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때가 다하면 영혼이 오고가는 곳, 생사가 나아가는 곳을 알게 되리라(心垢盡乃至靈魂所往來生死所起向).”
부처님이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예, 밥 한끼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도 도를 모르는구나.”
세번째로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에 있는가?” “예, 숨 한 번 쉬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장하다, 그대는 도를 바로 알았구나!”
이상은 <42장경>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 말씀이다. <42장경>은 무척 간단명료한 경이다. 짧은 경문을 통하여 수도자들의 수행관을 밝게 명시해 놓은 경전이다. 전문이 모두 42장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42장경>이라 한다. 이 경은 흔히 <유교경(遺敎經)>과 치문에 나오는 <위산경책(僞山警策)>과 더불어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고 한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가장 먼저 번역된 경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이 경의 서문에는 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채 이 경이 중국에 전해 온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후한의 효(孝) 명제 때이다. 왕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이마에서 금빛을 발하고 있는 이상한 신인(神人)이 그의 궁전 앞으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꿈을 깬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이 신인이 누군인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신하 중 한 사람이 그 신인이 천축(天竺)의 성인 부처님일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황제는 곧 사람을 파견하여 월지국으로 보내 불경을 얻어 오게 하였다. 이때 필사해 온 것이 이 <사십이장경>이었다 한다.
효명제가 사신을 월지국으로 보내 불경을 얻어 오게 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공통적으로 설해지고 있다. 중국의 불교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출삼장기(出三藏記)>나 그후에 저술된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 등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을 후한 명제 영평 10년(서기 67년)으로 보는 설이 생겼다. 달마 스님이 선(禪)을 가지고 온 때는 서기 527년 양나라 무제 때이다. 그러니까 선종의 선이 중국으로 수입되기 이전 460년 전에 불경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경을 번역한 사람이 <역대삼보기> 등에 가섭마등과 법란 두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한역으로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고려대장경>, <송장경>, <원장경>에 수록된 것과 명장에 수록된 송나라 진종 때의 주 <42장경> 그리고 송의 중기 11C에 선종인 조동종에서 수축이 주한 불성 『42장경 주』와 도패가 지은 <불조삼경지남(佛祖三經指南)>에 든 것 등이다. 마등과 법란이 번역한 원형과 자구(字句)가 상이한 것도 있고 형식과 내용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 경도 여러 경전에서 인용하여 뽑은 인초경임이 형식과 내용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각 장을 따라 경 이름을 붙인 것이 유교의 십팔 장으로 되어 있는 효경(孝經)과 비슷하며 내용에 있어서 <유교경> <법구비유경>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등에 설해진 내용과 같은 것이 많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 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든 이 경을 불조삼경에 넣어 중국 초기 불교에서는 대단히 중요시 여긴 경인 점은 분명하다. 이 경에 설해진 내용도 아함부에서 설해 놓은 ‘고(苦), 공(空), 무아(無我)가 주된 내용이다.
<35장>에 ‘사람은 태어남으로부터 늙음에 이르고, 늙음으로부터 병에 이르고, 병으로부터 죽음에 이른다. 그 괴로움은 한량이 없다. 마음은 괴롭고 죄는 쌓인다. 그러면서도 생사 또한 쉬지 않으니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설하여 인생의 괴로운 상황을 말하며 또 하늘과 땅과 산과 냇물 등 천지만상 그 모든 것이 한결같이 무상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더욱 절실하게 나타낸 것이 사람의 목숨이 호흡지간에 있다고 한 말이다.
<18장>에서는 무아를 설하여 몸 속의 4대(四大, mah bh ta) 곧 지(地)·수(水)·화(火)·풍(風)의 화합물인 이 몸뚱이를 ‘나’라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그리고 이 같은 어리석음과 고뇌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31장>에서 설명하면서 ‘사람은 애욕으로부터 근심을 낳고, 근심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긴다. 애욕이 없으면 근심도 없고, 근심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고 하였다. 애욕을 고뇌의 근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경은 애욕을 두려워해야 할 인과를 향나무가 스스로 타는 것에 비유하고 또 칼날에 묻은 꿀을 혀로 핥는 것에 비유하고 혹은 횃불이 손을 태우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애욕을 끊고 공을 지키면 도의 참모습을 보리라.’ 이 말씀은 곧 도의 눈을 상실하는 근원적인 것은 애욕에 있다는 것이다.
지안스님 강의. 월간반야 2003년 12월 제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