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은 잃어버릴 게 없어야

사람이면 누구든 단점이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나 역시 고치기 어려운 단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건망증이다.

비가 오는 날, 택시 안에 우산을 두고 내리는 일쯤 은 예사이고 심하면 상상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걸망마저 택시에 두고 내리는 경우도 있다. 일상 가운데 나타나는 이러한 예기치 못한 상황이 가끔 나를 당황하게 한다.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서 어떻게든 가까스로 찾기는 하지만,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면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에 빠진다. 내 건망증 때문에 공연히 남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니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나 자신에게 속은 듯한 기분마저 들면서, ‘내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정말 큰일이구나!’하는 어찌할 도리 없는 자탄이 뒤따른다.

이 치료약도 없는 건망증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 심해지기만 하니 언제 어디서 또 느닷없이 난처한 일을 겪게 될지 사실 내심으론 은근히 걱정이다.

그래서 장마 때가 되면 으레 우산을 여러 개 준비해 놓아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무슨 일로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깜빡 잊고 다른 곳에 놓고 온 모양이었다.

바삐 나가야 하는데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우산을 사러 나가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키자니 미안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나 자신이 싫었다. 분명 어디인가에 놓고 온 모양인데…. 그것도 새로 산 우산이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렸으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헌 우산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나 자신이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름 이러는 내 마음은 분명 중으로서의 마음이 아니다. 내가 두고 온 그 우산을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우산을 잃어버린 것을 오히려 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야 옳지 않은가!’

무릇 출가한 중이란 일체의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하는 신분이다.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잃어버릴 것 또한 없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고작 우산 하나 때문에 투덜대고 있는 꼴이 아닌가. 내가 지금 마음이 편지 않은 것은 분명 내 욕심에 비롯되는 것이니,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가책을 하면 나는 혜월 스님을 떠올리게 된다.

그분은 평생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집착 없는 무구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다 가셨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고승이 여러분 계시지만 내가 유달리 그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깨달음을 몸소 실천하고 사신 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분에 관한 몇 가지 일화이다.

혜월 스님이 어느 절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다. 그 절에는 좋은 옥답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절의 주지를 불러서 말했다.
“실은 내가 곰곰 히 생각해 보았는데…. 저 옥답말이야. 저걸 파는 게 어떤가?”

혜월 스님의 제안은 절은 옥답을 농민들에게 팔아 넘기고 대신 버려진 땅을 개간해서 그것을 절의 논으로 가꾸자는 것이었다. 절의 옥답은 쌀이 세 가마나 나오는 좋은 땅이었다.

주지가 듣고 보니 그것도 썩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시 며칠 곰곰이 생각한 끝에 스님의 말씀대로 절의 옥답을 팔기로 했다. 그리고 버려진 땅을 열심히 개간해서 논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다음해, 새로 개간한 논에서는 먼젓번 옥답과는 달리 벼가 시원찮게 자랐다. 반면 농민들에게 판 논에서는 벼 이삭이 더욱 무성하게 자라났다.

새로 개간한 논에서 벼 한가마의 소출밖에 나지 않자 주지는 옥답 판 것이 후회스러웠고 내심 혜월 스님이 꽤나 원망스러웠다.

“괜히 말씀대로 했다가 손해만 봤습니다.”

“손해라니?”

“지난해엔 소출이 세 가마였는데, 올해는 한 가마밖에 나오질 않았잖습니까?”

혜월 스님은 주지의 원망 섞인 푸념을 듣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하게 바라봤다.

“어째서 두 가마 손해인가? 한 가마 이득이지!”

“큰스님, 어째서 한 가마가 이득이라는 겁니까. 이는 분명 두 가마 손해가 아닙니까?”

주지는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혜월 스님에게 짜증을 냈다. 그러자 혜월 스님은 주지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진정 중이라면 셈을 올바로 해야 하느니라. 네가 농민들에게 판 옥답에서는 분명 세 가마의 소출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개간한 논에서 다시 한 가마의 소출이 나왔지 않느냐. 그러니 이는 분명 한 가마가 이득이 아니더냐?”

“그 세 가마는 농민들 것이지 저희 절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다시 측은한 눈빛이 되어 주지를 꾸짖듯 타일렀다.

“네 입으로 들어오는 밥 숟가락만 세고 일체 중생의 입으로 들어가는 숙자는 왜 세지 못하느냐! 이러고도 중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분명 법복을 입은 중일진대 일체 중생의 아픔을 헤아린다고 말로만 할 뿐이지 마음은 진정 그렇질 않으니 이 어찌 진정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수행자라 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에 얼굴이 붉어진 주지승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산중의 절 살림이란 게 늘 풍족하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쪼달리는 형편이었다. 중생등도 넉넉하게 먹고살기 힘든 처지였다. 주지승은 다소나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근처 야산을 일구어 콩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초여름 콩을 수확할 무렵, 주지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바로 먹을 것을 찾아 절로 내려온 멧돼지들 때문이었다. 애써 농사 지은 콩을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들이 다 따먹어 망쳐 놓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수고한 보람도 없이 저 멧돼지들 양식으로 다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주지는 고심 끝에 혜월 스님을 불렀다.

“큰스님,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참선에만 몰두하시지 말고 나오셔서 잠시 저 콩밭이나 좀 지켜 주십시오.”

“나더러 콩밭을 지키라고? 그거 좋지.”

스님은 흔쾌히 대답했다.

‘큰스님에게 콩밭 지키는 일을 맡겨 놓았으니 이제 멧돼지들도 더 이상 내려오지는 않을 테지.’

주지는 안심이 되었고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하루는 밭에 나가보니 예전과 다름없이 콩밭이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스님이 망을 보는데도 피해가 여전한 것이 이상했다.
‘스님은 대체 뭘 하시길래….’

주지는 스님을 속으로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몰래 숨어서 엿보기로 했다.

그런데 기절할 일이었다! 주지가 몸을 숨기고 바라보니 스님은 밭을 지키기는 커녕 손수 콩까지 따서 어린 멧돼지들에게 먹이고 있지 않은가. 다른 멧대지들도 유유히 밭을 오가며 콩을 따먹기에 정신이 없었다. 마치 저들 먹으라고 지은 농사인 양 멧돼지들이 부지런히 콩을 따먹고 있는 모습을 보자 주지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스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주지는 스님에게 고함을 쳤다.

“왜 산중에서 이리도 시끄럽게 고함을 치느냐. 멧돼지들이 모두 놀라서 가겠구나. 좀 조용히 하거라.”

스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를 보자 주지는 더욱 화가 났다.

“큰스님! 제가 멧돼지들에게나 먹이려고 이리 힘들게 농사를 지은 줄 아십니까?”

주지가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히면서 따져 묻자 스님은 측은한 시선으로 주지를 바라보았다.

“먹을 것이 없어 내려온 저 짐승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그래, 내가 콩 보시 좀 했기로서니 그리 화를 내면 쓰겠느냐?”

“그래도 이건 너무하십니다!”

“비록 중복을 입었다 하나 네 마음 속은 필시 중이 아닌 게 분명하구나. 우리들에겐 신도들로부터 들어온 옷가지와 음식이 있어 끼니 걱정이 없지만 저 불쌍한 미물들은 돌보는 이가 없질 않느냐. 중이란 무릇 자비로워야 한다. 저 불쌍한 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어 중의 것을 조금 나눠 주었기로 그걸 막아서야 쓰겠느냐.”

이번에도 역시 주지승은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해 정월. 스님이 어떤 절의 암자에 계시던 때였다. 하루는 절의 주지승이 스님을 불러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스님, 제가 그 동안 불사에 쓰느라 사채업자에게 빚을 좀 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돈이 조금 모아져 그 빚을 갚으려 하는데, 정월 초하룻날이라 바쁜 탓에 제가 절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죄송스런 부탁이지만, 스님이 저 대신 빚을 갚으러 잠시 다녀오셨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굳이 혜월 스님에게 심부름을 부탁한 것은 전적으로 혜월 스님의 인품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적지 않은 돈을 아무에게나 맡겼다가 혹시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주지는 염려스러웠다.

혜월 스님은 주지승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정월, 스님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돈 다발을 위해 부산한 장터를 막 빠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장터 한쪽에서 나무를 팔지 못해 힘없이 늘어선 나무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무를 팔아야 그 돈으로 양식을 사 갖고 갈 텐데, 파장이 되도록 나무를 팔지 못한 채 추위에 떨며 서 있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자 스님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무꾼들이 떠는 모습이 딱해 보였기 때문이다.

혜월 스님은 그 자리에서 바랑을 풀어 그들에게 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나무꾼들은 스님의 자비에 너무나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스님, 나무를 대신 절까지 날라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오, 절에는 나무가 많으니 집에 가져가서 땔감으로 쓰시오”

스님은 거절하며 빈 바랑을 지고 혼자 절로 돌아왔다.

“빚 다 갚고 왔네. 주지.”

“큰스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채권자가 절로 찾아왔다. 돈에 관해서는 조금도 빈틈이 없는 여자였다. 약속 날짜가 하루 지나가 곧바로 찾아온 것이었다.

“주지 스님. 분명히 어제까지 돈을 주신다고 철썩 같이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약속을 어기시는 겁니까?”

“약속을 어기다니요? 난 분명히 어제 빚을 갚았소.”

“무슨 소리입니까? 내게 빚을 갚았다니요? 언제 내게 돈을 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사람이 생떼를 쓰는구먼! 난 분명히 어제 빚을 다 갚았단 말이오.”

채권자인 여자와 주지승 사이에 시비가 계속됐다. 바같이 소란스럽자 혜월 스님이 방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셨다.

“절 안이 왜 이리 시끄러운고?”

여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 수난을 당하던 참이었다. 주지승은 스님이 나오시자 마침 잘 됐다 싶었다.

“큰스님, 글쎄 이 여자가 돈을 안 받았다고 이렇게 억지를 쓰는군요! 스님께서 어제 분명히 빚을 다 갚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빚이야 다 갚고 왔지. 그런데 저 여자에게 빚을 갚았다고는 아니했네.”

“아니,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여러 사람에게 빚을 갚고 왔네. 그리고 내가 갚은 빚은 다시 찾을 수 없는 빚이라네.”

혜월 스님의 엉뚱한 말에 주지도, 여자도 어이가 없어 멍청히 바라만 볼뿐이었다.

“난 어제 추위에 떨고 있는 나무꾼들을 길에서 만났네. 그들이 나무를 팔지 못하면 굶는 게야. 이렇듯 고생하는 중생들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구나. 이는 우리 중들이 제대로 제도를 잘못한 탓이지.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진 빚을 갚고 왔을 뿐이라네.”

스님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무섭게 화를 내며 주지에게 대들던 채권자 여자가 넋을 잃고 스님을 바라보았다. 마음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보양이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갑자기 스님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스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스님께서 그 돈을 좋은 일에 쓰셨으니 저는 이미 돈을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 동덕은 부디 제게로 회향해 주십시오. 간절히 원합니다.”

혜월 스님은 평생 주지를 하지 않고 떠돌이 불자로 살다 가셨다. 그리고 여러 사찰을 떠돌아다니시며 파란만장한 일생만큼이나 숱한 일화를 남기셨다.

스님의 자비행은 세속적인 생각이나 계산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다가가보면 그분의 이해하기 어려운 자비행과 보살심이야말로 철저한 자유와 무소유에 바탕을 둔 깨달음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열반에 드실 때에서 선 채로 들판의 소나무 가지를 붙잡고 계셨다 하니 과연 그분다운 마지막 최후가 아닐 수 없다.

포교승으로 지내며 힘들고 어려운 삶의 고비가 닥칠 때마다 나는 혜월 스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분을 생각하노라면 어느새 막혔던 길이 열리고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된다.

직접 뵈온 적은 없지만 내 마음에는 늘 든든한 지주가 되어 주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혜월 스님!

그분은 영원한 나의 스승이시다.
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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