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스님─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범어사 조실

지유스님

인간은 사유의 동물이자 잡념의 동물이다.

생각은 신산한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힘이기도 하지만 몸을 갉아먹는 병균처럼 무서운 존재다.

진정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 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실패라고 믿는 착각 곧 뒤틀린 생각이다.

어제에 대한 향수와 내일에 대한 불안에 파묻혀 오늘이 죽어가는 것을 못 본다.

자기가 만든 덫에 스스로 걸리고 아파하며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울러 어리석음의 극치이기도 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알면 바로 부처요 한 생각 놓으면 그 자리가 불국토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요지다.

“마음이란 생각 이전의 본래 자리입니다.

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만들어 못살게 굽니까.

게다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에 왜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선지식은 마음에 한 물건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불해야겠다, 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망상입니다.” 모든 생각을 부정하는 스님의 주장은 깨달음의 원력마저 일축하는 듯해 적잖이 당황스럽다.

나쁜 생각이야 없애야겠지만 좋은 생각마저 죽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스님이 보기에 선심과 탐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깨닫는다는 건 생각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자리는 사량분별을 떠난 자리인데 우리는 여전히 사량분별 속에서 마음을 알아야겠다,

생사를 초월해야겠다는 둥 생각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저 마음이 뭘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둥대는 것일 뿐입니다.” 채울수록 모자라고 채우는 순간 결핍이 나타난다.

결국

‘비움’에 길이 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목전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생각도 없을 때라야 바로 보입니다.

무심의 눈엔 산은 산, 물은 물, 자동차는 자동차입니다.” 희로애락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즉물(卽物)의 경계에서 실상이 보인다.

바로 “주변의 일과 내가 일치되는 상태”다.

“거울에 묻어있던 때가 없어졌을 때 마음에서 생각이란 그림자를 걷어냈을 때 목전의 일과 하나가 되고 거기엔 어떤 괴로움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천재보다 바보가 되기가 더 어려울지 모른다.

쉴새없는 생각으로 기발한 발명을 하기보다 1분이라도 생각을 끊고 지내기가 더 버겁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껏 영웅은 될지언정 돌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다.

스님도 “생각을 끊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찻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안 보입니다.

집에 두고 온 가족 생각, 통장의 잔고, 내일의 할 일, 악마같은 상관 기타 등등 온갖 잡념이 시선을 메워버립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생각에 속아 찻잔을 나누고 쪼개고 빼돌리고 꼬여내느라 정작 찻잔은 온데간데없고 스트레스만 무성하다.

어떻게 이 지독한 번뇌망상을 없애야 하는가.

외려 스님은 혀를 찬다.

“번뇌망상을 없애겠다는 결심도 번뇌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망상이 계속 일어나면 그저 가만 놔두십시오.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마세요.

다만 물끄러미 찻잔만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스님은 “망상을 인정하면서도 그 망상을 ‘뚫고’ 보라”고 강조한다.

망상은 없애려고 마음먹을수록 더 강력해진다.

생각이 곧 망상이고 망상은 망상을 먹고살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에게 아무 망상을 제공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굶주린 망상은 자연스레 목숨을 잃는다.

“망상은 물에 비친 그림자 같이 공한 것입니다.

비록 말을 하고 생각을 일으켰다 해도 생각 이전,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자리를 응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쓸데없는 분별에 집착하지 말고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그 자리가 무심이요 성불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수행은 구하는 것이 아닌 비우기 위한 연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화두를 파고들지만 깨닫지를 못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생각을 들고있는 한, 못 깨칩니다.

그것을 놔버리면 저절로 깨닫습니다.

무거운 짐을 든 탓에 팔이 아파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짐을 내려놓으면 그만이에요.” 수행법에도 특별한 우열이 있지 않다.

“마음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없을 때”, 염불은 입으로 좌선은 엉덩이로 하는 소일거리에 불과한 것.

“기쁘고 괴로운 모든 감정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맑은지 혼탁한지는 스스로 알 것입니다.” 무심(無心),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의 경지는 쉬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망망대해도 물 한 방울에서 태동한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 우리는 왜 괴롭습니까.

어떤 사건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건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이 지나가더라도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거나 울상을 짓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 곧 생각에 얽매인 탓이죠.

고통이다 괴로움이다 하는 것은 지나간 흔적이 그림자처럼 마음에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남의 발자국 혹은 발길질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걸어오다가 새겨진 흔적이다.

발길만 되돌리면 그뿐이다.

“놓으면 됩니다.

놓고 보면 본래 자리입니다.

사실, 본래자리는 휘황찬란한 광명이 비추는 별천지 같은 곳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그 자리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고통 속에서 볼 땐 가장 좋은 자리인 것입니다.

한번도 무거운 것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늘 편안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무시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한번도 들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래 자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가장 귀한 자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면 다음부터는 들지 않게 되겠지요.” 깨달으면 대안심(大安心)을 얻는다.

“우리가 제일 편안할 때는 아무 것도 안할 때입니다.

그런데 으레 여기에 지루함을 느끼고 쌀 한 가마니 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아우성입니다.

여하튼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쳐봅시다.

등정의 기쁨은 잠시, 또다시 허무함이 밀려들고 맙니다.”

다시 야망으로 포장된 골칫거리를 찾아 고된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란 이야기다.

‘날고 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데 말이다.

비아냥조의 이 말은 ‘구태여 날고 기지 않아도 이미 나는 깨달아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덕담으로도 들린다.

“자기 자리에 돌아와 본즉 그 자리에서 헤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맨다고 해서 남의 자리로 간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허송세월한 것이죠.” 건강을 되찾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하라는 말은 도처에서 들리지만 마음의 ‘군살’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없다.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생각 이전의, 생각 너머의 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비를 바로 내보이며 이것이 보이느냐고 물으면 금방 보인다고 대답하며 자신은 정상이라고 믿죠.”

스님은 칼같이 되묻는다.

“당신은 단 5분이라도 딴 생각없이 이 죽비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이 죽비를 못 보는 사람이 과연 정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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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스님─공부에 대한 한 말씀

공부에 대한 한 말씀(기도와 절을 할 때)

-보성스님-

이제 불자들이 즐겨 행하는 공부방법에 대해 몇 마디 사족을 붙이고자 합니다.

먼저 기도나 절을 하는 불자들에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도나 절을 하는 불자는 땀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땀을 흘린다는 것! 이것이 노력입니다.

이것이 절을 하고 기도하는 이의 정직입니다.

땀을 흘려 업장을 녹이고자 해야 합니다.

특히 여름이 되면 절을 하기가 싫어집니다.

땀이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땀이 진참회(眞懺悔)의 땀이요, 업장을 녹여 소원을 이루게 하는 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과 기도는 참으로 큰 힘을 발휘합니다.

매일 108 배라도 꾸준히 계속하게 되면 그 공력(功力)이 쌓이고 쌓여 평생을 별 어려움 없이 지내게 되며, 지위도 오르고 경제력도 저절로 뒤따르게 됩니다.

하루 10 분 흘리는 참회의 땀방울이 평생을 평안하고 향상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고, 절하고 기도하는 수행을 절대로 거르지 마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집안이나 자신에게 특별한 어려움이 있을 때는 반드시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절을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등학교 3 학년을 아들딸로 둔 어머니들은 매우 열심히 절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아들딸이 수능시험을 잘 쳤다고 하면 그날부터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으며 절도 기도도 하지 않는 이가 많습니다.

그 때 나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표정을 이전처럼 지으시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까지 기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마음을 푸는 순간 그릇됨이 침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학에 합격할 때까지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더 다부지게 기도하고 절을 해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뜻하는 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그 날로부터 나태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조금은 편안해져도 되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비행기를 조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만약 비행기 조정사가 ‘아, 오늘은 날씨도 좋고 비행에도 별 어려움이 없구나.

조금 긴장을 늦추고 주위의 풍물을 즐기자’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중한 승객의 생명과 막대한 금액의 비행기가 위험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조종사는 비행기가 목적지에 착륙하여 모든 승객이 무사히 내릴 때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오늘의 내 책임을 마친 때’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백일기도를 작정하였는데 70 일만에 좋은 상서가 있을지라도 고삐를 늦추지 말고 백일을 마저 채우라” 는 충고를 잊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불자의 공부이기 때문이요, 이어지는 기도 속에서 힘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경전을 독송’ 하는 분께 당부 드리겠습니다.

(독경.염불.법문 듣는 법) 불자들 중에는 ‘어떤 경전이 좋다’ 고 하면 뜻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많이 읽는 것에만 치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뜻은 몰라도 많이 읽기만 하면 공덕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뜻을 이해하며 독송하면 뜻을 모르고 독송하는 것보다 열배 스무 배의 공덕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독송할 때는 꼭 뜻을 새기며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 한 페이지를 독송하더라도 가장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하며, 그 경전을 설하신 부처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시간이나마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과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독송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경전 속의 뜻을 확실히 이해해야 합니다.

“아, 부처님께서 바로 이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이렇게 설하셨구나.” 이러한 확신이 분명히 서면 ‘나’ 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나’ 스스로가 자신있게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부디 마음을 모아 맑은 정신으로 독경을 하십시오.

맑은 정신에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정성스럽게 독송을 하면 참으로 부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나는 절에서 불경이나 불교서적을 법보시할 때 신도들에게 ‘한 권씩만 가지고 가지, 두 권 세 권 가지고 가지 말라’ 고 합니다.

또한 가지고 간 책은 꼭 읽으라고 합니다.

한 번 읽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읽어 도움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경전이나 불교서적을 읽어 ‘나’ 의 마음속에 맑고 복된 이해력이 생겨나면 모든 것이 ‘ 나’ 에게 평화롭게 다가서지만, ‘나’ 의 마음속에 탁하고 산란하고 어지러운 기운들이 가득 차면 괴로움과 근심걱정의 태풍이 ‘나’ 를 향해 강하게 불어옵니다.

경전공부! 그것은 바로 ‘나’ 를 맑고 복되게 만들어주는 것이요, ‘나’ 를 차츰 높은 경지로 끌어올려주는 최상의 방편입니다.

정녕 공부하는 불자들은 마음을 모아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나’ 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잘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염불입니다.

아미타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의 명호를 부르며 염불을 하는 이들은 꼭 염(念)을 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명호를 부르지 말고 아미타불 등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의 뜻과 행동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내가 염불을 하지만 ‘나’ 를 버려야 합니다.

‘나’ 를 비우고 ‘나’ 의 마음 가득 불보살님을 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법문을 듣는 자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법회장에 참여할 때는 꼭 ‘오늘 단 한가지 가르침이라도 마음에 새겨야지’ 하는 자세로 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법사의 설법을 듣기 전에 귀를 한 번 만져주며 스스로 당부하십시오.

“귀야, 귀한 법문 부디 잘 들어라.

부디 정신 바짝 차려라.” 그리고 법문을 다 들은 다음에는 단 5 분이라도 명상을 하여 그 법문을 ‘나’ 의 것으로 만들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법사스님께 따로 가르침을 청하여야 합니다.

나도 많은 곳에서 법문을 하지만 의문점을 알뜰하게 물어오는 사람이 드뭅니다.

설법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기특한 공부인입니다.

모르는 것, 의문나는 것을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향상의 길로 열려 있는 진정한 불자입니다.

나는 가끔씩 부탁을 합니다.

“절에 왔으면 수행한 스님의 덕을 조금이라도 보고 가십시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스님의 법문을 알뜰하게 귀 기울여 듣고, 의심이 나든지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말씀에 대해서는 탐문(探問)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도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스님, 저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 바른것인지요?” 이렇게 꾸준히 공부를 하고자 할 때 향상의 길이 열리고 행복의 문이 열리며, ‘부처침의 제자’ 라는 강한 자부심이 생겨납니다.

부디 ‘나’ 를 향상의 길로 이끌어 줄 스승을 잘 선택하여 그 가르침 속에서 한가지 공부라도 양심껏 실천하는 참된 불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혜거스님─불자의 실천

***불자의 실천/

혜거스님

*** 정녕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인 각(覺)과 아는 것인 지(知)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명확합니다.

알고는 있으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알 지(知)’요, 아는 것이 실천으로 바로 이어지면 ‘깨달을 각(覺)’ 입니다.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라야 아는것이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아 향상하고, 멋진 삶 을 영위해야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는가? 불교를 깨달 음의 종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 는가? 이것을 연구해 들어가야 한 차원 높아지는 공부가 되고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연구해 들어가지 않으면 불교를 백년 믿어도 소용이 없습 니다.

경전에는 아는 것과 깨달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지만 행하지 못하면 마음이 없는 것과 같고 마음이 있고 행도 있으면 모든 부처님과 같도다.

유심불행동무심(有心不行同無心) 유심유행동제불(有心有行同諸佛) 마음은 있고 행이 없으면 마음을 먹지 않은 무지한이와 다를 바가 없으며, 마음이 있고 실천행도 뒤따르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연구하고 실천할 것인가? 나는 불자들에게 세 가지 사항을 많이 강조 합니다.

첫째, 1인 1경(經)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을 잘 실천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한 경전을 꾸준히 지니고 읽는 것을 의무 적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한 경전을 꾸준히 읽으면 자연히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고 행복해집니다.

그럼 어떤 경전부터 읽을 것인가? 만약 망설임이 있 다면 금강경부터 읽으십시오.

금강경은 반야(般若), 곧 올바른 소견과 지혜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일도 금강경 한 구절 아는 것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강경은 중생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제일’ 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고통이 무엇이며 왜 생기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불만이 있으니 고통이요,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으니 고통이요, 미운 사람의 그림자만 봐도 기분이 나빠지니 이 또한 고통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 할 것 없이 고통 없는 곳이 없는데, 그 근원을 살펴보면 집착이 고통의 원인입니다.

고통 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끊어야 합니다.

성문, 연각, 보살은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같이 듣지만 해석은 달리 합니다.

듣고 배우는 사람인 성문(聲聞)은, ‘집착이 모든 고통 의 원인이구나.

고통을 가지고 살지 말자.

집착을 끊 어버리고 벗어나자’ 하고는 현실의 모든 것에 대해 ‘버리고 떠나고 끊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버리고 끊게 되면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고통이 파생 됩니다.

인연을 잘 비추어보는 연각(緣覺)은, ‘고통은 집착으로 부터 나온다’는 말을 듣고, ‘집착도 영원하지가 않다.

오늘은 꽃에 집착하고 내일은 나무에 집착하고, 오늘 은 명예를 좇고 내일은 돈을 좇고 있으니…’라면서 성문보다는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무엇이 안 된다고 하여 몸부림치지 않게 되므로,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보살(菩薩)은, 근본자리를 깨달 아서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 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고통 자체가 없습니다.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성문, 연각, 보살은 이와 같이 차이가 납니다.

실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을 없애야 하는데, 집착을 없애는 방법이 바로 반야(般若) 입니다.

그럼 반야를 성취하는 방법을 제시한 경전은 무엇인가? 바로 금강경입니다.

반야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집착할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설한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을 꾸 준히 수지독송 하다 보면 보살의 무집착(無執着)을 저절로 체득하게 됩니다.

물론 다른 경전을 읽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금강경부터 공부하고 매일 수지독송 하되, 궁금한 것이 있거나 더 향상하고자 할 때는 얼마든지 다른 경전을 공부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둘째,1일 1선(善)의 실천,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베풉시다.

이는 하루에 착한 일 한 가지씩을 꼭 하자는 것입 니다.

아무리 조그마한 선행일지라도 하루에 한 가지는 꼭 하는 버릇을 들이십시오.

눈에 띄고 마 음이 흐뭇할 정도의 선행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남을 칭찬해주는 말 한 마디, 기어 다니는 벌레를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좋은 선행입니다.

셋째, 날마다 자기 반조(返照)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은 밖으로만 향 하여 사물에 끄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끄달림 속에서 갖가지 번뇌망상을 일으켜 미혹되고 고통 스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반조하면 어떻게 됩 니까? 자연 번뇌가 잦아들게 되고, ‘나’는 ‘참된 나’ 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 이것이야말로 수행의 기본입니다.

우리가 매일 한 경전을 꼭 수지독송하고, 한 가지 선행을 쉬지 않고 실천하면서, 날마다 자신을 반조 하게 되면 크게 향상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머릿속에 딱 지니고 살면, 우리의 업은 억 겁의 업이라 할지라도 얼음 녹듯이 녹아 없 어지고, 어떠한 길을 걸어가든 조금도 장애가 싱기지 않는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월간 [법공양] 8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