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와 인연이 깊다. 그리고 갈 적마다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한다.
광주에 자주 가게 되는 것은 광주은행 사원 연수 강의를 5년째 하고 있는 인연이 있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받은 인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짙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호남대학교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음 광주역에 내렸을 때였다. 택시가 여러 대 내 앞으로 다가왔지만 유심히 보니 저쪽에서 염주를 매달은 택시가 눈에 띄었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여인네들의 기족적인 염원이 강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이다. 염주를 달았다고 해서 반드시 불교신자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나 또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꼭 그래야 할 필요성은 없었지만, 그러나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그쪽으로 마음이 움직여졌다.
택시 안에서 달리 할말도 없고 해서, “기사님은 불교 신자이신가 보죠?”라며 운전석 위에 매달린 염주를 쳐다보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다. 저는 부처님 때문에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자연스레 말문이 열리게 되는 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끈 같은 것, 그것은 일종의 공감대라 할 수 있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 목적지에 이르고 있었다.
호남대학교 안으로 들어와 차를 세운 그 기사는 주머니를 뒤지며 돈을 꺼내는 내게, “저는 어떤 스님에게서든 요금을 받지 않습니다. 저로선 보시한 것이니 그냥 내리십시오.”라고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제가 지켜오는 신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루에 20분씩 날마다 남에게 선행을 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듯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 다 부처님께 기도 드린 덕분이니 그 고마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요금을 안 받겠다는 뜻은 이해가 가지만 부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로선 납들이 가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군요, 제게 그 얘기를 조금 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강의 시간보다는 조금 일찍 도착했으므로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운동장 그늘이 있는 나무 벤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잠시 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세워 놓고 함께 걸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는 일곱 살 때까지 걷지도, 서지도 못하는 앉은뱅이였다는 것이다. 이를 마음 아프게 여기던 어머니는 정안수를 떠놓고 매일을 하루같이 부처님께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느 날 그는 거짓말같이 일어나게 되었고 남들처럼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가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께 기도드린 덕이라고 모두들 놀라워했고 기적이라고 쑤근댔다. 병원에서도 치유 불가능이라고 판정하고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했던 원인 모를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렇듯 건강하게 운전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부처님의 은혜 때문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나의 가슴에는 뭉클한 감동이 전해져왔다. 이 얼마나 갸륵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좋아도 그에 보답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원래 남에게 자신이 준것은 잊지 않아도 받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기억에서 밀려나게 되고 잊는 경우가 많아. 자신이 받은 그 보답으로 날마다 잊지 않고 선행을 베풀고 산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제 강의 준비를 서둘러야겠기에 아쉽지만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강의가 끝날 즈음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나는 이리로 오던 도중 만났던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광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순간, 넓은 강당 안은 갑자기 터져 나온 환호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흐뭇한 마음으로 강의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내가 광주를 떠올릴 적마다 생각나는 첫 번째 아름다운 기억이다.
내가 광주에 갈 적마다 가끔 들르는 음식점이 하나 있다. 영광굴비를 맛나게 차려 주는 집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소박한 분위기인데다 주인 아주머니가 손수 내오는 맛깔스런 밑반찬이 그럴 수 없이 내 입맛을 자극하는 집이다.
나는 절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어 주로 밖에서 음식을 사 먹다보니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채식만 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입맛도 속세인들과 거의 다름없이 변하는 것 같다.
아침 일찍 광주에 도착해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영광굴비 백반’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눈에 띄었다. 주위에는 달리 마땅한 음식점도 없었기에 중이라는 체면도 잊은 채 그만 불쑥 들어갔는데, 이 영광굴비라는 것이 어찌나 맛나던지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한 접시를 뚝딱 해치워 버리고 말았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주인 아주머니는, “스님 공양 대접 해야지요. 찬이 없어도 맛있게 드시지요.”라고 말하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굴비 한 접시를 더 내왔다. 식사라 하지 않고 ‘공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걸로 봐서 아마 불교 신자인가 보다고 나름대로 짐작했다. 더욱이 이렇게 굴비 한 접시를 더 친절하게 대접받고 보니 그러한 생각이 짙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서 셈을 하면서 주인 아주머니께, “어느 절에 다니십니까?”하고 정중히 물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 라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추가된 굴비 한 접시는 스님께 서비스로 드린 것이니 굳이 받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승복을 입은 처음 보는 내게 진심에서 우러난 친절을 베푸는 이 아주머니가 인상적이었다.
출가한 수행자가 살생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일반인의 시선이 곱지 않을 터인데 굳이 굴비 한 접시를 더 내오는 그 따뜻하고 고운 마음에 나는 솔직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광주에 내려가게되면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서 꼭 이집에 들르는 습관이 생겼다. 굴비맛보다도 더 감칠맛나는 그 마음 씀씀이가 내 발길을 자주 이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친절하고 아름다운 정이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씨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난 직후, 광주은행 강연이 있어 광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히 화제가 그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건 내 소견이오만, 사형선고를 받은 전씨 모습이 인간적으로 참 안 돼 보이더군요.”
그러다가 아차, 괜한 말을 꺼낸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나는 기사분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반응은 담담했다.
“죽이면 안 되지요.”
“이곳 사람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죽어갔는데, 당신은 이 고장 사람이 아닌가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것으로 족합니다.”
나는 의외의 대답에서 잠시 말문을 잃었다. 남이 내게 지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망과 원한이 맺혀서 당장 전씨를 처형해야 한다는 말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뜻밖의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광주는 불행히도 많은 상흔을 간직한 도시이다. 금남로에서, 시청 앞 광장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어이없는 군인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되돌릴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전두환 정권 아래 저질러진 비극인 것이다.
누구보다도 이러한 고통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시민들이기에 그 상처의 깊이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쉽게 아물지 못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신 혼자의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시민의 여론이 그렇습니까?”
나는 용서한다는 그의 말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그러자 그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누구신가 했더니… 제가 스님을 잘 알지요. 삼중 스님이 맞지요? 그런데 그런 것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두환 씨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어 물어 본 것뿐입니다.”
비록 전씨가 지은 죄가 크고 현재 그 대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론 그에게 여러 면에서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다. 내가 만나본 전씨는 소탈하고 거리낌없는 성품을 지니 사람이다. 그에게 피해를 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뭇매 맞을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 택시 기사는 내 말을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씨가 세인의 이목을 피해 백담사에 쫓기다시피 내려가 있을 무렵, 나는 일부러 그를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었을 때 내가 구명운동을 하던 한 명의 재일교포 사현수를 무기수로 감형해 준 것에 대해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 도착하니 백담사 부근에는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 와 있었다.
나를 알아본 어느 기자분이 이렇게 물었다.
“삼중 스님, 여기에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전두환이란 죄수가 백담사라는 감옥에 있으니 아마도 그를 교화하러 오신 거지요?”
나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겨울의 산사에는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전 씨는 누추한 방 안에서 무척 초췌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로 저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스님?”
“한 사형수의 목숨을 살려 주신 것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자 전 씨는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도 사람을 살린 적이 있습니까?”
나는 전 씨와 마주앉아 금강경을 읽어 내려갔다. 가끔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주저하지 않고 내게 붇고 또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짚어가면서 감탄하기도 하는 솔직한 그의 모습은 내겐 퍽 인상적이었다.
‘저렇듯 소탈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군인으로 전역을 한 뒤 편안히 앉아 기도하는 모습이라면 나 또한 얼마나 마음 편했을 것인가!’
산사를 내려오는 내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부처님은 ‘잡아함경’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뉘우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긴 밤 동안 쓸데없는 괴로움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자기를 위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광주 시민들은 응어리진 원한을 던져 버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미 전 씨를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 모르는 어느 택시 기사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한 것만큼 용서한다는 말이 있다. 용서한다는 것,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나를 위하고 너를 위하는, 드넓은 화해의 바다로 가는 길임을 택시 안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처럼 남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실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는 내가 광주를 사랑하고 광주 시민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세번째 이유이다.
三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