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스님─우리는 왜 불교공부를 해야하는가

우리는 왜 불교공부를 해야하는가?

( “백일법문 재가논강”의 오대산 월정사 수련회에서 하신 법문)

이번 “백일법문”공부를 하면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가? 이 공부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공부도 잘 되고 불교가 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선(禪)을 한 입장이니까, 선의 입장에서 “왜 불교 공부를 하느냐?”에 답을 드린다면, “우리가 부처다, 내가 부처다”는 것을 알고 믿어 “부처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바로 안 사람도 있을 겁니다만, 대부분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부처입니까? 부처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왜 필요한가? 이 점을 먼저 알아봅시다.

이 지구상에는 수 많은 대립과 갈등, 전쟁이 있습니다.

개인, 이웃, 사회, 인종, 민족, 종교 갈등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나라에 갈등도 엄청나게 많지요.

진보와 보수, 성장과 분배, 노와 사, 남과 북 …

그런데 우리가 부처란 것을 이해하게 되면 이런 모든 갈등이 하루 아침에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운문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라는 것을 이해하면 “매일 매일 좋은날이다” 우리가 부처인 것을 알아 부처되기 위해 공부한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란 것을 알아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불교 안에서도 갈등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가끔씩 일어나는 총무원의 각목 싸움뿐만 아니라 선과 교의 갈등, 선과 위빠사나, 염불, 주력 등등의 분열과 갈등은 참 희한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여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안다면 부처와 부처가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기 때문에 싸웁니다.

우리가 가정으로 돌아와 보면 부부 사이에도 싸웁니다.

부모와 자녀도 그렇습니다.

형제간에도 그렇지요.

또 자기 자신과도 분열하고 갈등하는 일도 많습니다.

서로 학대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반목하고 무시합니다.

상대와 대립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부처라 하는데 이렇게 싸울까요? 우리의 의식구조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의식구조의 본질이 진짜 대립 갈등하는 구조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를 바로 이해하면 이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대립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가 바로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통일이 되어 반목과 질시, 무시, 억압,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이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우리의 존재원리가 이미 통일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착각에 빠져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롭게 살고 대립과 갈등 그리고 전쟁까지 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인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 내가 부처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부처라는 것을 알기 위해, 중도연기를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일법문』을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부처라는 것을 빨리 알기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백일법문』을 통해 내가 부처라는 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하고 남는 시간은 실천해서 체험하는데 투자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출가한지 40년이 넘습니다만, 출가해서 이것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정열을 바쳤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고 보니까, 알고 보니까 굉장히 억울하데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알기 위해 내가 “그 수 많은 시간을 보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백일법문』을 읽고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그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해서 실천 수행 즉, 참선을 하면서 사회 봉사도 하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믿으면 매일매일 좋은날이 된다.

제가 불교를 이해하고 믿으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왜 가능할까요? 간단합니다.

“중도연기”만 이해하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그럼 “중도연기”가 무엇일까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이든 단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연구 성과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최소 물질이란 것도 2~3가지 물체가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연기(緣起)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란 것도 아파트이든 단독 주택이든 실제로 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백 가지 재료가 얽혀서 집이 된 것이죠.

집이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나옵니다.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이다”하지요.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집이란 것도 독립된 실체가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 모든 물질이 이와 같아서 서로서로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이것을 “우주 만물이 연기(緣起)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우주 만물에 나도 포함되어 있으니 나도 연기로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의 몸은 수십조의 세포가 결합하여 생긴겁니다.

이 수십조 세포가 결합하여 정신 작용을 나타내니 이것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 하여 연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내가 연기로 존재한다는 존재 원리를 알게 되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면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 나와 남을 차별하고 진보다 보수다, 옳다 그르다 시비분별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 연기를 이해한 것을 “양변을 여읜 자성 자리”라 합니다.

양변을 여읜 자성 자리를 깨치면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연기를 이야기한 종교는 불교 밖에 없습니다.

이 불교의 양변을 여읜 자리는 부처도 부정하고 중생도 부정합니다.

양변을 여읜 자리에는 부처도 중생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입니다.

남녀간에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쓰지 않습니다만, “은애(恩愛)”라는 좋은 말이 있습니다.

서로 서로 위해주고 사랑한다는 말이죠.

서로 위해주고 고맙게 생각하며 사랑한다면 이혼할 일이 없겠지요.

우리 나라 이혼율이 세계 1위라는데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 지구상에 대립과 갈등, 전쟁이 지속되고 심화되는 것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구조 때문인데요, 더 심화될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내가 없다”는 연기(緣起)사상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연기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스님들은 평생을 보내고도 알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백일법문』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200페이지 정도, 그것도 많습니다.

100페이지 정도만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으면 어느 날 이해가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평생 읽지 않습니까? 『백일법문』100페이지까지는 5~10번까지만 읽으면 아무리 둔한 사람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연기”를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이 참선(參禪)입니다.

그중에서도 화두 참선이 가장 빨리 가는 길입니다.

혹 참선이 어려워 공부가 잘 안되는 분은 염불, 위빠사나, 절, 봉사 등 다른 공부를 하시되 자기를 비우는 공부는 다 불교 수행입니다.

양변을 여의어 가고, 착각을 비워가는 겁니다.

그래서 해를 가리는 구름이 조금씩 조금씩 엷어 가는 겁니다.

불교 수행은 뭘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자기를 비우면, 남을 위해 주고 도와주고 자상하게 됩니다.

“연기”를 이해하기 위해 『백일법문』을 다시 보세요.

이 존재 원리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해하게 되면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굉장히 회한을 느끼고 눈물이 나올겁니다.

회한의 눈물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나에 집착하여 남을 미워하고 살았나! 선과 교는 하나다.

남과 대립하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다.

불교의 선(禪)과 교(敎)는 다른 게 아닙니다.

같습니다.

교는 양변을 여읜 자리를 논리로 이해하자는 것이고, 선은 여읜 자리를 논리를 초월하여 체험하자는 겁니다.

결국 같은 겁니다.

이것에 벽을 두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원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교를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됩니다.

선과 교의 차별도, 부처와 중생의 차별도,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별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흔히 참선하는 사람들은 목에다 힘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것을 목에 깁스를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참선 원리를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양변을 떠나자는 사람이 거꾸로 양변으로 가는 겁니다.

잘못된 것이죠.

평등합니다.

차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 우주의 존재 원리가 연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연기를 알면 이 세상에 독립된 내가 따로 없고 나와 남이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남과 대립 갈등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돕고 협력하여 자기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어 무한 경쟁이 아니라 무한 향상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출처 : 달마넷

댓글 1개

  1. 고우 의 주장은 外道 이다 , 中道라는 선입관을 갖이고 , 어떻게 간화선 화두를 精進할수 있겠는가 ! ?
    성철 스님 과 禪 , 中道 ;
    ◆현 인류의 정신은 방황하고 있다.그리스도교의 우주만물 창조론, 全知全能 , 唯一神敎 는 , 다위인 의 進化論에 의해서, 모순 과 한계의 장벽에 부디쳐있다.
    인류의정신을 이끌어갈 종교는, 한국의 간화선 밖에 없다.
    看話禪은 인간의 마음을 창조개발하여 인류의 정신문화를 발전시키는 수행이다
    禪 과 敎理를 正立 하는것이 첫째의 과제이다.
    ◆◎ 禪 을하는데 꼭 알아야할 성철스님의中道 의 非合理 ,中道는 불교의 敎理 와는 관계가없고 六祖大師 또한 中道 에대한 用語 자체도언급하신바 없다.
    유마경 , 금강경 , 육조단경 원본 돈황본(돈황신본) , 대승경전 어디에도 중도라는 , 용어자체도 없다 , 중도라는 사량 의 망상 은 , 禪 의 장해물 일 뿐 , 禪 좌선 과는 아무런 관계 도없다

    ◆ 중도생활 中道 에 對 한 부처님의언급 ; 전법륜경(초전법륜경) , 부처님이 成佛하시기 前 시딸타王子로서,29歲에 當時 인도 바라문교 의 바라문으로 出家하셔서,바라문교 의 수행방법인 忍慾 과 苦行 으로서 , 6년간 斷食(극 小食)하셔서,피골이상접하여 一時졸도 하셨다. 苦行의 무모함을 깨닫고 ,시딸타는 고행을 포기하셨다 , 왕자시절 초호화생활이나 , 극단고행에 치우치지 말고, 보통생활 , 中道생활이 수행에 적합하다고 , 같이 고행수행하든 5비구에게 주장한것으로 中道 用語 를 처음 사용하신것이다 .
    5비구는 시딸타가, 갗이하든 고행을 포기하고 탈락한 배신자이고, 타락한수행자라고 비난하고 시딸타왕자를 떠나버렸다 .

    ◆ 중도 즉 중도생활 의 주장은 , 대각하시기 전 의 일이었다 .
    혼자남은 왕자 시딸타는 어느정도 건강을 회복한후에 ,보리수아래 에서 ,7일 밤낫 사색 선정에 드신후에 처음으로 , 弱肉 强食 生老病死 에 대한 大覺을이루시고 成佛하셧다.大覺하신 내용은, 佛 , 四聖諦 .八正道 이다.
    中道의生活 은 백장스님의 修道僧 청규 (一日不作 一日不食 이라는 백장청규)와도같은것이다.
    ◆ 禪 과 學文은다르다. 宗敎는 心身의 實體 實在이고 ,學文은 억만가지도 가능한 인간의 思 量 이다 . 부처님이 보이신 三處 傳心(佛 佛心)을 가르치기 위해서,그렇게많은 經을 설하셨다 . 그러나 經은 말이나 글 (書) 이지 佛 佛心은 아니다. 용수 삼장을포함해서 많은스님들 학자들의 著書들은 학문이지, 佛 佛心은아니다. 禪의 觀点에서 말하면 思 量 이다 . 법달이 삼천번 法華經을 독송 했어도,見怯成佛하기전에는, 思 量 이다.
    불교에대한 연구 저서 분석 들은 궁극적으로,思 量 이다.
    마치 부처님을가르키는 손가락이다 .가르키는 손가락이지, 부처는 아니다.가르키는 손가락을보고, 見 性 했다든가 부처로 착각하는 가짜도인( 道人 )이 너무많다.
    ◆◆ 最近代 성철스님은 學者僧으로서, 中道를 主張하여 한국불교에, 가짜道人을 量産하여,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은하지않고 것넘엇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 等 에서,六祖法寶壇經 에 中道라는 表現이 있다 하시지만, 六祖壇經 의 眞本(原本) 인 돈황본( 돈황신본 )에는 中道라는 表現 用語자체가 한마디도 없다. 六祖壇經에는 不立文字 言語道斷 , 禪을모르는 學者僧이 모르는 部分이 있다.
    ◆ 성철스님 또한 學者僧의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學者僧들은 思量으로서, 끗까지 전부를 해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순을 갖이고잇다. 육조단경은 六祖大師님이 入寂하신후 數百年후에 여러學者僧들에 의해서 原本(돈황본)뒤에 써서붙여서 개조된, 혜흔본,흥성사본,대승사본,설승본, 종보본, 덕이본 等等 많은기록이 있다. 성철스님은 이中에 넓이 알려진 덕이본 을 예로들어, 육조대사 의 中道를 主張하시지만. 덕이본 은 六祖大師님이 入寂하신후 5百77年후에 , 原本뒤에, 學者僧들이 써서붙여서 변조해서 출간된것이다.
    ◆ 또한 성철스님이 그의설법 백일법문에서,中道文字가 포함된, 덕이본一部를 기재했는데(大正藏48 , p.360) , 아무설명없이,중간부분 不立文字가 포함된, 한줄10字로 17줄 을 삭제하고 기록하였다.中間에 삭제함으로서 전후의 내용 의미가 , 달라질수도있다. 있을수없는일이다.
    ◆ 中道란 불교에 맞지않는 주장이다. 예를들어서, 有 또는 無 에서,한쪽을선택하면.편견 단견 이 되어서,見性의 答이 되지않는다고치자, 中道 中庸 의 發想 은 를 인정해야하는 有 의 경지 즉 사량하는 중생 의 경지 이디 .
    中道는 思量으로 生成된 妄想이다.
    ◆ 누구나 , 시심마 話頭를 제대로 들어보면, 本人이 見性했는지 못했는지 선명하게 알수있고, 보림에는 定한법이없는상태이고, 話頭는알고자하는 ? 인데 ,中道라는 先入見 思量을갖이고 어떻게 修行에 精進할수 있겠는가?
    육조단경 에서,見性은 반드시, 눈밝은 禪 師의 점검을 받지않으면,外道에 떠러진다는 , 六祖大師의 경책을 想 起해야한다. yoongack 輪覺 . 書
    附書, 참회하고 돌아가신 ,
    성철스님 의 반성하는 참회문懺悔文 ;
    生平欺狂男女群 彌失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恰萬端 一輪吐紅掛碧山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윤각 의 評 :
    성철 스님 의 懺悔文 은 , 글 그대로 懺悔文 이다 .神聖 視 해서도 안되고 ,
    評下 해서도 안된다 . 그의 法文集 이나 활동 을 보면 , 禪師라기보다 學者僧이다 .
    순수하게 참회하고 가신분 을 그대로 尊重해야 한다 . ( 以上)
    ◆□ 參考資料 :
    金剛經 , 華嚴經 , 六祖法寶檀經 敦煌本 , 德異本 , 韓國佛 敎所依經典硏究(李智冠著) , 六祖法寶檀經(大正新修大藏經) , 百日法門(성철스님법어집) , 佛敎의本(著者,大田由紀 江) , 釋迦 (著者,히로사찌야) , 佛敎란무엇인가(著者,大正大學 佛敎學科 編)
    慧能硏究 (駒澤大學禪宗史硏究會 編著) , 가장위대한神 은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아니고 , 세계인류 이다 (Duke W. Koo 의 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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