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아직도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만나십니까?”
몇 년 전부터 강연으로 바쁘게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니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은 욕심으로 강연에 분주하다보니 언제 교도소에 가고, 언제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도 그 질문 속에는 담겨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교도소 재소자를 돕는 것은 내가 평생 해야 할 일입니다.” 라고 잘라서 말하곤 한다.
사실 나는 1년 3백 6십5일이 모자라는 사람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 강연을 다니다보니 이렇듯 본의 아닌 오해도 받게 된다.
어찌하든 많은 대중들에게 강연을 하는 것도 그들에게 일깨움을 주는 것이요, 또한 부처님의 뜻을 널리 알리는 일이기에 나는 항상 기쁜 마음으로 강연요청에 응하고 있다. 그리고 강연을 통해 얻게 되는 돈은 크든 작든 불우한 이들과 재소자들을 돕고 또한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에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그날도 대구 동화사에 있는 삼성 계열사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아 급히 서둘러 가던 길이었다.
대구역 앞에서 어는 회사택시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여느때처럼,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동화사까지 가주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가시가 나를 알아보고는, “삼중 스님 아니십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스님께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하고 반기는 것이다. 간혹 길에서 나를 이처럼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나 또한 즐거운 마음이 된다.
차에 올라 앉아 있으려니 그 기사는 요금 미터기를 꺾지 않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터기를 꺾지 않고 달리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지만 몸이 너무 피곤한 상태여서 물어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스님, 다 왔습니다.”
어느덧 동화사 앞이었다. 주섬주섬 걸망을 집어들고 내릴 채비를 하면서, “기사님, 요금은 얼마지요?”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젊은 기사는, “이렇게 스님을 뵙게 된 것만 해도 저로선 기쁩니다. 요금은 1만 7천 원이지만 돈은 그냥 두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사 양반, 이 차는 회사택시인 게 분명한데 돈을 받지 않겠다니, 다신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되길래…”
“스님, 저는 한 달에 1백3십만 원이나 벌고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일해서 세 식구가 그럭저럭 먹고 살지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요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나로선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또 그 기사의 많지 않은 월급을 내가 축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기사 양반, 내가 받는 강의료는 5십만 원이니 한 달로 치자면 당신보다 많이 벌지 않소? 부자도 아니면서 요금을 안 받겠다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만만히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삼중 스님, 저는 스님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저도 스님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기억을 마음 속에 간직하게 해주시지요.”
나는 더 이상 기사의 성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돈을 다시 지갑에 넣으며 택시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땀 흘리며 노동하는 어려운 처지임에도,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굳이 거절한 그 기사의 마음이 나는 고마웠다. 그래서 그 돈을 따로 작은 지갑에 잘 보관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따금 내 자신이 일에 힘들고 사람에 지칠 때마다 지갑을 열어 잘 보관된 그 돈을 펼쳐서 바라본다.
내게는 기사의 아름다운 마음이 천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무엇보다 소중한 보석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렇게 믿어주고 지켜봐 주는 그 마음이 있는 한 내가 어떠한 힘겨운 상황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되곤 한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론, ‘나는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이런 고마운 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마음이 된다.
한번은 부산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기 위해 택시를 탔다. 이런저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자 이 기사는, “스님, 스님께는 제가 특별히 3천원만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좋은 일에 보태 쓰십시오.라고 말했다. 영업용 회사택시를 모는 성실해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내가 사양하자 그는 자기도 생활이 어려우니 요금을 전혀 안 받을 수는 없고,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의 마음이 편하다며 굳이 요금을 깎아 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할인해 주겠다는 그 기사의 말이 무척 신선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택시를 자주 이용하다 보니, 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기사분들을 만날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참으로 난처해진다. 하루를 고되게 땀 흘리며 고생하는 택시 기사들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호의가 무척 고마우면서도 뿌리칠 수 없을 때 사실 내 마음은 편치 않다. 그런데 이 기사는 요금을 조금 깎아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경제적이고 솔직한 마음인가!
나는 빙긋이 웃으며, “고맙습니다. 기사님.”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할인된 요금을 건네고 택시에서 내렸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불교 용어로는 ‘보시’라 한다. 이 두 기사는 나에게 보시를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시란 지혜로운 삶을 사는 여섯 가지 방법, 즉 육바라밀 가운데 첫번째로 꼽혀지는 덕목으로 남에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베푼다는 것이 다만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물질이 없는 사람도 베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불교에서는 ‘무채칠시’라 하여 일곱 가지 방법을 마하고 있다. 첫째는 ‘사신지’로 자신의 몸을 버리고 죽을지라도 남을 위하고 돕는 친절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심치지’로 남이 슬프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셋째는 ‘화안시’로 남에게 항상 부드럽고 웃는 낯으로 대하여 기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기분이 불쾌하고 짜증이 난다고 부모나 남편이나 친구에게 함부로 성내지 않는 것. 항상 남에게 기분좋은 얼굴로 대하라는 말이다. 쉬운 일 같지만 실제로 행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넷째는 ‘자안시’로 어려운 처지에 있거나 불행한 사람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고 부드러운 자비의 눈빛으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수어시’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여 상대편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남에게 아첨하고자 억지로 꾸미는 간교한 말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담긴 말을 의미한다.
여섯째는 ‘방어시’로 남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여 마음의 여유를 주는 것을 말한다. 학식이 많거나 명예가 있다고 해서 남을 불편하게 한다면 이는 진정 지혜있는 자가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배려하는 것이 또한 남에게 베푸는 보시인 것이다. 일곱째는 ‘상좌시’로 남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즉 버스나 전철 안에서 노인이나 어린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이다. 이처럼 보시라는 것은 결코 물질이 아니더라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며, 남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음씀이 곧 보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다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을 푸근하고 즐겁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재치 있게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요, 외모가 뛰어난 이도 아니다. 그렇다고 생활이 넉넉한 편이라 남들에게 물질로 많이 베푸는 사람도 아니건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다들 즐거워한다. 그것은 그가 남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한 얼굴이지만 늘 온화한 얼굴로 한번도 성내는 일 없이 남들을 대하기에 그를 보는 이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곧 나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또 베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이는 곧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남들에게 많이 베풀고 많이 주도록 노력하자. 부처님의 자비는 결코 먼곳에 있지 않다.
三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