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집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맨처음 사람을 만날 때 쳐다보는 곳은 대개 눈이다. 눈이란 사람의 외모 중에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눈을 쳐다보면서 말을 하게 되는데, 사람의 첫이상은 외모보다는 이 말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말은 마음의 집’이다. 사람을 드러내는 솔직하고 정확한 잣대가 바로 ‘말’이 아닌가 싶다. 내 경험으로 볼 때도 대개의 경우 말로써 그 사람의 됨됨이가 저절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미인을 뽑는 대회 심사에서도 외모 못지않게 중시하는 것이 말씨인 모양이다. 제아무리 외모가 뛰어난 양귀비라 할지라도 이 말씨가 예쁘지 못하면 낙제하기 십상이다. 또 기업의 신입사원 면접 때도 다른 어떤 조건보다 말을 중시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본다.

외모야 발달된 현대의학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지만 말은 고치기 힘들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순하고 편하면 말도 부드럽게 나온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거나 거칠어지면 딱딱한 말, 거친 말이 나온다. 말도 때로는 체에 쳐서 걸러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고운 말, 예쁜 말, 듣기 좋은 말보다는 거칠고 험한 말이 빈번하게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거칠어져 간다는 것은 그만큼 심성도 거칠고 사나워져 간다는 의미인가.

한번은 내가 타고 가던 택시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일어났다.

택시가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켰는데 마침 옆차선에서 달리던 차가 미처 보지 못해 일어난 사고였다. 내려서 보니 택시 앞 범퍼가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이봐요, 이거 어떻게 할거요?”

기사분의 표정이 담박에 험악해졌다. 나도 엉거주춤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어째서 깜박이로 신호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쪽 자가용 운전자가 주춤주춤 내리더니 자신의 차를 한번 훑어보더니 만만치 않게 큰소리를 쳤다. 다행히 그쪽 차는 다친 흔적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내가 저쪽에서 분명히 신호를 보냈는데, 당신이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오?”

“난 못 봤단 말이요!”

“이 양반 이거 안 되겠네! 당신 눈은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요? 그 눈은 가죽이 모자라 찢어 놓은 거요?”

“뭐라고? 당신이 잘못을 해놓고선 왜 도리어 큰소리야!”

이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미처 끼어들 새 없이 두 사람 사이에 욕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 xx가!”

“뭐 나다러 x라고? 야, 말 다했어?”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삿대질이 오고가는 이 광경. 택시 손님인 나로선 난처한 일이었다.

“이보시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차분히 마음들 가라앉히고 얘기 하십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쁜 대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이 일은 자가용 운전자 잘못이라는 결론이 났고, 택시 수리비용 2십만 원을 주고 합의하는 선에서 그치게 됐다. 그러기까지 한 시간이 지체됐다.

처음부터 어느 한쪽이 좋은 말로 설득하고 사과했더라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오가지는 않았을 텐데 서로 시간 빼앗기고 목청 높이느라 힘만 들인 셈이다.

다시 차에 오르자 기사분은, “손님, 이거 너무 죄송하게 됐습니다. 공연히 저 때문에 귀한 시간 빼앗기시고….”라고 말하면서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차가 망가졌으니 수리하셔야겠습니다.”

“다시 고치는 거야 힘들진 않지만 차 고치는 동안 영업을 못하게 됐으니 나참!”

“처음부터 서로가 좋은 말로 타협을 했으면 이렇게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운전하다 보면 성격이 많이 거칠어집니다. 도로는 지하철이나 하수도 공사로 해서 일 년 내내 파혀쳐져 있지요. 또 차들이 많으니 막히죠…. 게다가 이렇게 접촉사고라도 나면 짜증이 나서 먼저 욕부터 나오게 됩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 특히 더하지요. 싸움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목청만 높이게 되는 게지요.”

“그러고 나면 기분이 언짢으시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욕설이 오가다보면 서로 상처를 받게 되지요. 택시 기사치고 위장 장애가 없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스트레스가 여간해야지요. 이건 결코 과장이 나닙니다. 저 또한 늘 약으로 사는 걸요.”

“제게 병을 고칠 신묘한 약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내 말에 기사분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기사님, 약이란 게 다른 게 아니라…. 마음을 편히 갖고 느긋하게 생각하시면 저절로 병은 낫게 됩니다.”

“스님도 참!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우리 꼬마 애들도 다 아는 얘기가 아닙니까. 알면서도 이 마음이란 게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거지요.”

“왜 마음이 제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지 아십니까? 말이 거칠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겁니다. 우선 말을 좋게 쓰려고 노력하십시오.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답니다.”

“글쎄? 듣고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사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나쁜 말, 거친 말을 자주 하게 되면 성격도 그처럼 거칠게 변하지요. 또 아무리 악한 사람도 부드러운 말, 너그러운 말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면 차츰 마음이 넉넉하게 바뀌게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말이란 습관들이기 나름이지요. 되도록 좋은 말을 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아느새 마음도 넉넉해지고 스트레스니 병이니 하는 따윈 생기지 않게 되겠지요.”

“저도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되도록 말을 조심해서 하려 해도 자꾸 이런 일이 생기다보니 우선 성질이 나서….”

그 기사분은 나를 보더니 겸연쩍은 듯 빙긋 웃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보면 자연히 기사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 중 재부분은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들이다.

“우리나라는 행정적으로 달라져야 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만약 서울 시장이 된다면 맨 처음 할 일이 바로 이 교통지옥에서 시민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서울 시장이 몰라서 저러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만요, 다른 외국처럼 차고지증명제나 주말차량제를 실시해서라도 교통체증을 개선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요!”

이처럼 목청을 높이는 기사분도 있다.

“하루 벌어 먹고사는 직업인데, 길이 이렇게 막히다보면 집에 가면 돈 못벌어 왔다고 야단하는 마누라 얼굴 보기가 무섭습니다.”
또는,

“스님, 제가 한 시간에 얼마를 버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낮에도 자주 교통체증이 되니 어젠 계산해 보니 한 시간 죽도록 다녔는데도 겨우 8천 원밖에 안 되더라구요. 나참!”

라며 하소연하는 기사분들이 많다. 어떤 기사분은 나름대로 고민한 탓인지 보다 적극적인 개선안을 내놓기도 한다.

“정부에서도 도로에 대한 투자를 해야 됩니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혼잡통행료란 무척 좋은 개선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확산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행정적인 개선을 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럿이 함께 타는 ‘카풀제’도 좋은 제도가 아닙니까, 기사님?”

“맞습니다. 좀더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시간과 돈이 들더라도 정부에서 발벗고 나서야 합니다! 자동차 1천만 대 시대라 야단하면서 떠들어대는 건 말뿐이지…, 정말 시급한 건 우리도 이젠 올바른 자동차 문화를 정립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택시가 왜 합승을 하는지 아십니까? 정부에서도 단속만 하기보다는 왜 합승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부터 먼저 생각해야지요.”

이렇듯 점점 어려워지는 교통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택시기사분들이다. 게다가 손님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대부분 운전하다 보면 험하고 거친 상소리가 빈번해지는데, 이는 열악한 우리의 교통사정에도 일단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부산대 김경호 박사를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차를 어디에 두셨습니까?”하고 무심코 물었더니, “전 전철을 이용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의아해서 다시 물었다.

“저야 자가용이 없어서 늘 택시를 이용하고 있지만, 박사님께서는 차가 있는데 왜 안 타고 다니십니까?”

“운전하면 심성이 자꾸만 거칠어져서요….”라고 웃으시면서 대답하셨다.

사실 그렇다. 말이 거칠면 심성 또한 자연히 거칠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활이 조금 불편하긴 해도 심성이 나빠질까봐 운전을 안 하신다는 김 박사가 새삼 존경스러워 보였다.

우리 주위에도 이분처럼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을 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나쁜 말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나쁜 말이란 무엇인가, 거칠거나 험한 말만이 나쁜 말은 아니다.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 교묘하게 이간질 시키는 말, 거짓으로하는 말…. 이 모두 거칠고 험한 말만큼이나 더욱 나쁜 말이다.

내가 늘 걱정하는 큰 결점 중의 하나가 말이다. 말을 조심하지 않아 실수를 하는 때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많다보니 간혹 실수를 한다. 또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하기도 한다. 우선 마음이 먼저 달려가기 때문이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 내가 나서서 해결해 주어야 할 일들이 많기에 말이 먼저 앞서게 된다.

‘삼중아, 너 이러다간 큰일이로구나!’

하루에도 세 번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계율 2백5십 가지를 다 지키지 못할 뿐더러 또한 입으로 짓게 되는 죄가 실로 크니 이를 어찌할고!

일찍이 야운 스님은, ‘입은 재앙의 문이다.’라고 하셨다.

‘오로지 입을 지켜라. 무서운 불길같이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 중생의 불행은 그 입에서 생기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이다.’

한결같이 입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법구경’의 말씀이다.

나는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부처님께 엎드려 빈다. 구업을 씻어내고 또 씻어내려 한다.

말이란 이 얼마나 무서운 죄업인가.

조선시대 중엽, 어느 정승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자신의 아내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내게 큰 비밀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 이를 들어줄 수 있으시오?”

그러자 정승의 아내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비밀이요? 우리가 40 년간이나 늙도록 해로해 왔거늘, 당신이 나를 못 믿는다는 게 말이 된답니까? 무슨 얘기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라고 궁금해서 정승을 다그쳤다.

“만약 이 얘기를 남들에게 발설한다면 우린 삼족이 멸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 정도로 중차대한 비밀인데….”

“여보, 내가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어서 말씀해 보세요.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은 꼭 지키리다.”

그러자 정승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를 반드시 지키실 수 있으시오?”

“그럼요. 당연하지요.”

“점괘를 보니 앞으로 내가 왕이 될 운수라고 하지 않겠소? 이 비밀은 세상에서 당신과 나 둘밖에 모르는 일이오. 그리 알고 있으시오.”

아내는 정승에게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언약했다.

그런데 사흘이 못 가 아내는 참지 못하고 친정 어머니께 이 사실을 살짝 귀뜀하게 됐고 급기야 온 장안에 파다하게 퍼지게 됐다.

이 소문은 마침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정승은 대노한 왕 앞에 불려오게 되었다.

“이놈! 네가 앞으로 이 나라의 왕이 될 운수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이더냐?”

그러자 왕 앞에 깊숙이 머리를 도아리고 있던 정승이 고개를 들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보고자 제가 아내에게 거짓으로 꾸며본 일입니다. 임금이시여,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시험해 보니 역시 말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말이란 때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에 서면 단 한마디의 말로 인해 사람이 살기도 하고, 때론 죽기도 한다. 단 한마디 말로 사형수가 되기도 하고, 무기수가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이 말이고 보면, 말의 위력이란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또 말은 할수록 늘고 되질은 할수록 준다고 했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도 말이다.

물론 말이 고우면 말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고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를 사오기도 한다. 좋게 사용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또한 말이다.

나는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좋은 선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도 칭찬을 자꾸 해주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대로 잘하라고 부모가 야단을 치고 윽박지르면 지를수록 더 어긋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말한 대로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자라난 사람은 보다 맑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반면 부모로부터 늘 야단만 맞고 자라난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부정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의 태도와 말이란 이처럼 자녀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슬데없는 수천 마디의 말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낫다. 그리고 기왕 말을 하려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 한마디가 알맹이 없는 백 마디 말보다도 소중한 법이다.

말은 좋게 하면 할수록 좋다. 그러나 거짓으로 꾸미기보다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라야 말의 참맛이 새록새록 나는 법이다.

비록 투박하고 거칠지언정 남에게 진정으로 위안이 되는 말, 깊이가 있는 말, 말의 향기가 오래 남아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말….
세상사가 거칠어져 가고 있음인가. 이런 말들이 요즘들어 부쩍 그리워진다.
三中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