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스님─생사없는 마음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생사없는 마음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지유스님-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순간은 자신이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자기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고 있다니까 깨달은 사람이나 마음을 볼 수 있지 어떻게 중생들이 마음을 볼수 있느냐고 보통사람들은 말합니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알았다해서 비로소 물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물속에서 살게되고, 그것을 몰랐다해서 물밖에 나와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을 알았거나 몰랐거나 항상 물속에 있습니다.
그와같이 우리가 지금 조용히 앉아 있어보면 그것이 공부가 되었던 안되었던, 괴롭던 괴롭지 않던, 깨달았던 깨닫지 않았던 간에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볼수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마음 속을 들여다 보니까 자기의 모습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왜 이리 피곤한지 왜 이리 불안한지 편안한지 느낍니다.
그러나 남의 마음이 왜 피곤하고 괴로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아니라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속의 생각을 남은 모르지만 자신은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조용히 좌선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무엇인가 괜히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닫거나 깨닫지 못했거나 누구든 항상 자기 마음속을 보고 있습니다.
조용히 좌선하고 있을 때의 그 모습은 환자가 내 몸이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 진찰대에 자신을 올려놓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진찰해 달라고 하지 않더라도 자기 스스로 내면의 움직임과 정신적 육체적 상태를 느낄수 있고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잠시 5분동안이라도 앉아보면 느낀대로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온갖 번뇌망상과 앞으로 있을 일이 짧은 순간 영화의 화면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생각을 일으킬 때는 생각이 일어나고 그렇지 않을때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모든것을 초월해 본심에 돌아가 있습니다.
어떤사람은 죽비치고 앉아있는 그 순간부터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정하고 있을 때의 자기 마음 속과 입정에서 나온 이후의 마음 속을 스스로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면 이렇게 내마음속에 혼침이 많은가 하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잠이 많다는 진단이 나온 것입니다.
잠도 오지 않는데 어찌 앉기만 하면 온갖 망상이 일어나는가 하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망상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을때는 소리가 나면 소리 인줄 알게되고, 냄새가 나면 냄새인 줄 알게되고, 물건이 오면 물건인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깨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자고 있는 사람은 소리가 나도 소리인 줄 모를 것이고 냄새가 나도 냄새인 줄 모를 것이며 물건이 와도 물건인 줄을 모릅니다.
이렇게 소리를 알고 냄새를 알고 물체있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있으면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그림자들이 오고가고 합니다.
자기 속의 온갖 그림자들이 오고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자기자신은 압니다.
잠자고 있는 무의식상태와 깨어있는 의식의 상태는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모를 때 그것을 혼침이라 하고 혹은 그것을 묵의혼침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에는 깨어있을 때는 온갖 생각의 그림자인 번뇌망상이 오락가락하고 있고, 또 그렇지 않고 무의식 상태에 들어있으면 바로 혼침이 됩니다.
이 두가지 상태 즉 잠이 아니면 망상, 망상이 아니면 혼침, 이것이 오고가고 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중에 어느쪽이 많으십니까.
양에 관계없이 바로 이 두가지가 자기마음 속의 장애물입니다.
번뇌가 가리고 있다해서 마음이 도망간 것은 아닙니다.
허공에 구름이 덮였다해서 허공이 도망간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허공 속에 구름이 끼여 그 뒤의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 처럼, 마음 속에 혼침이 꽉 찼다 무의식상태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해서 마음이 어디로 도망간 것은 아닙니다.
혹 어떤이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때 내 마음은 어디로 가버렸는가?’하는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물건이 아니므로 잠에 빠졌다해서 멀리 떠난게 아닙니다.
마음은 오고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이 오고 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다만 허공에는 구름이 끼였다가 개이기도 하고, 비가 왔다가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마음 속에 번뇌망상이 오고 갔다가 무의식상태가 되기도 하며, 다시 의식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또 마음속의 내용이나 모양이 자꾸 달라지고 바뀐다 해서 마음이 오고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꿈속에서 보면 생시와 똑같은 모양이 오고 가고, 물건을 보거나, 소리도 듣고, 음식도 먹고, 내몸이 오고가는 것도 그대로 나타나서 모든 감각이 생시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생시에 무서워 하는 것들은 꿈에서도 역시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꿈을 깨고 보면 아무것도 오고 간 것이 없습니다.
꿈에 남에게 당했더라도 놀래서 꿈에서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을 꿈에선 사실대로 느낍니다.
느끼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것은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이 물에 들어가자마자 그 파문이 한참 오래 갈듯 하지만 결국 없어지는 것처럼 흔적이 자기 마음에 남아서 무엇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실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의 생각이나 느낌이 꿈으로 모양으로 나타난다해서 마음자체가 오고가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아무리 자기 속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마음이 같이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있던 생각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마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란 바로 자기자신입니다.
자기는 끝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난 일도 없습니다.
난 일이 없다는 것은 동시에 죽은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다보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생불멸, 부증불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란 물건이 아니라서 아무리 닦는다해도 맑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물건이 아니라서 때가 묻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서 더럽다 깨끗하다 커졌다 작아졌다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공 속에 구름이 많으니까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이지 허공 자체가 커지고 작아지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또한 마음이란 것은 그 양을 도저히 측정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마음이라고 우리가 한계를 임의대로 나누어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크다고 한다면 마음보다 더 큰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이 큰 것이라 해서 우리가 잡아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형체가 없기 때문에 작은 것으로 치면 또 마음보다 작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잡으려고 해도 마음은 형체가 없어서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형사가 와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둘 수 있지만 마음속으로 무슨 일을 하던 아무도 본인자신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속에 일어난 생각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본모습을 가리다 보니 그것이 고통이 되고 여러가지 감정, 느낌으로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기속에서 일어난 모든 생각과 번뇌망상은 그것이 그림자로 나타나거나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소리가 되거나 빛이, 냄새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으로 나타난 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인데도 우리가 이런 것들에 사로잡히다 보니, 정말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괴로움이다 고통이다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지배해서 나쁜 곳에 떨어뜨리거나 또 나를 좋은곳에 인도해 주거나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똑같이 편안하게 해주고 똑같이 즐겁게 해줘야지 왜 안한 사람, 괴로운 사람의 구별이 있는가 하고 불평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평을 해봤자 혼자 불평이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하면서 구속받는 것은 자기가 자신을 구속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구속했다는 것은 자신 속에 일어난 생각이 자신을 괴롭힌 것입니다.
좋게 느끼거나 나쁘게 느끼거나 생각이라는 것은 자기마음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모양으로 자기 앞을 가리느냐에 따라 좋아지고 나빠지고 괴로워하며 여러가지 모양으로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못하고 스스로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사로잡혀 끄달리고 괴롭다 괴롭다 하는지 처량하기만 합니다.
어느날 산에 있는 원숭이가 가만히 산 밑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어떤 연못에 동그란 달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물에 비친 달은 진짜 달이 아니라 그림자인데도 환한 빛을 발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는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희귀한 달이 연못 속에 있구나!’ 달이란 원래 하늘에 있는 것인줄 알았던 원숭이는 연못속에서 환한 빛을 뿜고 있는 달을 보고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원숭이들은 달이 항상 동그랗게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달은 하루하루 모양이 변하고, 또 때때로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원숭이들은 어떻게 하면 저달을 잡아둘 수 있을까를 고심하던 끝에 문득 연못에 있던 달을 보고는 그것을 담아오고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나무에 몸을 붙이고 사슬을 엮어 연못 속의 달을 건지려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달은 건져지지 않았습니다.
달은 그대로 물속에 그림자로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원숭이가 달을 건지려 했을까요.
달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림자인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 속의 생각은 연못의 달처럼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지로 그런지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감자 마자 그림자의 퍼레이드가 시작됩니다.
다시 눈을 뜨고 보이는 대로 그에 맞춰 생각이 떠오릅니다.
잠자다 나타나는 생각은 꿈이요, 이 꿈은 생시와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 믿지 못하는 것은 보통 인간의 마음입니다.
평소에 익힌 습성대로 이끌려 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습성은 바로 우리의 업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노력하게 되면 우리의 나쁜 업생, 업도 차차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마음의 모든 번뇌망상,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구.의 삼업 중 어느쪽으로 젖어왔냐 하는것, 말도 항상 선한 마음으로 하는 생활에 젖은 사람은 누구를 대하더라도 항상 공손하고, 남에게 부드럽게 대합니다.
그것은 익혀왔기 때문입니다.
정반대로 항상 남을 욕하고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남을 보면 한마디라도 좋게 말할 줄 모릅니다.
이것도 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안된다 나쁘다 하는 것만 알더라도 큰 힘이 됩니다.
다음에는 자신이 노력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나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한 생각을 놓아 버리면, 좋은 쪽으로 돌리고 돌리고 하다보면 나쁜 습성이 저절로 일어났듯이 좋은 습성도 저절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결국 그 모든 업의 인과는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잘 살고 행복하고 오래 살려면 남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근본마음을 돌이키고, 좋은 생각,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마음 속에 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부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유스님─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범어사 조실
지유스님
–
인간은 사유의 동물이자 잡념의 동물이다.
생각은 신산한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힘이기도 하지만 몸을 갉아먹는 병균처럼 무서운 존재다.
진정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 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실패라고 믿는 착각 곧 뒤틀린 생각이다.
어제에 대한 향수와 내일에 대한 불안에 파묻혀 오늘이 죽어가는 것을 못 본다.
자기가 만든 덫에 스스로 걸리고 아파하며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울러 어리석음의 극치이기도 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알면 바로 부처요 한 생각 놓으면 그 자리가 불국토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요지다.
“마음이란 생각 이전의 본래 자리입니다.
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만들어 못살게 굽니까.
게다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에 왜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선지식은 마음에 한 물건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불해야겠다, 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망상입니다.” 모든 생각을 부정하는 스님의 주장은 깨달음의 원력마저 일축하는 듯해 적잖이 당황스럽다.
나쁜 생각이야 없애야겠지만 좋은 생각마저 죽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스님이 보기에 선심과 탐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깨닫는다는 건 생각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자리는 사량분별을 떠난 자리인데 우리는 여전히 사량분별 속에서 마음을 알아야겠다,
생사를 초월해야겠다는 둥 생각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저 마음이 뭘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둥대는 것일 뿐입니다.” 채울수록 모자라고 채우는 순간 결핍이 나타난다.
결국
‘비움’에 길이 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목전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생각도 없을 때라야 바로 보입니다.
무심의 눈엔 산은 산, 물은 물, 자동차는 자동차입니다.” 희로애락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즉물(卽物)의 경계에서 실상이 보인다.
바로 “주변의 일과 내가 일치되는 상태”다.
“거울에 묻어있던 때가 없어졌을 때 마음에서 생각이란 그림자를 걷어냈을 때 목전의 일과 하나가 되고 거기엔 어떤 괴로움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
하지만 천재보다 바보가 되기가 더 어려울지 모른다.
쉴새없는 생각으로 기발한 발명을 하기보다 1분이라도 생각을 끊고 지내기가 더 버겁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껏 영웅은 될지언정 돌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다.
스님도 “생각을 끊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찻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안 보입니다.
집에 두고 온 가족 생각, 통장의 잔고, 내일의 할 일, 악마같은 상관 기타 등등 온갖 잡념이 시선을 메워버립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생각에 속아 찻잔을 나누고 쪼개고 빼돌리고 꼬여내느라 정작 찻잔은 온데간데없고 스트레스만 무성하다.
어떻게 이 지독한 번뇌망상을 없애야 하는가.
외려 스님은 혀를 찬다.
“번뇌망상을 없애겠다는 결심도 번뇌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망상이 계속 일어나면 그저 가만 놔두십시오.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마세요.
다만 물끄러미 찻잔만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스님은 “망상을 인정하면서도 그 망상을 ‘뚫고’ 보라”고 강조한다.
망상은 없애려고 마음먹을수록 더 강력해진다.
생각이 곧 망상이고 망상은 망상을 먹고살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에게 아무 망상을 제공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굶주린 망상은 자연스레 목숨을 잃는다.
“망상은 물에 비친 그림자 같이 공한 것입니다.
비록 말을 하고 생각을 일으켰다 해도 생각 이전,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자리를 응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쓸데없는 분별에 집착하지 말고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그 자리가 무심이요 성불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수행은 구하는 것이 아닌 비우기 위한 연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화두를 파고들지만 깨닫지를 못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생각을 들고있는 한, 못 깨칩니다.
그것을 놔버리면 저절로 깨닫습니다.
무거운 짐을 든 탓에 팔이 아파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짐을 내려놓으면 그만이에요.” 수행법에도 특별한 우열이 있지 않다.
“마음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없을 때”, 염불은 입으로 좌선은 엉덩이로 하는 소일거리에 불과한 것.
“기쁘고 괴로운 모든 감정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맑은지 혼탁한지는 스스로 알 것입니다.” 무심(無心),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의 경지는 쉬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망망대해도 물 한 방울에서 태동한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 우리는 왜 괴롭습니까.
어떤 사건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건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이 지나가더라도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거나 울상을 짓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 곧 생각에 얽매인 탓이죠.
고통이다 괴로움이다 하는 것은 지나간 흔적이 그림자처럼 마음에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남의 발자국 혹은 발길질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걸어오다가 새겨진 흔적이다.
발길만 되돌리면 그뿐이다.
“놓으면 됩니다.
놓고 보면 본래 자리입니다.
사실, 본래자리는 휘황찬란한 광명이 비추는 별천지 같은 곳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그 자리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고통 속에서 볼 땐 가장 좋은 자리인 것입니다.
한번도 무거운 것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늘 편안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무시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한번도 들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래 자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가장 귀한 자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면 다음부터는 들지 않게 되겠지요.” 깨달으면 대안심(大安心)을 얻는다.
“우리가 제일 편안할 때는 아무 것도 안할 때입니다.
그런데 으레 여기에 지루함을 느끼고 쌀 한 가마니 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아우성입니다.
여하튼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쳐봅시다.
등정의 기쁨은 잠시, 또다시 허무함이 밀려들고 맙니다.”
다시 야망으로 포장된 골칫거리를 찾아 고된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란 이야기다.
‘날고 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데 말이다.
비아냥조의 이 말은 ‘구태여 날고 기지 않아도 이미 나는 깨달아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덕담으로도 들린다.
“자기 자리에 돌아와 본즉 그 자리에서 헤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맨다고 해서 남의 자리로 간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허송세월한 것이죠.” 건강을 되찾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하라는 말은 도처에서 들리지만 마음의 ‘군살’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없다.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생각 이전의, 생각 너머의 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비를 바로 내보이며 이것이 보이느냐고 물으면 금방 보인다고 대답하며 자신은 정상이라고 믿죠.”
스님은 칼같이 되묻는다.
“당신은 단 5분이라도 딴 생각없이 이 죽비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이 죽비를 못 보는 사람이 과연 정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