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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차고 더운 줄 아는 것 마음 밑바닥서 보고 들어야 禪”
[7인 선사 초청 대법회]범어사 조실 지 유 스님
여러분은 무엇을 궁금해 합니까.
여러 스님들이 온갖 좋은 말씀을 통해 인생을 어떻게 정하고 수행하며 공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곧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잘 산다’, ‘못 산다’ 하는 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릅니다.
잘 먹고, 재물을 갖고, 편안한 것을 잘산다 할 것이고, 가난하고 가진 것 없고, 불편한 자리에 거처하면 못산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못산다는 개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뜻대로 안되고, 중병에 걸려도 잘사는 사람이 있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도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살고 못산다는 기준이 뭡니까?
우리는 법회 때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라고 삼귀의례를
합니다.
양족(兩足)이란 복덕과 지혜 두 가지를 구족했다는 뜻으로
부처님은 이 두 가지를 구족하신 어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델로 삼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까하며 ‘성불합시다’ 합니다.
그러면 복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복이라 하고 갖추지 못하면 박복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가진 것이라고는 발우와 가사 한 벌 뿐이었습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지요.
그런 분을 우리는 복이 많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지혜-복덕 구족한 어른
불안하고 불평스러워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부처님은 과연 행복하게 살았을까? 혹시 정신이 모자라는 바보는 아닌가? 이렇게 의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쳤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깨치지 않고서는 그렇게 불편하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럼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불합시다’, ‘부처님이 됩시다’ 하고 인사를 합니다.
부처님하면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신통광명으로 범인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뛰어난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는 깨친 사람이란 뜻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궁금한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궁금해 하냐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면 머리만 복잡해 질 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골치를 해결하고자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불교를 선택했습니다.
마음의 편안과 의지처를 찾아 불교를 선택했는데 여러분은 더 불편하고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먹고 살기도 복잡한데 불교 공부까지 하라고 하니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머릿속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불문에 들어왔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크게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한 걸음씩 부처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
니다.
지금은 ‘성불(成佛)’이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과거
부처님도 몇 생에 걸쳐 육바라밀을 닦고 수행을 다해 마침내 성불을
이뤘습니다.
‘범부인 내가 감히 성불이라니’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부처님도 그렇게 노력해왔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성불을 향해 가야 합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여여러분은 그러한 희망을 보고 계십니까?
깨달음으로 생사 문제 해결
무술을 배우면 한 달 전과 한 달 후가 틀리고 일 년 전과 일 년 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문에 들어와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 좌선하는 모습이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남이 볼 때 저절로 존경심이 나게 됩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신 것은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답을 찾아 출가를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재물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편하게 사느냐 편치 못하게 사느냐는 그 다음의 일입니다.
이 근본적인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던 중 한 바라문을 만나 출가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한줄기 빛과 같은 실마리를 듣고 용기를 내 출가를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정진 끝에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생사의 문제를 무엇으로 해결했습니까? 그것은 깨달음입니다.
무엇으로 깨달았습니까? 마음을 깨친 것입니다.
깨닫고 보니 생사를 초월한 본래의 모습(眞我)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인 나와 가짜인 나가 구별이 됩니까?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나입니까? 가짜인 나입니까? 두 모습 모두 나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이런 말들에 현혹되고 있습니다.
진짜 나, 가짜 나 모두 나이지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진아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생사는 본래 없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체중생 모두가 불생불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행동과 생각에 붙잡혀 자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과 생각을 망상,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 망상과 집착은 자기를 잊어버리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 이 원인만 제거하면 진아는 찾을 것도 없이 바로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후에 입으로 이 사실을 그대로 일러주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불이었다.
공부해서 성불한 것이 아니다’고 일러주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입을 다물고 혼자 성불한 것으로 끝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오래도록 고행한 것은 혼자만 누리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생각 끝에 진짜를 감춰놓고 가짜를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방편이라 합니다.
8만4000 경전 모두가 가짜입니다.
간혹 진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미묘해서 보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49년간 진짜를 감춰놓고 콩을 팥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야 진짜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마음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는 ‘위빠사나’, ‘선’ 등 다양한 수행법이 유행합니다.
선도 대승선, 조사선, 여래선, 간화선 등 수없이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까?
일찍이 서산대사는 “선은 불심이고 교는 불설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얻어지는 것에는 본래라고 이름붙이지 않습니다.
달마대사도 불심법(佛心法), 마음을 바로 보는 법을 강조했습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자기의 마음을 바로 보고 성불하게 한 것입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깨닫고 보면 선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모든 행동이 공부고 선입니다.
그런데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것은 선이고 어떤 것은 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옛날 선사들은 혼자 고심고심 하다가 종소리에, 활짝 핀 꽃의 모습에서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종소리를 수없이 듣고, 꽃피는
모습을 봤지만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무슨 차이인가요? 똑같은 소리를 듣고도 누구는 깨닫고 누구는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선이라 하면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선은 아닙니다.
조금 전 언급한
것처럼 행주좌와 어묵동정, 서고, 걷고, 뛰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고요하고 즉 일상의 모든 생활이 선입니다.
여기서 선을 찾으란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일상에서 선을 찾아
봤습니까?
선은 불심이요 교는 불설이다
도대체 선이 뭘까요.
똑같은 행동을 해도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선이 아니다’고 구분을 짓습니다.
자기 마음의 밑바닥(了達)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 보고, 듣지 못하면 선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밑바닥은 또 무엇인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고 적적고요한 자리에서 보고 듣는 것입니다.
종소리를 들었지만 종소리가 나는 아닙니다.
찻잔을 보고, 꽃을 봤지만 찻잔과 꽃이 내가 아닙니다.
나는 형태도 아니요, 소리도 아닌데 형태도 소리도 아닌 내가 소리를 듣고 깨닫고 형태를 보고 깨닫습니다.
서산대사는 팔만대장경을 다 꿰고 있었지만 학문과 지식은 문자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깨달음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몇 년을 수행했습니다.
몇 년을 정진해도 도저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모든 생각을 놓아 버리고 바람이나 쏘이겠다며 행각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어느 마을을 지나던 중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단박에 깨쳤습니다.
깨달음이란 경전이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모든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깨닫지 못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해서 어떻게 깨닫겠냐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힌트를 주고 정보를 줘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소소영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애 울음도 진리의 법문
왜 나는 보지를 못하는가.
이유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마음이 사로잡혀 있으니 참된 맛을 느끼지 못하고, 참 빛을 보지 못하고, 참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서산대사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허탈한 마음에 모든 것을 놓으니 바로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의문이 없는 사람은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의문은 깨달음으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의문 없이 깨닫겠다는 것은 영원히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세속의 학문과 과학기술도 마찬가집니다.
저것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고 밤낮으로 연구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알고자 하는 의문을 갖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의 밑바닥에 사무쳐서 홀연(忽然)히 깨닫습니다.
마음의 밑바닥.
우리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고 합니다.
마음 밖에 나타난 것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꿈에 부처님을 뵈었다고 하고 기도 중에 부처님이 나타났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그건 부처가 아닙니다.
물체를 보고 있는 놈이 부처지 보이는 것이 부처가 아닙니다.
선문에는 ‘어떻게 공부해야 간단하고 확고히 깨칠수 있냐’는 질문에 ‘자기 마음이 마음인데 무슨 방법이 필요한가’라고 답변돼 있습니다.
‘어떻게’가 왜 필요합니까.
본인은 본인의 눈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인다는 것은 눈이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똑같은 소리를 듣는데 깨달은 사람은 웃습니다.
그러나 망상과 집착이 머릿속 깊이 파고들어 있으니 머리로서 이해가 안 되고 말로는 설명을 못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서산대사도 그렇게 기진맥진할 정도로 생각하던 것을 놓아 버리자 단박에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종소리를 들었지만 방해물이 가리고 있어 그 참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옛날 도명 스님은 육조 스님의 의발을 빼앗으려 뒤쫓아 왔습니다.
육조 스님의 길을 막아선 도명 스님은 “의발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육조 스님은 “발우와 가사가 필요하다면 가져가라”며 바위 위에 의발을 올려놓았습니다.
도명 스님은 순간 ‘앗 내가 착각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육조 스님은 의발을 훔친 것이 아니라 홍인 스님께서 전수해 준 것을 완력으로 빼앗으려 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명 스님은 바로 합장을 하고 법을 구하려 왔음을 고했습니다.
이에 육조 스님은 “정말로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음 속 생각을 모두 털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공부한 것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할까봐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이 때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순간 도명 스님은 홀연히 깨치고,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때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이 찬 줄 더운 줄 아는 것이라 한다면 상식적으로 믿어집니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결국 ‘신(信)’ 성취입니다.
‘신’이라 하면 부처님이나 신을 믿는 신앙심으로 표현되는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깨치고 자기 마음을 바로 믿는 사람이 신심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찻잔을 보고 있는 것이 나이고 차 맛을 본 것이 나입니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좌선을 할 때 벽을 보고 자세를 잡아 무엇인가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공부의 생각을 잡고 있는 것이지 아직 선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의 밑바닥에 도달해 보고 들을 때 그것이 선입니다.
찬줄 알고 더운줄 아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되, 맛보고 있는 그 마음자리가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똑같은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깨닫고, 대부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망상분별이라는 생각 속에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 소리가 시끄러워 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마음 밑바닥에서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듣고 있으면 어린애 우는 소리도 굉장히 아름다운 진리의 법문이 됩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라.
모든 것이 청정하고 참된 몸이어서 바람소리, 새소리 모두 법문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보면 시장 패싸움 소리도 법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밑바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본래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밑바닥을 찾으려 하니 오히려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 시간만 벽을 보고 있어보세요.
벽은 항상 그대로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잡념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시험삼아 한 번 해 보세요.
재미없죠? 그러니까 딴생각이 생기는 것이고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
졸고 있는 것은 나 아닙니까? 딴생각하는 것은 나 아닙니까? 소소영영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 나입니까?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이 본래의 모습이겠습니까? 이 가운데 어떤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육조 스님이 도명 스님에게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깨치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
선도 악도 아닌, 차가운 것은 오로지 차가울 뿐이고 뜨거운 것은 오직 뜨거울 뿐입니다.
선이다, 악이다, 좋다, 나쁘다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 있었던 것을 모르고 밖에서 ‘진리다’, ‘도다’, ‘선이다’ 하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불자들은 선사라 하면 가사, 장삼을 갖추고 점잖게 앉아서 조용히 참선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사 중에서는 지게지고 거름주고, 나무하고 하는 선사도 아주 많았습니다.
젊은 납자들이 큰스님에게 공부를 배우러 왔다고 하면 그저 묵묵히 일만합니다.
그러면 큰스님이 일하는데 젊은 사람이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가만히 일을 하다가 문득 의심이 납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고 물어봅니다.
그럼 스님은 그런 것 없다고 합니다.
옛날 경허선사는 나의 살림살이를 물어본다면 털어도 털어도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 복잡한 보따리를 머리에 짊어지고 있느냐 이겁니다.
심중무일물(心中無一物)이로다.
마음속에 한 물건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한 물건도 없기에 차를 마시면 오로지 차요, 일할 때는 오로지 일이고, 밥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도 오직 그러할 뿐입니다.
죽비를 보여주면 죽비를 봐야지 왜 다른 것을 보려고 합니까.
그 짓을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깨칠 때까지 하려고 합니까? 깨치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상하지 마십시오.
깨달은 사람을 직접 찾아가 물어보면 바로 알려 줍니다.
그러나 아무한테나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솔직히 일러줍니다.
정리=김현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