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문 여는 열쇠는 연기
고우스님 법문
선(禪)을 놓고 저는 말을 하려하고 여러분들은 들으려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선을 말한다면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말’(馬)을 보고 ‘사슴’(鹿)이라고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순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에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고, 우리는 모두 본래 완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리는 말로는 해석할 수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부처라 해도, 중생이라 해도, 번뇌라 해도, 지혜라 해도, 구속되어 있다 해도, 해탈해 있다 해도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묵묵히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언어를 빌려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라 하는데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깨달은 분과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그 가르침의 효능을 제대로 발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차이를 알면 불교의 궁극적인 핵심과 좀 점에 제가 말씀드렸던 ‘본래 완성’ ‘본래 성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것 중 하나가 우리는 형상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상에만 머물고 있는 우리는 좋다 나쁘다, 이것은 우수하다 열등하다, 귀하다 천하다며 분별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분별은 귀와 눈, 입 등을 통해서 시작되고 그로인해 자신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학대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학대를 하니 더 큰 문제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앞집은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옆집 애는 서울대 다니는데 너는 왜 이 모양이냐? 이것은 자기와 주변 사람까지 학대하는 겁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그런 식으로 우열을 따지고 취사선택하면서 국가는 국가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주변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지구상에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보면 밖에서 학대하는 동기유발을 일으키더라도 절대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이 나를 화나게 만들더라도 내가 화내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니, 남이 나를 화나게 하는 그 허물을 보지 말고 ‘화를 내는 자기 허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법회를 시작하면서 반야심경을 하셨는데 ‘오온개공’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공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해 보라고 하니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을 보면 허망하기만 한데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 갑니까?” ‘허망’이나 ‘공허’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과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 ‘공’을 이해하려면 ‘연기’를 알아야만 합니다.
여기 이 보제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재료가 섞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재료 중에서 무엇을 갖고 ‘보제루’라 하겠습니까? 나무를 보고 ‘보제루’라 할 수 있습니까? 이 기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기왓장을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조화롭게 모여 있으니 ‘보제루’라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보제루’도 실제로 없는 것이고 이름일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 보제루가 허물어지면 단지 보제루를 구성했던 재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보제루’도 실체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손가락 A와 B가 의지를 해서 만든 삼각형을 C라고 이름해 봅니다.
이 C는 A와 B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A와 B가 없어지면 C(삼각형)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A와 B가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C는 그냥 이름 뿐 입니다.
그래서 이 C를 우리는 공이라고 합니다.
실체가 없다라 하기도 하고 무아라고 합니다.
이 몸뚱이도 60조의 세포가 모여 있는 덩어리라 하는데 이 60조 덩어리 중 어느 세포를 갖고 ‘나’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실체가 없으니 너무 허망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나’가 없다 하지만 ‘나’가 있지요? 여러분 지금 이렇게 앉아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 하는 겁니다.
태어나는 것도, 성장하는 것도, 병들어 죽는 것도 공입니다.
손가락 A와 B가 없어져서, 나무기둥과 기와가 없어져서 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이해만 해도 자신을 괴롭히는 학대는 하지 않습니다.
이 도리를 체득하면 분별을 하지 않는 삶을 사니 대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수행을 해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이 드실지 모르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금 설명을 드린 그 사실에 대해 우리가 체득하지 못해서 그렇지 체득해 보면 본래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은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부처님과 같이 살고 행하면 운문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무정이 다 그렇게 본래 이토록 위대하게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습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그러는 것이니 얼마나 억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능엄경』에 손가락과 달 얘기가 나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셨듯이 “달을 보아야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리가 달이고 손가락은 진리를 보라고 가르치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수행방편에다가 생활을 맞추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손가락에 달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역순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이렇게 해서 사실 달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 선불교는 아예 달을 말합니다.
손가락을 통한 일상생활이 아니라 달을 통한 일상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만 공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기와 공을 보고 일상생활에서도 ‘공 도리’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오늘 제 얘기를 듣고 내 존재원리가 그렇게 위대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면 오늘부터 화내는 것을 부끄럽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을 하자는 겁니다.
이른바 ‘달 불교’ 한다는 한국불교가 ‘손가락 불교’를 하는 다른 나라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출가해 보니 이런 말이 있더군요.
“도인은 멀리서 봐야 도인이지 가까이서 보면 도인이 아니다.” 이것은 정말 아닙니다.
도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도인입니다.
여러분들도 도인입니다.
깨달음은 정진하는 도중 인연이 닿으면 찾아옵니다.
수행을 하며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삶에 무게를 두십시오.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 올라서되 환상을 갖지는 마십시오.
연기와 공을 이해하고 이것을 생활하며 체험해 가는 것이 공부요, 수행입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좋은 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