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점치는 스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인생이란 긴 여정을 살다보면 다양한 형태의 고민을 하고 크든 작든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다. 아무리 학식이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한 가지 고민쯤은 안고 살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고민이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애써 고민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만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불가사의한 힘에 의존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누군가의 힘에 기대어 미리 해결책을 구하고 싶어한다. 무속인을 찾게 되는 것도 실은 작게나마 위안을 삼고 싶은 마음에서이고 또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 알아 대처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이처럼 가장 위대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스님이라 해서 세상사 어려운 문제들과 고민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은 스님이라면 남의 운명을 미리 짚어낼 수 있고 또 불가항력의 힘을 지닌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햐 한다고 믿고 있기도 하다.
“저분은 퍽 영험한 스님이래!”
“그래? 그렇다면 큰스님이시겠네?”
이렇게 말하는 신도들이 더러 있다.
‘영험한 스님’을 ‘큰스님’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스님을 일종의 ‘점쟁이’로 취급하는 일면이 있는 위험천만한 종교관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간혹 스님을 따라다니며 공부하는 신도들 중에는 불법에 어긋나게 무속인이나 진배 없이 점도 봐주고 육갑을 잘 짚어 돈을 버는 이들이 더러 있다. 또 절에서 신도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인간의 미래를 화두로 삼기도 하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스님들 중에도 간혹 이같이 점술을 해서 대중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 주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불교는 미래를 점치거나 앞날을 미리 예견하는 종교가 결코 아니며 스님 또한 점술가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불교란 부처님의 대자대비의 사랑을 깨달아 이 땅을 정토로 가꾸고자 하는 믿음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법이므로 이 마음만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이며 신앙인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정월 초순 무렵이었다.
“스님, 제가 특별히 요금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요금을 안 받으시면 제가 곤란하지요. 그런데 청이란 게 뭡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택시일을 하고 있지만요, 이 일이 해보니 참말 힘이 듭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이 들지만 그보다는 자식들 대학까지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앞날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밤잠을 설칠 때가 더러 있구요. 그래서 언젠가는 이 일을 그만두고 무슨 장사라도 할까 생각중인데….”
이렇게 한참 신세 타령을 하던 기사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스님! 저 올해 신수점 좀 봐주시겠습니까?”
아하, 내게 청이란 게 바로 올해 신수점을 봐달라는 것였구나. 나는 예상치 않은 청을 받고 적지않이 당황했다.
점괘를 짚는다는 것은 역학을 말하는데, 나는 역학 공부를 전혀 해본 적이 없을 뿐더러 육갑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불교와 역학과는 엄연히 경계가 다른 분야건만 자칫 오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많다. 스님이라면 당연히 육갑을 짚을 줄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기사분은 내 앞에서 자신의 신상을 세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올해로 40세이니 00년 생이지요. 0월 0일 0시에 태어났습니다…. 제 사주가 어떻습니까? 잘 봐주십시오.”
“….”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른다고 잘라서 말하면 되겠지만, 그러자니 이 기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 같고….
“믿는 바대로 열심히 하시면 다 잘 되실 겁니다, 기사님.”
“그런 게 아니라요, 스님.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지요. 부탁입니다!”
이쯤 되면 나로서도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사주를 볼 줄 모릅니다.”
“아니, 스님은 유명한 분이지 않습니까. 며칠 전 제가 TV에서도 뵈었고 신문에서도 뵌 적이 있는데…, 유명한 스님이 정말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
그 기사분은 백미러를 통해 몹시 의심스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제가 매스컴에 나왔다면 분명 사형수 구명운동이나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일로 해서 나왔겠지요. 불행히도 난 사주를 볼 줄 모르고 또 전혀 알지도 못합니다. 이거 기사님께 죄송해서 어쩌지요….”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사님도 자신의 기대가 무너졌는지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결정하는 법입니다. 어떤 어렵고 괴로운 현실도 마음을 어떻게 갖고 잘 쓰느냐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쓴 독도 기쁘게 먹는다면 그것이 약으로 쓰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운명도 마찬가지여서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게지요.”
그 기사분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택시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런 말없이 핸들을 잡고 운전하던 기사분이 나를 내려 주면서 백미러로 다시 한 번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인사 대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혹시…, TV에 나오신 그 스님이 정말 맞습니까?”
이런 경우는 비단 택시 안에서만 겪는 일이 아니다. 언젠가 길을 가다가 한무리의 여대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약속한 사람과 만나기 위해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대생들 중 몇 명이 뭐라고 저희들끼리 수군대더니 달려와 인사를 했다.
“삼중 스님이 맞으시지요?”
그러더니 나를 따라서 우르르 다방에 들어왔다.
조금 일찍 온 탓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좀전에 따라들어온 여러 명의 여대생들이 내게 다가와서 잠시 앞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맞은편 의자에 앉은 여학생 한 명이 거침없이 물었다.
“스님,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요…. 제게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하고 결혼을 하게 될지 좀 봐주세요.”
내가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또 다른 학생이,
“삼중 스님, 실은 제 부모님이 암으로 누워계신데 언제까지 사시게 될까요. 오래 사실까요?”
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내게 희망을 갖고 물어오는 이들에게 ‘나는 모른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저들이 얼마나 실망을 할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가진 그 문제들은 앞으로 잘 풀리게 될 것입니다. 단지 마음을 어떻게 굳게 먹고 살아가느냐 하는 점이 그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지요. 마음쓰기에 따라 좋은 것도 나쁘게 변할 수 있고, 나쁜 것도 좋은 쪽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만 가슴에 새기신다면 모두 잘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번에 멍청해진 것은 그 여대생들 쪽이었다. 마침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다방 안으로 들어오길래 다행히 이쯤에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0년 전쯤 되었나 보다. 당시 사형수였던 양동수의 구명운동이 이루어져서 신문 지상이 떠들썩했던 무렵이었다. 00일간 신문에서도 이 사건을 톱기사로 대대적으로 실어주었다.
나 역시 끝까지 해낼 수 있어서 기쁨이 컸지만 그보다는 내게 용기를 주고 도와주신 여러분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즈음 어느 여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스님, 저는 지금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생각다 못해 이렇게 스님께 편지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가집으로 시집을 와서 10년이 넘도록 딸만 다섯을 두었으나, 이 집에서는 꼭 대를 이을 아들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못 낳는 저를 이제는 내쫓으려고 하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겠는지요? 아무리 불공을 드리고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오직 스님만이 불쌍한 저를 구해 주실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죽음을 앞둔 사형수를 살려내신 분이 아니십니까. 부디 제게도 아들 하나만 점지하게 해주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는데, 내게 보내오는 사연들 대부분은 자신의 고민이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들이다.
자잘한 가정사나 부부관계, 시부모와의 갈등 문제, 혹은 자녀의 진학이나 사업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해결해 달라는 내용이 많다. 또 그들 중에는 자신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사업자금 3천만 원만 빌려 달라고 부탁해 오는 이도 있었다.
이런 갖가지 사연들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인생이란 이러한 연속된 문제들과의 영원한 싸움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통과 고민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아들 하나를 간절히 원하는 이 가엾은 여인에게 나는 답장을 띄울 수 없었다. 가슴 아픈 사연이긴 하지만 나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내가 도통한 달인이나 위력 있는 도사도 아니요, 나 역시 범부의 고민과 고통을 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니 마음 한편으론 씁쓸함이 고여왔다.
불교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그 역사를 같이 해왔다. 그래서 사상 체계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든 으레 사찰이 있게 마련이며 불국사와 석굴암, 팔만대장경이라는 자랑스런 문화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이 모두 수천 년간 불교와 함께 한 우리 민족의 흔적들이요, 위대한 정신의 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불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다른 종교보다 훨씬 많은 신도수를 자랑하고 있기는 하나 그 활동면에서는 타종교보다 미약하기 그지없다. 불교가 적극적인 실천의 종교임에도 신도들은 사회 활동에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보인다. 또 신도들 중에는 기복신앙이나 자기위안의 방편으로 치우치고 있는 이들도 많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여러 점에서 미미한 활동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스님이 점괘를 보는 점술가라는 그릇된 인식과 오해를 받기도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불교는 하나의 진리요, 사상의 체계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렵고, 깊이 들어갈수록 심오한 진리의 세계가 불교이다. 마음의 수양으로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의 마음을 구하는 믿음의 종교인 것이다.
내가 머무는 자비사 신도들 중에도 이렇게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곧 이사를 가야 하는데 어느 방향이 좋겠는지요?’ 혹은 ‘자식이 결혼을 하는데 어느 날자가 좋을까요?’
나로선 알 도리가 없는 일이다. 이쯤 되면 미리 역학을 배워두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한다. 저들 질문에 속시원한 답변을 못해 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남을 기쁘게 해주지 못하니 이 또한 내 아픔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부터라도 육갑을 배우고 역학을 배워볼까. 사주 관상을 배워볼까니?
그러고 보니 참말로 무더운 여름 한가운데에 와 있다. 날씨 탓인가.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는다.

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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