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스님─`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닦는 복이 진짜 복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닦는 복이 진짜 복

-고우스님-

요즘 기복을 많이 하잖아요.

이 말씀을 들어보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요?

복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닦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도는 내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고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복을 닦으면 그건 괜찮아요.

진짜 복을 닦는 겁니다.

[서장]에서는 이것을 청복, 깨끗한 복이라 해요.

이 복은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고, 나도 이익되고 남도 이익되는 복이기 때문에 그 복은 괜찮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복혜양족존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복과 혜, 둘 다 갖춘 분입니다.

이건 ‘내가 있다’고 닦는 복은 아닙니다.

‘실체가 없다’라고 알고 닦는 복은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 복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진짜 복이 있고 가짜 복이 있는 거예요.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보시하고 공양하고 복 짓는 그것이 헤아릴 수 없더라도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하면, 내가 있으니까 삼업도 있다는 말입니다.

신구의의 삼업이 그대로 있어요.

그러니까 실체가 없고, 공이고, 무아라는 걸 알면 삼업도 같이 없어집니다.

없다는 것을 알고 복을 닦으면 그 자체가 업도 녹이고 죄도 멸하는 게 됩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복을 아무리 짓더라도 욕심과 화, 그리고 어리석음은 없어지지 않으니 진정한 복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복 짓는 것으로 죄를 없애고자 하더라도 후세에 아무리 복을 많이 얻더라도 죄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그 복은 소용이 없습니다.

무아로 닦는 복이라야 진짜 복입니다.

뒤에 나오지만 양무제가 ‘절 짓고 보시했는데 복이 되느냐?’ 하니까 달마 스님이 ‘공덕도 없고 복도 없다’ 하지요.

양무제는 유아로 복을 닦았기 때문에 복이 없는 거예요.

만약 양무제가 연기 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무아라는 걸 안 후에 복을 닦았다면 그건 한량없는 복이 되지요.

우리가 복을 어떻게 닦는냐에 따라서 향방이 갈리는 겁니다.

마음 속에서 죄의 모든 인연을 없앨 줄 알면, 무아로서 죄를 없앤다는 것이죠? 이런 사람은 ‘나다-너다’를 여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없는데 무슨 죄가 있어요?

이것이 진짜 참회입니다.

고우스님─해탈문 여는 열쇠는 연기

해탈문 여는 열쇠는 연기

고우스님 법문

선(禪)을 놓고 저는 말을 하려하고 여러분들은 들으려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선을 말한다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말’(馬)을 보고 ‘사슴’(鹿)이라고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고, 우리는 모두 본래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말로는 해석할 수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라 해도, 중생이라 해도, 번뇌라 해도, 지혜라 해도, 구속되어 있다 해도, 해탈해 있다 해도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빌려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 하는데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깨달은 분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그 가르침의 효능을 제대로 발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차이를 알면 불교의 궁극적인 핵심과 좀 점에 제가 말씀드렸던 ‘본래 완성’ ‘본래 성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것 중 하나가 우리는 형상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상에만 머물고 있는 우리는 좋다 나쁘다, 이것은 우수하다 열등하다, 귀하다 천하다며 분별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분별은 귀와 눈, 입 등을 통해서 시작되고 그로인해 자신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학대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학대를 하니 더 큰 문제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앞집은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옆집 애는 서울대 다니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 이것은 자기와 주변 사람까지 학대하는 겁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그런 식으로 우열을 따지고 취사선택하면서 국가는 국가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주변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지구상에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면 밖에서 학대하는 동기유발을 일으키더라도 절대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내가 화내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니, 남이 나를 화나게 하는 그 허물을 보지 말고 ‘화를 내는 자기 허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법회를 시작하면서 반야심경을 하셨는데 ‘오온개공’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공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해 보라고 하니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을 보면 허망하기만 한데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 갑니까?” ‘허망’이나 ‘공허’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 ‘공’을 이해하려면 ‘연기’를 알아야만 합니다.

여기 이 보제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재료가 섞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재료 중에서 무엇을 갖고 ‘보제루’라 하겠습니까? 나무를 보고 ‘보제루’라 할 수 있습니까? 이 기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기왓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조화롭게 모여 있으니 ‘보제루’라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보제루’도 실제로 없는 것이고 이름일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 보제루가 허물어지면 단지 보제루를 구성했던 재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보제루’도 실체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손가락 A와 B가 의지를 해서 만든 삼각형을 C라고 이름해 봅니다.

이 C는 A와 B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A와 B가 없어지면 C(삼각형)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A와 B가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C는 그냥 이름 뿐 입니다.

그래서 이 C를 우리는 공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없다라 하기도 하고 무아라고 합니다.

이 몸뚱이도 60조의 세포가 모여 있는 덩어리라 하는데 이 60조 덩어리 중 어느 세포를 갖고 ‘나’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실체가 없으니 너무 허망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나’가 없다 하지만 ‘나’가 있지요? 여러분 지금 이렇게 앉아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 하는 겁니다.

태어나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병들어 죽는 것도 공입니다.

손가락 A와 B가 없어져서, 나무기둥과 기와가 없어져서 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이해만 해도 자신을 괴롭히는 학대는 하지 않습니다.

이 도리를 체득하면 분별을 하지 않는 삶을 사니 대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수행을 해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이 드실지 모르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금 설명을 드린 그 사실에 대해 우리가 체득하지 못해서 그렇지 체득해 보면 본래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은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부처님과 같이 살고 행하면 운문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무정이 다 그렇게 본래 이토록 위대하게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습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그러는 것이니 얼마나 억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능엄경』에 손가락과 달 얘기가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셨듯이 “달을 보아야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리가 달이고 손가락은 진리를 보라고 가르치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수행방편에다가 생활을 맞추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손가락에 달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역순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이렇게 해서 사실 달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 선불교는 아예 달을 말합니다.

손가락을 통한 일상생활이 아니라 달을 통한 일상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만 공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기와 공을 보고 일상생활에서도 ‘공 도리’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오늘 제 얘기를 듣고 내 존재원리가 그렇게 위대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오늘부터 화내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을 하자는 겁니다.

이른바 ‘달 불교’ 한다는 한국불교가 ‘손가락 불교’를 하는 다른 나라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출가해 보니 이런 말이 있더군요.

“도인은 멀리서 봐야 도인이지 가까이서 보면 도인이 아니다.” 이것은 정말 아닙니다.

도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도인입니다.

여러분들도 도인입니다.

깨달음은 정진하는 도중 인연이 닿으면 찾아옵니다.

수행을 하며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삶에 무게를 두십시오.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 올라서되 환상을 갖지는 마십시오.

연기와 공을 이해하고 이것을 생활하며 체험해 가는 것이 공부요, 수행입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좋은 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우스님─우리는 왜 불교공부를 해야하는가

우리는 왜 불교공부를 해야하는가?

( “백일법문 재가논강”의 오대산 월정사 수련회에서 하신 법문)

이번 “백일법문”공부를 하면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가? 이 공부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공부도 잘 되고 불교가 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선(禪)을 한 입장이니까, 선의 입장에서 “왜 불교 공부를 하느냐?”에 답을 드린다면, “우리가 부처다, 내가 부처다”는 것을 알고 믿어 “부처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바로 안 사람도 있을 겁니다만, 대부분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부처입니까? 부처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왜 필요한가? 이 점을 먼저 알아봅시다.

이 지구상에는 수 많은 대립과 갈등, 전쟁이 있습니다.

개인, 이웃, 사회, 인종, 민족, 종교 갈등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나라에 갈등도 엄청나게 많지요.

진보와 보수, 성장과 분배, 노와 사, 남과 북 …

그런데 우리가 부처란 것을 이해하게 되면 이런 모든 갈등이 하루 아침에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운문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라는 것을 이해하면 “매일 매일 좋은날이다” 우리가 부처인 것을 알아 부처되기 위해 공부한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란 것을 알아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불교 안에서도 갈등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가끔씩 일어나는 총무원의 각목 싸움뿐만 아니라 선과 교의 갈등, 선과 위빠사나, 염불, 주력 등등의 분열과 갈등은 참 희한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여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안다면 부처와 부처가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기 때문에 싸웁니다.

우리가 가정으로 돌아와 보면 부부 사이에도 싸웁니다.

부모와 자녀도 그렇습니다.

형제간에도 그렇지요.

또 자기 자신과도 분열하고 갈등하는 일도 많습니다.

서로 학대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반목하고 무시합니다.

상대와 대립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부처라 하는데 이렇게 싸울까요? 우리의 의식구조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의식구조의 본질이 진짜 대립 갈등하는 구조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를 바로 이해하면 이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대립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가 바로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통일이 되어 반목과 질시, 무시, 억압,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이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우리의 존재원리가 이미 통일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착각에 빠져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롭게 살고 대립과 갈등 그리고 전쟁까지 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인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 내가 부처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부처라는 것을 알기 위해, 중도연기를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부처라는 것을 빨리 알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백일법문』을 통해 내가 부처라는 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하고 남는 시간은 실천해서 체험하는데 투자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출가한지 40년이 넘습니다만, 출가해서 이것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정열을 바쳤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고 보니까, 알고 보니까 굉장히 억울하데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알기 위해 내가 “그 수 많은 시간을 보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백일법문』을 읽고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그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해서 실천 수행 즉, 참선을 하면서 사회 봉사도 하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믿으면 매일매일 좋은날이 된다.

제가 불교를 이해하고 믿으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왜 가능할까요? 간단합니다.

“중도연기”만 이해하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그럼 “중도연기”가 무엇일까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이든 단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연구 성과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최소 물질이란 것도 2~3가지 물체가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연기(緣起)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란 것도 아파트이든 단독 주택이든 실제로 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백 가지 재료가 얽혀서 집이 된 것이죠.

집이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나옵니다.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이다”하지요.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집이란 것도 독립된 실체가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 모든 물질이 이와 같아서 서로서로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이것을 “우주 만물이 연기(緣起)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우주 만물에 나도 포함되어 있으니 나도 연기로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의 몸은 수십조의 세포가 결합하여 생긴겁니다.

이 수십조 세포가 결합하여 정신 작용을 나타내니 이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 하여 연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내가 연기로 존재한다는 존재 원리를 알게 되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 나와 남을 차별하고 진보다 보수다, 옳다 그르다 시비분별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 연기를 이해한 것을 “양변을 여읜 자성 자리”라 합니다.

양변을 여읜 자성 자리를 깨치면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연기를 이야기한 종교는 불교 밖에 없습니다.

이 불교의 양변을 여읜 자리는 부처도 부정하고 중생도 부정합니다.

양변을 여읜 자리에는 부처도 중생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입니다.

남녀간에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쓰지 않습니다만, “은애(恩愛)”라는 좋은 말이 있습니다.

서로 서로 위해주고 사랑한다는 말이죠.

서로 위해주고 고맙게 생각하며 사랑한다면 이혼할 일이 없겠지요.

우리 나라 이혼율이 세계 1위라는데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 지구상에 대립과 갈등, 전쟁이 지속되고 심화되는 것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구조 때문인데요, 더 심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내가 없다”는 연기(緣起)사상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연기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스님들은 평생을 보내고도 알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백일법문』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200페이지 정도, 그것도 많습니다.

100페이지 정도만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으면 어느 날 이해가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평생 읽지 않습니까? 『백일법문』100페이지까지는 5~10번까지만 읽으면 아무리 둔한 사람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연기”를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이 참선(參禪)입니다.

그중에서도 화두 참선이 가장 빨리 가는 길입니다.

혹 참선이 어려워 공부가 잘 안되는 분은 염불, 위빠사나, 절, 봉사 등 다른 공부를 하시되 자기를 비우는 공부는 다 불교 수행입니다.

양변을 여의어 가고, 착각을 비워가는 겁니다.

그래서 해를 가리는 구름이 조금씩 조금씩 엷어 가는 겁니다.

불교 수행은 뭘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남을 위해 주고 도와주고 자상하게 됩니다.

“연기”를 이해하기 위해 『백일법문』을 다시 보세요.

이 존재 원리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해하게 되면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굉장히 회한을 느끼고 눈물이 나올겁니다.

회한의 눈물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나에 집착하여 남을 미워하고 살았나! 선과 교는 하나다.

남과 대립하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다.

불교의 선(禪)과 교(敎)는 다른 게 아닙니다.

같습니다.

교는 양변을 여읜 자리를 논리로 이해하자는 것이고, 선은 여읜 자리를 논리를 초월하여 체험하자는 겁니다.

결국 같은 겁니다.

이것에 벽을 두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원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됩니다.

선과 교의 차별도, 부처와 중생의 차별도,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별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흔히 참선하는 사람들은 목에다 힘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것을 목에 깁스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참선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양변을 떠나자는 사람이 거꾸로 양변으로 가는 겁니다.

잘못된 것이죠.

평등합니다.

차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 우주의 존재 원리가 연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연기를 알면 이 세상에 독립된 내가 따로 없고 나와 남이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남과 대립 갈등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돕고 협력하여 자기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어 무한 경쟁이 아니라 무한 향상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출처 : 달마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