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주정

“순경 아저씨, 택시 좀 잡아 주십시오.”

신내동 부근에서 잠시 피로를 풀기 위해 서 있는데 술에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모범운전자 복장을 경찰로 잘못 오인한 것이다.

“여기에 제 차를 타십시오.”

정중하게 손님을 태운 모범택시 기사 정씨는 손님에게 행선지를 여쭈었다.

“동대문 구청 앞!”

좀 전에 오다보니 중랑교까지 차가 밀리는 정체 상태라,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차는 전농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낮에 자동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녀본 사람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출근 시간이 지난 낮 시간대인데도 곳에 따라선 주차장이 무색할 만큼 차가 밀리는 이이 자주 벌어지곤 한다. 전농동 방향도 역시 예상처럼 순조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속 5십 킬로의 속도는 낼 수 있었다.

“빨리 가, 난 지금 급하단 말이야.”

“가고 있습니다. 손님.”

“아니, 이 차가 왜 이리 더뎌? 최소한 1백 킬로는 달려야잖아?”

“고속도로도 아닌 시내에서 그렇게 빨리 다닐 순 없습니다. 1백 킬로는 속도위반입니다. 지금 앞의 차들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자 남자는 주먹으로 기사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면서 빨리빨리 가라 재촉하면서,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난 00구청 토목과장이란 말야!” 하고 목청 높여 외쳐댔다.

토목과장이든 건설과장이든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운전하고 있는 사람 머리가지 때리다니!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경우를 가끔 당하는 정씨는 상대가 술에 취한 손님이기에 꾹꾹 눌러 참았다.

“손님 다 왔습니다. 요금은 4천 원 입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아까 차에 탈 때 나가 줬잖아? 5천 원을 냈으니 거스름돈 줘야지.”

이건 완전히 오리발이다. 게다가 거스름돈까지 챙기겠다는 고약한 놀부심보가 아닌가.

아니 당신이 언제 내게 요금을 주었느냐? 줬다, 안 받았다 하는 실랑이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 그가 갑자기 문을 열더니 밖으로 튀어나갔다.

술에 취한 사람 따라잡기란 식은 수프 먹는 격. 1백 미터쯤 가서 도망가던 손님을 잡아온 기사는 안 되겠다 싶어 근처 파출소로 가자고 화를 내며 말했다. 아무리 취중에 무법천지라 해도 이 손님은 심하지 않은가.

이번에는 그 남자를 사정없이 택시에 밀어 넣고 아예 문을 잠갔다. 이 사람 신분이 사실인지 한번 확인해 봐야 했다.

가는 도중 그는 억센 손으로 기사의 두 눈을 가리면서 주먹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치기까지 했지만 결국 완강하게 버디는 그를 끌고 파출소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서도 미친개처럼 날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신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는 거야! 나를 몰라. 나를?” 하고 소리 지르며 신분 조회를 하려는 순경을 윽박질렀다.

순경의 따귀를 때리고 짐승처럼 난동을 부리다가, 결국 수갑이 채워지고서야 그는 풀이 죽은 채 잠잠해졌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이 사람 00구청에 근무하는 건 사실인가 본데…. 일일노무자이구만, 근데 당신이 토목과장이라구 속여?”

조회를 하던 순경이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을 했다.

“술 깨면 벌금 지우고 내보내!”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그는 코까지 골면서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먹고 주정하는 것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또 술을 마시고 저지른 실수나 실언이나 횡포에 대한 처벌은 웬만하면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소한 가해를 해도 술 취한 사람에겐 인정상 눈감아 주는, 면책 비슷한 용서가 허락된다. 즉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라 술이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전기사들은 이처럼 술에 취한 손님을 태울 때가 가장 곤욕스럽다.

마치 옛날 상전이 하인 부리듯 함부로 대하고, 소위 달구지나 끄는 네 주제에…, 하는 식으로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사람, 게다가 술에 취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 도가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반말을 하는 건 예사이고, 걸핏하면 동네북으로 아는지 운전 중인 기사의 뒤통수를 때리며 폭력을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택시 기사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마저 생기고 서글프기 짝이 없단다.

그래서 기사들 중에는 차라리 빈 차로 갈 망정 술에 만취한 사람은 아예 차에 태우지 않는 이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엄연한 승차거부로 법과 자신의 양심에 저촉되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돈을 못 벌어도 손님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모 부장 판사의 얘기가 가십난에 실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늦은 밤 술에 만취한 상태로 택시를 탄 이 부장 판사가 00동 00아파트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아파트에 이르러서도 내릴 생각을 않고 기사에게 저쪽 0동 바로 앞까지 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손님이 술이 많이 마신 상태여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워 보였고, 또 대단위 아파트 단지인 터라 택시 기사는 손님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그런데 0동 앞에 이르자 그는 또, “여긴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데? 조쪽 동인가 보다. 그리고 가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로 가니 또 아니다. 저쪽 동이다 하고 가리키는 것이 빙글빙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몇 번이나 그 아파트를 도는 해프닝이 계속됐다. 그러자, “야, 왜 집을 제대로 못 찾는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와락 성질을 내던 손님이 너 감방에 잡아넣어야겠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느냐.라고 아랫사람 부리듯 호통까지 치자다 갑자기 기사의 양 볼을 때리는 것이었다.

택시 기사도 사람인지라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이 손님의 집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그 근처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라고, 파출소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더욱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순경에게 오히려 고함과 호통을 치면서 기물을 던지고, 집기를 부수고 말로 할 수 없는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신원 조회 결과, 그는 모 지법 꽤 이름 있는 부장 판사임이 밝혀졌다.

결국 그의 부인을 불러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하는 각서 한 장을 쓰게 한 뒤 술 취한 그 부장 판사는 곧 풀려났다.

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다. 하나 나라의 대통령도 국민의 선거에 의해 뽑는 만큼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제아무리 부장 판사라 할지라도 각서 한 장만 받고 사면조치 한 것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어쨌든 그저 웃어넘기기만은 어려운, 술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불가에서는 술을 곡식으로 빚은 차라 하여 곡차라고 한다. 술, 하면 우선 경허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경허 스님에게는 술에 관한 일화가 많기 때문이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이 해인사를 향해 가던 때의 일이다. 경허 스님은 해인사를 가는 길에 노자를 털어 술을 사먹고 갔는데 그만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어느 주막에 들른 경허 스님은 돈도 없이 주모를 꾀어 외상술을 먹더니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했다. 만공 스님은 그런 경허 스님의 행동이 의아스러웠다.

“스님, 갑자기 종이와 붓은 왜 가져오라 하십니까?”

“단청불사 권선을 할까 하네.”

그러더니 절에서 단청부사를 한다는 내용의 권선문을 적어 집집마다 다니며 권선을 하였다.

사람들은 권선문의 문장도 비범하고 경허 스님의 자태도 여느 스님과 다르게 느껴져 조금씩이라도 도참을 했다.

이렇게 하여 전대가 두둑해지자 경허 스님은, “이만하면 단청불사하기에 넉넉하겠군.”라며 만공 스님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주막을 찾아다니며 시주금 받은 돈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이에 만공 스님은 놀라서 말렸다.

“스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부처님을 팔아 술을 먹다니요?”

“아, 이 사람아, 이보다 더 좋은 단청불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의 얼굴을 보니 겨울 추위 탓으로 취기에 오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경허 스님의 얼굴을 보며 만공 스님은 무릎을 쳤다.

“과연 참으로 멋진 단청불사구나.”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계실 때였다. 경허 스님은 아침만 먹으면 어슬렁어슬렁 일주문을 빠져나가 동구 밖 술집들을 순회하시곤 하는 습관이 있었다. 술집마다 경허 스님이 내려오면 막걸리를 철철 넘치게 한 사발씩 주었다. 이를 다 마시고 해가 지면 경허 스님은 비틀대면서 다시 일주문을 넘어오셨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경허 스님이 아무리 취해도 꼭 대적광전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이를 이상히 여길 젊은 승려 몇 명이 하루는 숨어서 몰래 엿보기로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경허 스님이 술냄새를 풍기며 대적광전에 들어섰다. 그런데 법신 비로자나불 정면에 선 경허 스님이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빼더니 턱 밑에 세우는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데도 밤새도록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수행을 하시는 것이었다.

범인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한, 탈속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대 자유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형식적인 계율이나 어떠한 틀에도 구애됨이 없었기에 거리낄 것이 무애자재하셨던 경허 스님이셨다.

술이란 잘 마시면 약이요, 잘못 마시면 독이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 옛 선조들은 술을 담궈 두고 익기를 기다려서 지인들을 불러 정담을 나누기도 했고, 밭에서 일을 하다 쉴 때면 늘어진 노송 밑에 앉아 칼칼한 막걸리 한잔으로 피로를 풀기도 했다.

술에 취해, 달빛에 취해 시를 읊다 물 속에 비친 달을 따려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태백의 이야기는 차라리 멋스럽고 낭만적이다.

그가 다시 살아와 작금의 이 현실을 본다면 무어라 할지? 자못 궁금해질 뿐이다.
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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