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관대작들의 퇴임

일전에 지인들이 몇이 모여 담소하는 자리가 있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생뚱맞게 ‘지금 우리나라의 국무총리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자리를 같이한 너댓 명의 입에서는 얼마간 답이 나오지 않았고, 차라리 총리의 이름을 모르는 게 낫다는 쪽으로 화제는 돌아갔다. 선진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제나라의 국가원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데 하면서 정치 문외한들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대통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성인이 아니라도 없겠지만 총리나 장관의 이름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여론이었다. 총리나 장관이 하도 자주 바뀌니 기억할 틈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자기의 일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게 지금의 정치현실인 것 같다.

그런데 참 꼴볼견인 일들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다. 같은 정권 하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이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머물렀던 정권의 핵심부를 향해 다양한 형태로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초심을 버렸다느니, 정책에 잘못이 있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누가 잘하고 누가 잘 못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어쩌면 의리도 체면도 양식도 없는 사람들 같아 보인다.

그래서 감히 민족의 고전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공직자들의 영원한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의 마지막 장인 ‘제12장 해관육조(解官六條)’를 다시 펼쳐 보았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의 자세를 보기 위해서다. ‘벼슬이란 반드시 체임(遞任; 벼슬이 바뀜)되는 것이다. 체임되어도 놀라지 않으며, 벼슬을 잃고도 못내 아쉬워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존경할 것이다(官必有遞 遞而不驚 失而不戀 民斯敬之矣)’라고 하였다. 자리가 바뀌어 좋은 보직(어떤 게 진짜 좋은 자리인지 모르지만)을 받거나 한직을 받았다고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라는 것과, 설령 벼슬에서 물러난다고 하여도 아쉬워 말고 최후의 순간을 더욱 깨끗하게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을 종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벼슬을 버리기를 헌 신을 버리는 것처럼 하는 것이 예전의 도리였다. 해임되어서 슬퍼한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평소부터 문서를 정리하였다가 해임 발령이 있으면 그 이튿날 미련 없이 떠나갈 수 있다면 맑은 선비의 태도인 것이며, 장부를 청렴하고 명백하게 마감하여 뒷걱정이 없게 한다면 지혜 있는 선비의 행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즈음 우리 사회에선 임명직은 그 자리를 지키거나 보다 나은 자리로 옮겨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할 일이며, 선출직은 업무는 뒷전이고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단 몇 사람이 모인 곳이라도 쫓아다니는 게 일인 것 같다.

어떤 조직과 사회, 승속을 막론하고 사심 없이 맡은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정경 또한 목민심서의 이 구절 같았으면 좋겠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교외까지 전송을 나와 술을 권하고 보내기를 어린애가 어머니를 잃은 것 같은 심정이 말에 드러난다면 수령된 자 또한 인간세상에서 더할 수 없는 영광일 것이다.’

급박하게 변해가는 사회와 인심이지만 인간의 삶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공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의 처신은 예와 지금이 다를 바 아닐 것인데 작금의 현실은 물러난 뒤를 걱정하고 연연해하는 것 같아 딱해 보인다. 그간에 얽히고 설킨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든지 아니면 차라리 가만히 두면 오히려 나을텐데 자꾸만 업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지. 글쎄 중생인 나의 삶도 업을 짓고 있는 건지 업장을 조금이라도 소멸시키며 살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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