뇌의 근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경은 애욕을 두려워해야 할 인과를 향나무가 스스로 타는 것에 비유하고 또 칼날에 묻은 꿀을 혀로 핥는 것에 비유하고 혹은 횃불이 손을 태우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애욕을 끊고 공을 지키면 도의 참모습을 보리라.’ 이 말씀은 곧 도의 눈을 상실하는 근원적인 것은 애욕에 있다는 것이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37호

가을 바다 거친 파도

추해광도야우한 秋海狂濤夜雨寒 가을 바다 거친 파도 밤비는 차가운데

장인별리생숙뇌 長因別離生熟惱 이별로 또다시 가슴 아파 괴롭구나.

축융봉전야학환 祝融峯前野鶴還 축융봉의 학은 산으로 돌아왔을 텐데

송운독재주중노 松雲獨在舟中老 송운은 홀로 배에 남아 늙어야 하나.

참으로 애절한 슬픔이 짙게 배여 있는 시이다. 지은 이의 가슴에 깊은 한이 서려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사신으로 일본에 들어갈 때 지은 시다. 당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직후 지은 것으로 부산까지 따라와 배웅을 해준 태연(太然)장로와 헤어지고 그 이별의 회포를 읊은 시다. 선조 37년(1604) 음력 8월에 사명대사가 왕명에 의해 사신으로 임명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해 봄에 오대산에 있던 사명대사가 스승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열반에 들었다는 부음을 듣고 거기로 가던 도중 선조의 급한 부름을 받고 발길을 돌려 조정에 들어가 일본과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일본에 갈 것을 부탁 받는다. 스승의 영결식도 치루지 못한 채 국사를 위임받아 남의 나라에 가게 되는 처지가 결코 영화로운 것이 아닌 불우한 신세였던 것이다. 더구나 임진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기 까지 10여년의 전란으로 나라는 어지럽고 민심도 불안하기만 하던 때였다.

축융봉은 중국의 태전(太顚)선사가 머물던 산봉우리 이름이다. 자신을 산에 사는 학에 비유하여 학이 산에 있어야 하는데 왜 바다에 배를 타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일종의 자조적인 서술이 읽는 이의 마음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송운은 사명당과 같이 쓰인 스님의 또 하나의 호이다. 이 시를 쓰고 일본에 건너갔던 사명스님은 8개월을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 잡혀갔던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이듬해 4월에 귀국하였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12월 제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