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 같이 바다같이

개구리 소리 들리는 아파트 고층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사는 일 되물으며

불빛에

어른거리는

물빛처름 아득하다

외로운 날 채워주는 벌레소리도 못되는가

이만하기도 감사하다 손모우는 늦은 하루

흐르는

강물이 되어

바다에 젖어든다

하순희 多寶蓮(시인·마산월영초교 교사) 글. 월간반야 2008년 7월 제92호

갈등의 길, 지혜의 길

이번 겨울은 이상 한파에 이어 아이티 지진으로 더욱 꽁꽁 얼어버린 것 같습니다.

경제 대통령을 뽑아서 잘 살아지리라 생각했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진다고 하고 청년실업, 일자리창출 해결문제도 쉬워 보이진 않습니다. 더욱이 최근의 우리 사회는 급격한 갈등과 대립 속에서 무엇이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연속입니다.

세종시 문제로 정부는 정부대로, 여당과 야당, 여당은 여당내부에서도 우왕좌왕, 야당은 야당대로, 이에 곁들여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지방의 자치단체들은 그들 나름으로 서로간의 갈피를 못 잡고 서로가 자신들만이 옳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도시라고 하는데 시작부터 별로 행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4대강 사업에 있어서도 대운하다, 아니다로 시작되더니 갈등과 대립의 연속입니다. 홍수예방, 수질개선, 수량 확보, 지역 균형 개발등 화려한 것 같지만 각 지역의 이해관계와 학계의 의견도 양분되어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걱정인 것은 대형국가정책사업의 계획과 준비과정 부족, 환경영향평가와 단기간 내에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밀어 부치기식의 공사 진행에 대한 우려에 대한 목소리는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권력기관의 대표격인 검찰과 사법부의 갈등도 만만찮습니다. MBC PD수첩, 모 국회의원의 공중부양사건판결 등 서로간의 이해관계로 국가 기관 끼리 힘겨루기 하는 양상으로 비쳐 집니다. 덩달아 정치권에서도 한쪽은 사법부 개혁이니, 다른 편은 검찰 개혁이니 하고 동상이몽으로 들썩입니다. 언론은 언론대로 보수와 개혁으로 나누어지고, 또 중앙의 메이저매체와 각 지방의 매체와의 갈등으로 또 달리하고, 각종 사회단체는 그 이익 단체별로 편가르기를 하는 듯하고, 노사문제, 교육 문제 등에 있어서도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좌우의 이념 대립까지 비화하여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문제의 핵심은 우리사회 구성원인 국민들, 특히 지도자층이 갖는 서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받아 온 서구식 교육 때문에, 무한경쟁 시대에서는 남을 이겨야만 한다는 관념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심지어 종교 간의 갈등, 종교 내부의 반목 등 모든 분야에서 나오는 대립과 갈등이 동젹(動的)으로, 수직적으로 표출되는 연속적인 사회현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동양사상의 근간은 정적(靜的)이며 수평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중용(中庸)과 중도(中道)를 위한 소통과 화합의 실천을 중시하지요.

최근의 여러 사태와 현상들을 보면 법화경(法華經)의 불타는 집(火宅) 이야기와 많이 비슷합니다. 갈애(渴愛)의 불꽃, 집착(執着)의 불꽃, 탐욕(貪慾)의 불꽃, 성냄(嗔), 어리석음(恥)과 남을 배려하지 않는 아만(我慢)의 불꽃들이 곳곳에서 이글거리며 무섭게 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때에 더욱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諸行無常), 영원히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헛된 망상(妄想)이며, 꿈(幻)이며, 아지랑이라는 것을…. (諸法無我)

지금 경제적으로는 많이 풍요해 졌지만 불과 삼사십년 전, 서로가 마음을 나누고 의지하며 챙겨주며 살아가던 가난했던 시절이 더욱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내가 먼저 베풀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는 작은 감동을 주는 삶의 아름다운 소식들이야말로, 실타래처럼 마구 얽혀있는 우리 사는 세상의 갈등과 반목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古月 최광재(지역부회장, 국제포교사) 글. 월간 반야 2010년 2월 111호

고우스님─’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닦는 복이 진짜 복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닦는 복이 진짜 복

고우스님

요즘 기복을 많이 하잖아요.

이 말씀을 들어보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요? 복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닦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도는 내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고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복을 닦으면 그건 괜찮아요.

진짜 복을 닦는 겁니다.

[서장]에서는 이것을 청복, 깨끗한 복이라 해요.

이 복은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고, 나도 이익되고 남도 이익되는 복이기 때문에 그 복은 괜찮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복혜양족존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복과 혜, 둘 다 갖춘 분입니다.

이건 ‘내가 있다’고 닦는 복은 아닙니다.

‘실체가 없다’라고 알고 닦는 복은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 복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진짜 복이 있고 가짜 복이 있는 거예요.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보시하고 공양하고 복 짓는 그것이 헤아릴 수 없더라도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하면, 내가 있으니까 삼업도 있다는 말입니다.

신구의의 삼업이 그대로 있어요.

그러니까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걸 알면 삼업도 같이 없어집니다.

없다는 것을 알고 복을 닦으면 그 자체가 업도 녹이고 죄도 멸하는 게 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복을 아무리 짓더라도 욕심과 화, 그리고 어리석음은 없어지지 않으니 진정한 복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복 짓는 것으로 죄를 없애고자 하더라도 후세에 아무리 복을 많이 얻더라도 죄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그 복은 소용이 없습니다.

무아로 닦는 복이라야 진짜 복입니다.

뒤에 나오지만 양무제가 ‘절 짓고 보시했는데 복이 되느냐?’ 하니까 달마 스님이 ‘공덕도 없고 복도 없다’ 하지요.

양무제는 유아로 복을 닦았기 때문에 복이 없는 거예요.

만약 양무제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는 걸 안 후에 복을 닦았다면 그건 한량없는 복이 되지요.

우리가 복을 어떻게 닦는냐에 따라서 향방이 갈리는 겁니다.

마음 속에서 죄의 모든 인연을 없앨 줄 알면, 무아로서 죄를 없앤다는 것이죠? 이런 사람은 ‘나다-너다’를 여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없는데 무슨 죄가 있어요? 이것이 진짜 참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