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스님─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마음에서 생각을 걷어내야 바로 보입니다” -범어사 조실

지유스님

인간은 사유의 동물이자 잡념의 동물이다.

생각은 신산한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힘이기도 하지만 몸을 갉아먹는 병균처럼 무서운 존재다.

진정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 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실패라고 믿는 착각 곧 뒤틀린 생각이다.

어제에 대한 향수와 내일에 대한 불안에 파묻혀 오늘이 죽어가는 것을 못 본다.

자기가 만든 덫에 스스로 걸리고 아파하며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울러 어리석음의 극치이기도 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알면 바로 부처요 한 생각 놓으면 그 자리가 불국토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요지다.

“마음이란 생각 이전의 본래 자리입니다.

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만들어 못살게 굽니까.

게다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에 왜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선지식은 마음에 한 물건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불해야겠다, 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망상입니다.” 모든 생각을 부정하는 스님의 주장은 깨달음의 원력마저 일축하는 듯해 적잖이 당황스럽다.

나쁜 생각이야 없애야겠지만 좋은 생각마저 죽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스님이 보기에 선심과 탐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깨닫는다는 건 생각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자리는 사량분별을 떠난 자리인데 우리는 여전히 사량분별 속에서 마음을 알아야겠다,

생사를 초월해야겠다는 둥 생각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저 마음이 뭘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허둥대는 것일 뿐입니다.” 채울수록 모자라고 채우는 순간 결핍이 나타난다.

결국

‘비움’에 길이 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목전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생각도 없을 때라야 바로 보입니다.

무심의 눈엔 산은 산, 물은 물, 자동차는 자동차입니다.” 희로애락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즉물(卽物)의 경계에서 실상이 보인다.

바로 “주변의 일과 내가 일치되는 상태”다.

“거울에 묻어있던 때가 없어졌을 때 마음에서 생각이란 그림자를 걷어냈을 때 목전의 일과 하나가 되고 거기엔 어떤 괴로움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천재보다 바보가 되기가 더 어려울지 모른다.

쉴새없는 생각으로 기발한 발명을 하기보다 1분이라도 생각을 끊고 지내기가 더 버겁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껏 영웅은 될지언정 돌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다.

스님도 “생각을 끊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찻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안 보입니다.

집에 두고 온 가족 생각, 통장의 잔고, 내일의 할 일, 악마같은 상관 기타 등등 온갖 잡념이 시선을 메워버립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생각에 속아 찻잔을 나누고 쪼개고 빼돌리고 꼬여내느라 정작 찻잔은 온데간데없고 스트레스만 무성하다.

어떻게 이 지독한 번뇌망상을 없애야 하는가.

외려 스님은 혀를 찬다.

“번뇌망상을 없애겠다는 결심도 번뇌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망상이 계속 일어나면 그저 가만 놔두십시오.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마세요.

다만 물끄러미 찻잔만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스님은 “망상을 인정하면서도 그 망상을 ‘뚫고’ 보라”고 강조한다.

망상은 없애려고 마음먹을수록 더 강력해진다.

생각이 곧 망상이고 망상은 망상을 먹고살기 때문이다.

결국 망상에게 아무 망상을 제공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굶주린 망상은 자연스레 목숨을 잃는다.

“망상은 물에 비친 그림자 같이 공한 것입니다.

비록 말을 하고 생각을 일으켰다 해도 생각 이전,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자리를 응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쓸데없는 분별에 집착하지 말고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그 자리가 무심이요 성불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수행은 구하는 것이 아닌 비우기 위한 연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화두를 파고들지만 깨닫지를 못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생각을 들고있는 한, 못 깨칩니다.

그것을 놔버리면 저절로 깨닫습니다.

무거운 짐을 든 탓에 팔이 아파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짐을 내려놓으면 그만이에요.” 수행법에도 특별한 우열이 있지 않다.

“마음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없을 때”, 염불은 입으로 좌선은 엉덩이로 하는 소일거리에 불과한 것.

“기쁘고 괴로운 모든 감정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맑은지 혼탁한지는 스스로 알 것입니다.” 무심(無心),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의 경지는 쉬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망망대해도 물 한 방울에서 태동한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 우리는 왜 괴롭습니까.

어떤 사건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사건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이 지나가더라도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거나 울상을 짓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 곧 생각에 얽매인 탓이죠.

고통이다 괴로움이다 하는 것은 지나간 흔적이 그림자처럼 마음에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은 남의 발자국 혹은 발길질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걸어오다가 새겨진 흔적이다.

발길만 되돌리면 그뿐이다.

“놓으면 됩니다.

놓고 보면 본래 자리입니다.

사실, 본래자리는 휘황찬란한 광명이 비추는 별천지 같은 곳이 아닙니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그 자리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고통 속에서 볼 땐 가장 좋은 자리인 것입니다.

한번도 무거운 것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늘 편안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무시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한번도 들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래 자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가장 귀한 자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면 다음부터는 들지 않게 되겠지요.” 깨달으면 대안심(大安心)을 얻는다.

“우리가 제일 편안할 때는 아무 것도 안할 때입니다.

그런데 으레 여기에 지루함을 느끼고 쌀 한 가마니 지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와야 직성이 풀린다고 아우성입니다.

여하튼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쳐봅시다.

등정의 기쁨은 잠시, 또다시 허무함이 밀려들고 맙니다.”

다시 야망으로 포장된 골칫거리를 찾아 고된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란 이야기다.

‘날고 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인데 말이다.

비아냥조의 이 말은 ‘구태여 날고 기지 않아도 이미 나는 깨달아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덕담으로도 들린다.

“자기 자리에 돌아와 본즉 그 자리에서 헤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맨다고 해서 남의 자리로 간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허송세월한 것이죠.” 건강을 되찾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하라는 말은 도처에서 들리지만 마음의 ‘군살’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없다.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생각 이전의, 생각 너머의 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비를 바로 내보이며 이것이 보이느냐고 물으면 금방 보인다고 대답하며 자신은 정상이라고 믿죠.”

스님은 칼같이 되묻는다.

“당신은 단 5분이라도 딴 생각없이 이 죽비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이 죽비를 못 보는 사람이 과연 정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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