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에 봄이 다해

강호춘진낙화풍 江湖春盡洛花風 강호에 봄이 다해 꽃잎은 바람에 날리는데

일모한운과벽공 日暮閑雲過碧空 해 저문 하늘에 구름은 어딜 가나

빙거요득인간환 憑渠料得人間幻 너로 인해 인간사 허깨빈 줄 알았으니

만사도망일소중 萬事都忘一笑中 한 번 웃고 만사를 모두 잊어버리자

늦은 봄 떨어진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어느 날 석양 무렵 운수납자 한 사람이 길을 가다 서산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자기의 한 생애도 속절없는 구름과 같은 신세임을 새삼 느꼈다. 아니 세상만사가 모두 뜬구름이다. 일장춘몽이라 해온 말 그대로 한바탕 꿈과 같은 세상사는 그대로 하늘에 떠가는 뜬구름이다. 『화엄경』에는 “삶이란 한 조각 구름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 사라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이라 하였다.

불교 수행에 있어서 무상을 느끼는 어떤 계기가 빨리 올수록 발심이 잘 된다고 한다. 출세간의 도를 닦는 일에 있어서 세간의 무상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도심배양에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 시는 부휴당(浮休堂) 선수(善修1543~1615)의 문집에 나오는 시이다. 스님은 17세에 출가 제방을 다니며 정진하다 부용(芙蓉)의 법을 이었다. 임진왜란 때 승장(僧將)이 되기도 했던 그는 한때 유가의 글을 오래 공부해 시문에 능했다. 그의 문집 부휴당대사집이 남아 있는데 5권 가운데 4권이 시로 되어 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5월 제66호

경봉스님─부처란 마음 자리 하나 밝힌 사람

부처란 마음 자리 하나 밝힌 사람

-경봉스님-

법좌에 올라 한참 묵연히 계시다가 주장자를 세번 치시고 이르시기를…..

병을 다스리는데 약을 많이 먹는 것만이 다 약이 되는 것은 아니고 신선의 환단이라는 약이 있는데 그 약을 콩알만큼만 먹어도 일체 모든 병이 다 다스려지는 것과 같이 종사(宗師)의 법문은 많은 것이 아니라 눈만 껌뻑하고 손만 들어도 다 그 속에 법문이 있다.

산두월괘운문병 (山頭月掛雲門餠) 문외수류조주다 (門外水流趙州茶) 산 머리에 달이 걸려 있으니 운문의 떡이요, 문 밖에 물이 흐르니 조주의 차로다.

개중하자진삼매 (箇中何者眞三昧) 구월국화구월개 (九月菊花九月開) 이날 가운데 어떤 것이 삼매요, 구월 국화꽃은 구월에 피도다.

예전에 운문스님이란 선지식이 계셨는데 사람들이 법문을 들으러 가면 그 스님 말씀이 ‘떡 먹고 가거라’하는데서 운문병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떡이나 주고서 떡 먹고 가거라 하면 괜찮지만 떡이나 주어야지…

또 조주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께 법문을 들으러 가면 ‘차 먹고 가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조주스님의 차(茶) 진리법문인 것이다.

동짓달 초이렛날 여러분에게 주는 법문인데 이 두 글귀만 알면 모두 이 도리를 알게된다.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보관일체중생(普觀一切衆生)하니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 널리 일체 중생을 보니 모두가 여래의 지혜와 부처님의 덕상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모두 동불중생(同佛衆生)이요, 곧 진리자리는 부처님과 중생은 한가지로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또 일체 중생의 종종환화(種種幻化)가 여래의 원광묘심(如來圓光妙心)이라 하니 모든 중생의 가지가지 환화가 곧 여래의 원만하고 묘한 마음이 되는 것이니 이 마음을 버리고 나면 다른 것이 뭐 있겠는가?

뚜렷이 깨친 이 묘한 마음 원광묘심을 버리고 다른 것이, 구할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다만 이 마음자리 하나 밝힌 사람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聖賢)들도 그 마음을 닦으려고 이산 저산 다니지만 그 도를 배우려면 오직 이 법문을 의지해야만 할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과 종사의 모든 법문이 모두 이 하나이니 간절히 밖을 향해 구하지 말라는 말이다.

곧 물은 찬것이 물의 성질이요, 불은 더운것이 불의 성질이요, 소금은 짠 것이 소금의 성질이며 사람은 깨칠 마음 자리가 곧 자기인 것을 알고 이 심정 자리가 물들지 않아야 본자원성(本自圓性)이 뚜렷이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인 것이다.

흔히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면 깜짝 놀란다.

놀랄 것이 아니라 이자리 즉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몸이 곧 여여한 부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모범이 되고 법규가 될 말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는데 참으로 듣기 어려운 말이니 잘 기억하여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처세함에 있어서 가정과 사회와 국가 사이에 있어서 겸손하고 화(和)하고 사양할 줄 알아야 된다.

– 손기이인(損己利人)이라.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이롭게 하라.

석가 부처님은 나도 이익이 되고 남도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한 것이며 또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온 것도 내 몸을 위해서 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났다고 하였으며 49년을 설법하셨다.

– 물위무익(勿爲無益)이라.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이익 없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

이익 없는 짓은 하지말라.

우리가 불교를 신앙하는 것은 불교 진리를 일상생활에 활용하여 멋지게 살아가는데 뜻이 있다.

– 당신유손(當愼有損)이라.

일을 함에 있어 손해가 될 것은 마땅히 삼가 하여야 된다.

– 비애희락(悲哀喜樂)이라.

슬픈 일이나 기쁜일에 동하지 말고

– 물영과정(勿令過情)이라, 정과 분수에 맞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자면 만경창파에 배를 타고 가는것과 같아서 바람도 일어나고 비도오고 풍파도 일어 배가 뒤집혀 질듯이 위험한 고비속에서도 견디면 구름도 비도 풍파도 없는 경지를 가게 되는 것이다.

– 호흡정여(呼吸精如)라.

우리는 음식만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코로서는 호흡을 잘 조절하고 음식도 탐내지 말아야 하며 물건도 적당히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 안신규방(安身閨房)이라.

주색(酒色)에 빠지지 말며 자기 부부외는 일체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 정습정혜(靜習定慧)라 고요히 앉아 선정과(禪定)과 지혜(智慧)를 닦아야 정신이 통일되고 지혜가 생긴다.

참선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화두는 죽 끓듯이 끓어 달아나서 서울, 부산, 진주, 마산으로 딸, 아들 친한 집으로 돌아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현재, 미래 일이 생각되고 이생각, 저생각 하다보면 무슨 지혜가 생길 수 있나 편히 앉아서 닦아야 한다.

– 안심무망(安心無妄)이라.

마음이 편안하고 망령된 생각이 뚝 떨어져야 지혜도 밝아져서 장사도 잘 되지만 망령된 생각으로 어떻게 하여 남을 속여 재물을 얻으려고 생각만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남이야 죽든지 살든지 자기만 돈 벌려고 하니 그 돈이 나갈 때는 사람을 상하게 하고 집안을 망치고 나가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좌와순시(坐臥順時)라.

앉는 것과 눕는 것은 때에 맞추어 하라는 뜻이고 모든 일에는 때와 순서가 있다.

봄 이오고 여름, 가을, 겨울이 옴에 모두 자연의 진리 법칙이다.

– 물영신태적유선공(勿令身태積有善功)이라.

몸은 게으르게 가지지 말며 착한 공덕을 쌓으라는 것이다.

내가 일생동안 남을 위하여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노트에 한번 적어보라.

옛날 하회땅에 유 정승이 있었는데 7대 할아버지가 재를 넘어가는 갈림길에다 집을 한채 지어 놓고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옷없는 이에게 옷을, 신 없는 사람에게 신을, 노자없는 사람에게 노자를 주기를 30여년 동안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소원이 그가 사는 곳이 넓은 벌판인데 그곳에 그의 자손이 꽉 차도록 하는 것이 그의 원력이었다.

그토록 많은 공덕을 베풀었으므로 원력이 이루어져 그 집안에 백의(白依) 정승(政丞)이 났다고 한다.

그러니 논에 물이 아무리 있어도 뒷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결국 말라 버리는 것과 같이 전생에 복을 조금 지었더라도 금생에 내가 논에 뒷물 넣듯이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음덕을 많이 베풀어야 한다.

– 구고도액(救苦度厄)하고 제곤부위(濟困扶危)하라.

고생되는 사람을 구제하고 액난있는 사람을 건져주고 곤난한 사람을 건져주고 위태로운 사람을 붙들어 주라.

의연영축산두월(依然靈축山頭月) 만겁년전여시수(萬劫年前汝是誰) 저 영축산 머리에 걸린달아 만겁년전에 너가 이 누구냐?

할! 하시고 하좌하시다.

-경봉 큰스님-

자료출처:불교신문

초기경전 (4)장아함경

<장아함(長阿含經, Dirghagama-sutra)>은 남전 팔리어 본(本)의 {장부(長部)}와 같은 것인데 전부 22권으로 그 내용이 30개의 소품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과거 칠불(七佛)의 태어나고 출가하고 수도하고 성도하고 설법하는 등 8가지 장면을 설해 놓은 대본경(大本經)에서부터 기세경(起世經)까지 여러 가지 내용이 설해져 있는데, 결국 부처님의 해탈도를 설하고 더 나아가 중생을 교화하는 구제의 길과 신앙을 이야기한다. 미륵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일부 나오고 염불사상과 탑사(塔寺) 공양의 공덕을 찬탄해 놓은 내용도 있다.

그리고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말씀이 설해져 나온다. {전륜성왕 수행경}에 나오는 이 말은 불교의 인본주의(人本主義) 법본주의(法本主義)를 설파해 놓은 말로 진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법, 다르마(Dharma)라는 것이다. 때문에 무엇을 의지하여 수행하느냐 하면 그것은 곧 자기를 의지하고 법을 의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밖에 없으니 그 밖에 무엇을 의지할 게 있으리오.

자기가 자기를 조복할 때에 아주 희귀한 귀의처가 생기리라.

등명(燈明)이라는 것은 등불이 밝다는 말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아 밝히고 법을 등불로 삼아 밝혀 간다는 뜻이다. 어느 때 부처님이 라자그라하에서 인간에 노닐다 일천이백 비구들을 데리고 바이살리에 도착하였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자기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여 다른 데 귀의하지 말라.” 이것이 그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법문이다.

불교의 수행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는 자력 수행이다. 물론 신앙적인 방편에서 본다면 불보살께 귀의하고 의지하는 의타적인 요소가 있겠으나 궁극적인 깨달음의 성취는 자기의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력 종교라 하며, 사람이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본위의 수행이므로 인본주의 종교라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특징이다.

<아함경>, 특히 이 <장아함경>에 불교의 대본(大本)을 바로 설해 놓은 것이다. 인본주의 자력 종교인 불교이기 때문에 부처와 중생은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는 있지만, 그 근본은 같다는 것이다. 후에 대승경전(大乘經典)이 나오면서 이 뜻은 더욱 강조되어 설해진다. ‘내가 깨달으면 내가 곧 부처다’라는 이 논리는 부처를 인간 안에서 찾고 인간 밖에서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이 성불하여 부처와 동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시켜서 보는 높은 인격이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아함경>은 제번국의 삼장이었던 불타야사가 축불념과 함께 후진 홍시(弘始) 16년(서기 413년)에 번역하여 <한역대장경>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장아함경>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속하여 경전으로는 다른 아함과 함께 부처님 초기설법의 전형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장아함경>을 읽다 보면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제9중집경>에 보면 부처님이 등이 아파 고통을 느끼자 부처님을 대신하여 사리불(Sariputra)이 설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처님이 몸이 불편하여 제자가 대신 설법을 하는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대승경전에는 나오지 않는 아함경다운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지안스님강의. 월간반야 2002년 12월 (제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