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걸망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몸으로 태어나 빈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사라 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 해도 죽는 순간에는 결국 빈손이다.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온갖 부귀와 영광을 누린 사람이라 해도 죽음 앞에서는 한낱 물거품일 분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불가에 입문한 수행자에겐 일체의 소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무릇 배고프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밥 한 끼로 족하고 추위와 더위를 가릴 수 있는 의복 한 벌이면 족한 것이다.

삭발을 하는 이유도 번뇌와 집착을 끊기 위함이다. 소유란 부질없는 집착과 더 큰 욕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없음의 철학, 철저한 무소유의 철학.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수행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하는 도리이다.

나 역시 오직 걸망 하나에 의지한 채 수행 출가자로서의 길을 걸어온 지 어언 40년의 세월이다.

때로는 어깨에 짊어진 걸망마저도 부담스럽고 주체하기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걸망 하나도 이승에 대한 집착이 아닐런지. 그러나 언젠가부터 남들이 ‘망태기’라고 부르는 이것이, 없으면 허전하고 아쉬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값비싼 것도 아니고 빛깔 고운 것도 아닌, 남들 보기엔 그저 평범하고 남루한 걸망이건만, 수십 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하다 보니 이제 나에겐 친구이상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6개월 전쯤에 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치른 적이 있으니…

한 사형수의 구명 문제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내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을 즈음이었다. 부산에서 볼일이 있어 서울에 오노라면 시간에 쫓기는 탓에 가끔 비행기를 이용하곤 한다.

그날도 오전 7시 첫 비행기로 급히 서울에 도착했다. 먼저 종로에 있는 조계사에 들러야 했다.

그런데 워낙 피곤했던지라, 택시에 타자마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그만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다 왔습니다.’라고 하는 택시 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허둥대며 조계사 앞에서 내렸다.

그런데 내리고 나니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이 이상했다. 순간 한쪽 어깨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아차, 걸망을 잊은 채 놓고 내린 것이 아닌가!

아뿔싸, 택시는 이미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다시 돌아오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다.

택시 안에 두고 내린 내 걸망 안에는 지인들의 주소록과 전화 번호가 적힌 수첩과 목탁 하나, 게다가 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급한 일에 쓰려고 모아두었다가 마침 소용되는 일이 생겨 가지고 온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 진작 택시 번호라도 보아두는 건데! 점점 멀어져가는 차의 뒷부분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손 떠난 화살이요, 엎질러진 물이었다. 양어깨에 힘이 쭉 빠지면서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망연자실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나는 급하게 세종로로 뛰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교통방송국이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방송으로 알리면 혹시라도 방금 내린 그 택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한가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순식간에 달음박질로 뒤어 교통방송국 정문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여기는 일반인 통제 구역이므로 아무나 들어 가실 수 없습니다. 출입 허가증을 제시하십시오.”

갑자기 나타난 제복의 남자 두 명이 정중하게 말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신분증도, 출입 허가증도 있을 턱이 없었다.

“난… 나는 교통방송국 국장을 만나야 하오.”

순간적으로 급한 김에 이렇게 둘러댔다. 물론 그곳 국장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무사통과를 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댄 것이다. 아마 국장이라면 그곳에서 제일 높을 사람일게 분명하겠고 그래서 무사통과를 기대하고 직함을 잠시 실례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 성함을 대십시오. 그래야 저희가 믿을 수 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던가.

나는 당황해서, “사실 난 지금 급한 사정이 생겨서 이리로 온 겁니다. 제발 봐주시오. 내 오죽하면 이렇게 국장을 둘러댔겠습니까?” 하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임무가 있는 지라, “안 됩니다. 허가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완강한 태도로 버티는 것이다. 곁에 있던 한 사람이 내가 사정하는 모양이 딱했던지, 우선 경찰청에 가서 신고한 후라야 분실물 방송이 나가게 되어 있다고 그곳 규칙을 귀띔해 주었다.

나는 예서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부랴부랴 서소문 근처 경찰청으로 달려갔다. 일러 준 대로 민원실로 갔더니 그곳 직원이 시큰둥한 포정으로 다시 분실된 물건이 보관돼 있는 ‘분실물 센터’로 가보라고 했다. 물론 그곳에 내 물건이 있을 리 없었다. 일이 자꾸만 꼬여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한참 궁리하다가 아무래도 교통과장을 찾아가는 것이 일을 수월하게 해결하는 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쩔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스님이 웬일이십니까?”

곁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인사를 했다. 웬 중이 이른 아침부터 경찰청 복도에서 사색이 다 된 얼굴로 서 있는게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붙들고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며 이러저러한 속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마침 출근하던 경찰관이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 한마디에서 나는 마치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 처럼 기뻤다. 그는 곧 교통방송국과 MBC, KBS에 전화를 걸었다. 내 분실 내용은 그 즉시 방송을 통해 나가게 됐다.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그는 친절하게도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스님의 경우에는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단 그 택시 기사분이 양심적으로 신고를 해야 되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부디 스님이 잃어버린 그 물건을 다시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는 우려하면서도 나의 일이 쉽게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참으로 따뜻한 마음씨의 사람이었다. 나는 감격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그에게 조심스레 ‘무슨 종교를 갖고 계시느냐’고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기독교 신자였다. 기독교 신자라는 그의 대답은 나로 하여금 더욱 고마운 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나는 경찰청 정문을 나섰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젠 방송을 들은 그 기사분의 신고 연락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걷다보니 세종문화회관 앞이었다. 몸이 피곤해져서 다리도 쉴 겸 차를 마시러 잠시 다방에 앉아 있다가 나와서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택시 한 대가 스르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문득 그 택시 기사가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애써 내 앞에 멈춰서는 차를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차에 오르자, “어? 좀전에 타셨던 스님 아니신가요? 맞지요?”

가시가 놀라면서 반갑게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차 종류도 비슷하고… 어쩐지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한참 전에 제가 공항에서 조계사 앞까지 모셨잖습니까? 곤히 주무셨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실 겁니다. 스님께서 큰 망태기를 두고 내리셨길래 제가 좀 전에 조계사에 가서 총무님께 맡겨 놓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부처님이 도우신 것인가! 어느새 지옥이 극락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걸망을 잃어버린 지 두 시간만이었다.

나는 거듭 합장을 하면서 곧장 조계사로 방향을 돌렸다. 내 걸망은 무사했던 것이다!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 하는 법, 그 고마운 기사분에게 사례금으로 얼마를 드리고 난 뒤 나는 잃어버린 걸망을 다시 품안에 소중하게 안았다.
잠시 동안의 소동이었지만, 이 작은 해프닝은 나로 하여금 새삼스레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된 돈, 이 돈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했다. 또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돈이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욕망에는 순간적인 쾌락이 있을 뿐 긴 고통이 따른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 것은 걸망 안에 들어 있는 돈 때문이었다. 돈을 소유함으로써 애착이 생기고 그것을 잃게 되자 고통이 생긴 것이다.

‘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아무런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성자라 부른다.’

‘숫타니파타’에 있는 구정이다.

나는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인가. 걸망은 다시 찾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은 깊어가는 고뇌 한가닥이 스며들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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