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스님─깨달음이란 차고 더운 줄 아는 것

깨달음이란 차고 더운 줄 아는 것

-지유스님-

옛날 도명 스님은 육조 스님의 의발을 빼앗으려 뒤쫓아 왔습니다.

육조 스님의 길을 막아선 도명 스님은 “의발을 내 놓으라” 고 했습니다.

그때 육조 스님은 “발우와 가사가 필요하다면 가져가라” 며 바위 위에 의발을 올려놓았습니다.

도명 스님은 순간 ‘앗 내가 착각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육조 스님은 의발을 훔친 것이 아니라 홍인 스님께서 전수해 준 것을 완력으로 빼앗으려 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명 스님은 바로 합장을 하고 법을 구하려 왔음을 고했습니다.

이에 육조 스님은 “정말로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음 속 생각을 모두 털어버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공부한 것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할까봐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이 때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순간 도명 스님은 홀연히 깨치고,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때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고 했습니다.

깨달음이 찬 줄 더운 줄 아는 것이라 한다면 상식적으로 믿어집니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결국 ‘신(信)’ 성취입니다.

‘신’이라 하면 부처님이나 신을 믿는 신앙심으로 표현되는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깨치고 자기 마음을 바로 믿는 사람이 신심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찻잔을 보고 있는 것이 나이고 차 맛을 본 것이 나입니다.

우리는 좌선을 할 때 벽을 보고 자세를 잡아 무엇인가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 공부의 생각을 잡고 있는 것이지 아직 선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의 밑바닥에 도달해 보고 들을 때 그것이 선입니다.

찬줄 알고 더운줄 아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되, 맛보고 있는 그 마음자리가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똑같은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깨닫고, 대부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망상분별이라는 생각 속에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 소리가 시끄러워 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마음 밑바닥에서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듣고 있으면 어린애 우는 소리도 굉장히 아름다운 진리의 법문이 됩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라.

모든 것이 청정하고 참된 몸이어서 바람소리, 새소리 모두 법문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 밑바닥에서 보면 시장 패싸움 소리도 법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 밑바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본래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밑바닥을 찾으려 하니 오히려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 시간만 벽을 보고 있어보세요.

벽은 항상 그대로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잡념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시험삼아 한 번 해 보세요.

재미없죠? 그러니까 딴생각이 생기는 것이고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

졸고 있는 것은 나 아닙니까? 딴 생각하는 것은 나 아닙니까? 소소영영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 나입니까?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이 본래의 모습이겠습니까? 이 가운데 어떤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육조 스님이 도명 스님에게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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