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적 안목으로 문화를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내 방에 누워보아야 참으로 내 집의 안온함과 소중함을 맛볼 수 있다. 더구나 여행길이 좀 힘들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테고. 이따금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내 집과 가족, 내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과, 평상시 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감흥을 얻는 것일 게다. 또한 나이 들어 하는 여행계획은 건강이 허락할 때에 가능한 먼 곳부터, 꼭 다녀와야 할 곳부터 하는 게 좋겠다.

이 여름엔 가까운 벗들과 부부동반으로 유럽의 서남부를 십여 일 다녀왔다. 열세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내렸다. 거기서부터는 관광버스와 국내선 여객기를 이용해서 아프리카 북서부의 모로코를 거쳐 주로 스페인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기억에 남는 도시로는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유럽대륙의 서쪽 끝인 까보 다 롯, 모로코의 중세도시페스, 추억의 명화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Casablanca’로 유명해진 카사블랑카,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 등과 스페인에선 비제의 ‘카르멘’, 로시니의‘세빌랴이 이발사’로 더 알려진 세비아, 역사의 도시로 이민족들의 왕궁이 흥망한 모습이 ‘알함브라궁전’으로 남아 있는 그라나다, 8세기중엽부터 11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왕국의 수도였던 코르도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똘레도, 현재의 수도인 마드리드, 가우디와 피카소를 빼면 쓰러질 것 같은 바르셀로나 등이다.

며칠 지나지 않았건만 서둘러 다니느라 무엇을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스페인’에 대한 나의 인상이 확실히 바뀐 것은 사실이다. 유럽에서 역사가 가장 긴 나라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강성했던 나라로,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여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소유한 지난날의 강대국 정도로 생각하고 발을 디뎠던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와 유럽의 교차점이며,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관문으로서 유럽ㆍ아프리카ㆍ지중해ㆍ대서양의 문화를 골고루 간직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스페인의 문화는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이겠지만 내가 본 스페인의 문화는 ‘아랍 문화의 바탕 위에 유럽식의 기독교 문화를 가미’한 것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중세 도시ㆍ왕궁ㆍ성ㆍ교회 등에서 아랍 문화(이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고, 힘으로 이슬람을 밀어낸 뒤 그들의 문화를 전부 파괴하거나 일부를 파괴하고는 그 바탕 위에 기독교 문화로 단장한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이 자랑하는 대성당이나 왕궁의 한결같은 특징은 바로 ‘이슬람 문화 + 기독교 문화’로 보였다.

그렇다고 고유한 그들의 문화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 건축가 가우디와 현대 회화의 흐름을 바꾼 피카소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낀 것은 두고두고 잊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문화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게 분명히 있었다. 아랍문화든 기독교문화든 대단한 것만은 틀림없다. 건축기술이 그러했고, 조각이나 회화가 그러했고, 스케일이 그러했다. 마치 영화 ‘자이안트’에서 ‘누가 더 거대하냐’고 외치던 것처럼 스페인의 교회는 하나같이 거대함에다 얼마나 예술성을 가미했는가 하는 경쟁의 산물로 보였다. 보기에 따라선 지배자의 권능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 있고, 거대한 역사(役事)에 희생된 하층민의 고뇌가 어리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그들의 문화로 소중히 관리하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문화를 수십 년을 두고 보수를 하는가 하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물은 1882년에 착공하여 초대 건축가 비야르에 이어, 가우디로 이어졌고, 현재는 3대 건축가인 수비락에 의해 공사가 진행중인데 아직 완공 시기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기간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와 장인들이 땀과 혼을 쏟아 붓고 있는지 알만하다.

집에 돌아온 지 한 주일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눈만 감으면 구릉과 산야의 올리브나무요, 눈을 떴다가 다시 감으면 까마득히 쳐다보이는 교회의 대리석 기둥이요, 천장의 조각과 그림과 종탑 뿐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 문화는 물론이려니와 하찮다 여길 이민족의 문화라도 소중히 여겨야 하겠다. 이즈음 우리 불교계에도 불사에 열을 올려 ‘크고 웅장함’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겉보기에 현혹되지 말고 뒷날 불교와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갖고 고민할 사람들을 한번쯤 생각하였으면 좋겠다.

김형춘 향암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9월 제82호

경봉스님─복은 아껴야 한다

복은 아껴야 한다

-경봉 스님-

과수원의 과목(果木) 키우는 법을 배우는데 칠판 강의를 듣거나 말과 글로써 배우더라도 자기가직접 과수원에서 이삼십년간 과목을 키워보면 선생에게 배운 그 이상의 것을 자기도 모르게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이러한 것을 자기 자식이 제일 가까우니 자식에게 가르친다.

자식에게 가르친다지만 도저히 말로써 가르칠 수 없는 묘한 이치가 있다.

또 말로써 설명해주더라도 듣는 사람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정법안장의 오묘한 진리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글로써 보일 수 없다.

어느 정도는 말과 글로 이야기하여 보여줄 수 있지만 그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면 무슨 소린지 모른다.

우리 수행하는 이들은 수행하는 것을 매일 점검해야 하고 또 세속에 사는 이들은 부모님 밑에서 살 때에는 몰랐는데 장가가고 시집가서 보니 걱정되지 않는 일이 없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살펴보면 모두 물질 아니면 사람의 걱정이니 불교를 믿는 이들은 부처님의 그 초월한 정신에 계합되어 수심 걱정 보따리를 확 털어버리고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멋들어지게 살아야 한다.

여러분들이 오늘부터 회계를 대기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에 무슨 보람된 일을 하였는가, 이 소소령령한 자성 자리에 무슨 이익이 될 만한 수양을 쌓았는가, 또 남에게 착한 일을 하여 사회에 헌신한 일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 보살행을 생각이라도 해보았는가 , 이것을 전부 기록해 봐서 부끄러우면 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로서의 생활을 다시 시작해서 뒷날 다시 기록해볼 때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겠다.

일본 선종의 조동종 시조 도원(道元)선사의 수제자 되는 스님이 그 당시 전좌(典座)라는 소임을 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수좌가 보니까 매일 밤 자정쯤 되면 무엇을 끓여서 혼자서 먹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수좌가 조실 스님인 도원 스님게 이 일을 말하자 조실 스님이 자정 때쯤 돼서 살펴보니 사실인지라 “무엇을 만들어서 너 혼자만 먹느냐, 나도 좀 주려무나.” 하니까 한사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세 번째 밤에는 조금 주는 것을 먹어보니 고약한 냄새가 나고 도저히 먹지 못할 음식이라서 그 제자에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고 하니까 “이것은 수채 구멍에 누른밥 찌꺼기와 밥 남은 것을 공양주들이 마구 버리기에 아까워서 버릴 수는 없고 이것을 먹기 위하여 다른 스님네들이 다 잠든 자정에 비밀히 끓여 먹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이 감격하여 말하기를 “흘러가는 물이라도 쓸데없이 함부로 쓰지 않도록 해야겠다”라고 하였다.

이 일이 우리 일상생활에 매우 경계될 말한 일이다.

그래서 선문(禪門)의 규범에 이르기를 한 낱의 쌀이 땅에 떨어졌으면 나의 살점이 떨어진 거와 같이 생각하고 한 방울의 간장이 땅에 떨어지면 나의 핏방울이 떨어진 듯이 생각하라고 하였다.

개성가는 길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

‘산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 ’.

중고등학교 시절에 즐겨 외던 고시조들이 줄줄이 되살아난다. 처음 시조는 야은 길재의 시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 옛 도읍지 개성을 쓸쓸히 다시 찾은 충신의 감회를 읊은 것이고, 두 번째 시는 명월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을 유혹했던 시라 했던가. 마지막 시는 백호 임제가 평안감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당대 최고의 명기인 명월을 찾았으나 이미 저승 사람이 되었는지라 그의 무덤을 찾아 술 한잔 부어놓고 지은(?) 시라고 전해진다. 이 일로 인해 평안감사로 부임도 채 하기 전에 파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백호는 개의치 않고 무거운 짐을 벗은 듯이 나선 김에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의 산천경계를 두루 구경하고 돌아왔다 한다.

개성, 서울에서 육로로 70여 km.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고려왕조의 옛 도읍지. 마식령산맥의 말단부가 북에서 남으로 뻗어내려 있고, 남쪽 일부는 한강과 예성강의 하류 지역으로 좁은 분지를 이루는 곳. 북쪽에 송악산, 동남쪽에 용수산, 서남쪽에 진봉산이 있어 부산대수(負山帶水)의 지세를 형성하여 고려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단다. 해방된 조국에서 잠시 남쪽의 영토였던 개성은 6.25로 인해 북녘 땅이 되고 말았으니 그곳에 가본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 땅 ‘개성’에 갈 기회가 왔다. 12월 중순께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는 한 기업의 준공식에 지인의 소개로 운 좋게 참석하게 되었다. 그냥 공단 구경만 한다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텐데 개성시내 관광과 함께 예전의 개풍군 관할이었으나 지금은 장풍군이 된 ‘월고’라는 시골 화강암 탄광까지 구경할 수 있다기에 기를 쓰고 따라 나섰다. 미명의 새벽에 경복궁 옆 주차장에 모여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다행히 맨 앞좌석이 비어서 바깥 구경도 할 겸 앞에 앉아서 개성 가는 길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행운이 겹쳤다고나 할까. 몇 년 전 가족들과 같이 자유로를 거쳐 통일전망대와 임진각을 둘러본 적이 있었기에 임진각까지는 크게 낯설지 않았다. 길은 그때보다 더 넓혀졌고 잘 단장되어 있었다.

임진각을 지나 새로 건설된 다리를 건너면서 분단의 현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첩첩이 가로막힌 바리게이트, 길 양쪽의 철조망, 무장한 초병들 …. 접경지역이 가까울수록 차량도 뜸하다. 차내의 일행들도 이야기 소리가 줄어들고, 성에 낀 창을 닦고 바깥을 주시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측 CIQ(세관, 출입국관리, 검역을 하는 곳)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차량들이 많아졌다. 산소용접을 하는 산소탱크를 실은 차, 화공약품을 실은 탱크로리, 연탄, 건설현장의 H-빔, 돌, 시멘트블록, 조경을 하기 위한 나무, 승용차, 플라스틱 파이프 …. 눈에 보이는 것들이 이러니 저 많은 화물차량들 속엔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 지인의 표현으로는 물과 모래 외에는 다 가져가야 한단다. 모두가 개성공단 건설현장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화강암 광산을 둘러보고, 개성 시내관광에서는 고려박물관과 선죽교를, 그리고 공장을 둘러보고, 점심과 함께 반주로 백두산 들쭉술과 송악소주, 대동강맥주도 맛보았다. 돌아오는 길 차 속의 내 머리는 꽤나 복잡했다. 씁쓸하고 착잡하였다고나 할까. 6백여 년 전 불교문화가 찬란했던 고려왕국의 도읍지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니 그저 ‘무상(無常)’이외의 다른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김형춘 향암 (창원전문대교수, 반야거사회 회장) 글. 월간반야 2008년 1월 제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