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이 무거우면 길이 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누구에게나 자기 방식의 길이 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의 길이라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어떤 스님이 출가를 하여 어느 절에 살고 있는데 한 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스님은 왜 스님이 되었습니까?”

이 물음에 스님은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다 한다.

“우리 집 대문 밖에 큰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묘하게도 가지가 사방으로 네 개가 뻗어 각기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나는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가 마음에 들어 그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어디론가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무작정 집을 나와 내가 좋아하는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갔지요. 그랬더니 절이 있어 그냥 절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은은하고 재미나는 이야기이다. 좋아하는 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절에 와 스님이 되었다? 인연의 길이란 이렇게 묘한 뉘앙스로 쉽게 설명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자기 인연의 길을 가고 있는 존재다. 설사 아무 주관 없이 남 따라 장에 가는 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인연의 길로 보아야 한다. 이 인연의 길이 인생의 도정(道程)이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이 더욱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갈 길이 더욱 멀다.”는 『법구경』에 있는 말처럼 인생의 도정은 사람에 따라 먼 길이 있고 가까운 길이 있다. 이것은 굳이 거리의 ‘리(里)’ 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거리가 길고 짧은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의해서 길어지고 짧아지는 인생 도정이 다르다는 말이다. 인생이 비록 인연의 길이지만 그 결과는 항상 과보로 나타난다. 인연과 과보는 서로 반대되는 말로 인과의 법칙에 의해 인연이 있으면 과보가 오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생사 역시 인과의 이치로 이루어지지만 윤회의 과정에서 보면 인과는 항상 동시적인 의미를 가진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해서 인과는 항상 겹으로 붙어 있는 것이다. 이 이중의 겹으로 볼 때 인생은 끝나지 않는 길을 가는 영원한 나그네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생은 끝나지 않는 연속극이다. 결코 단막극으로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세생생으로 이어지는 연속의 삶을 가지고 끝나지 않는 길을 가야 하는 유랑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먼 길을 가고 있다. 인연이 만들어 주는 과보를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맺은 인연에 좋은 과보가 오도록 응분의 노력을 다하고 인연의 책임을 지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자의 사자성어에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말이 있다. ‘책임이 무거우면 길이 멀다.’는 이 말은 무거운 책임을 진 사람일수록 할 일이 더 많다는 말이다. 내가 맺은 인연에 부여된 책임을 내가 지지 아니하면 멈춰버린 시계처럼 내 인생이 고장 나고 마는 것이다. 초침이 멈춰 가지 않는 시계는 고장 난 시계거나 건전지 떨어진 시계이다. 시계가 가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또 시계는 시간을 정확하게 가리켜 주어야 한다. 틀린 시각을 가리켜 주는 시계라면 그 시계를 보는 사람이 시간을 잘못 알게 되는 것이다. 시각이 틀린 시계를 믿다간 시간의 낭패를 보게 된다. 어쩌면 인생이란 시계처럼 멈추지 말아야 되고 정확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말하자면 인생은 시계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오늘도 내가 맺은 인연의 길을 시계처럼 가야한다. 째깍거리는 초침의 돌아가는 소리가 내 인생행진의 구령이다. 구령에 맞춰 도보 훈련을 하는 것처럼 쉴 새 없는 정진의 마음으로 내 길을 가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에도 음악의 악보에 나오는 박자처럼 맞춰 가야 할 인생의 박자가 있다. 막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듯이 내 인생의 템포를 맞춰 오늘의 일을 하고 또 내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6월 115호

책과 바보 얼간이

조선조 영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 1741~1793)가 쓴 자서전의 제목이 『간서치전(看書痴傳)』으로 되어 있다. 이는 그가 자신에 대해 직접 쓴 짤막한 기록문인데 무엇보다 제목이 특이하여 호기심을 끌고 있다. 이 말은 책만 보는 바보 얼간이라는 뜻인데 자신을 스스로 비하시켜 붙인 말인 것 같다.

당대의 학자였던 그가 스스로를 책만 보는 얼간이라고 표현한 것은 겸손의 미덕으로 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불우한 생애에 대한 자조의 푸념이 담긴 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서자출신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가난하고 몸이 약하여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겪으며 성장했던 매우 불우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총명 덕택으로 6살에 이미 문리(文理)를 얻고 약관에 박제가, 유득공 등과 어울리며 시를 지어 문명을 크게 떨쳤다. 하지만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많은 수모도 겪어야 했고, 벼슬길을 찾는데도 남다른 설움을 견디어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의 학문적인 실력에 비해 그가 누렸던 벼슬은 고위직이 아닌 중하위의 직책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다른 독서광이었다. 책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지 스스로 말하기를 “배고픔과 추위, 설움과 번뇌, 그리고 기침을 잊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독서로 자기 인생의 한을 풀려했다고나 할까. 불우한 환경의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책을 읽는데 몰두하였다는 그 정신이 너무나 거룩해 보인다. 그가 얼마나 책읽기를 좋아했는지 다음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책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먼 북쪽 변방의 겨울바람 소리, 먼 옛날의 귀뚜라미 소리가 책에서 들린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두보의 시 귀뚜라미를 읽고서 느낀 감상을 표현한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량이 일반층이나 학생층에서 모두 이웃나라들에 비교하여 현격히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젊은 세대들은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고 학생들은 수험공부에만 시달리고, 일반사람들도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아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를 든다면 옛날의 선비정신이 실종된 부재현상에서 비롯된 일로, 독서로 정신수양을 하려하지 않는 점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옛날의 선비들은 항상 책을 가까이 하고 살았다.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필수적 수신이 바로 책을 찾는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선비정신이란 꼭 문벌이 좋은 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글을 좋아하며 도덕적 품위를 지키려는 이들이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도덕적 소신을 분명하게 지키면서 문(文)을 숭상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글 한자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끝까지 이치를 궁구하려 하였다. 이들은 독서삼도(讀書三到)로써 삶의 영양을 섭취하며 살았다. 독서삼도란 책을 눈으로 잘 보고 입으로 잘 읽고 마음으로 잘 이해하여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또한 책 속에는 스스로를 달래며 위안시켜주는 안심법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물질만능의 배금주의가 된 세상에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유흥과 환락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상대적 빈곤감에 열등의식에 빠져 마음의 수양을 뒷전으로 보내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진 사회가 되었다. 국민의 지적 자산이 감소하는 현상이며, 동시에 사회의 도덕적 자산이 감소하는 현상이다. ‘빵만으로 살수 없다’고 외친 사람이 있었듯이 육체적 탐닉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불교로 말하면 가장 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의 독서량이 다른 종교보다 많다고 할 수가 없다. 팔만대장경을 두고도 읽는 불자가 없다면 독서의 결핍으로 불교가 쇠망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전읽기 등 새로운 독서운동이 불교계 안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사회적 운동으로도 책읽기가 권장되어야 하겠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책을 읽는데 시간을 보내라. 남이 고생한 것에 의해 쉽게 자기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읽고 이를 음미해 볼 수 있는 생활의 정서적 여유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 나의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樂山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7월 제80호

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불교 경전에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사바세계의 혼탁한 모습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는 말이다. 먼저 겁탁(劫濁)은 기근이나 질병 또는 전쟁 등이 일어나 재앙이 그치지 않는 시대의 어려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천재지변이나 인재로 일어나는 각종 사고도 겁탁에 속한다. 견탁(見濁)은 말세가 되면 중생들이 그릇된 사견을 많이 가져 사상이 혼탁하여 세상을 흐리고 어지럽게 하는 것을 말하고, 번뇌탁(煩惱濁)은 번뇌에 의해 혼탁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이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말한다. 중생탁(衆生濁)은 중생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인과를 믿지 않고 악업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그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명탁(命濁)은 목숨의 위협이 많아져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비명횡사(非命橫死) 하는 것 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오탁이 만연한 세상을 예토(穢土)라 하고 이 예토에 부처님이 출현하여 예토를 정토(淨土)로 바꾸어 주는 것이 부처님의 일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일, 불사(佛事)를 하면 부처님의 세계가 이루어져 사바세계의 괴로움이 극복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불교의 종교적 이상을 제시한 고답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이 사는 삶의 본질적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말이다.

간혹 ‘우리는 세상이 왜 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불안하게 느껴지는가’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이때 경전에서 설한대로 오탁악세니까 그렇다고 치부해 두기는 너무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이 든다. 우리들 마음속에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모든 재앙이 사라지고 생활의 위협이 없는 안락하고 즐거운 세상, 곧 극락의 세계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임에도 인간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업의 장애가 있어 스스로가 질곡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모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살펴 볼 때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인간 상호의 마음 사이에 문제가 걸려 있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일어난 한 생각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상반된 주장이 서로 굽히지 않고 대립하여 힘겨루기를 하는 통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 되어 제 3자가 어떤 절망을 톡톡히 맛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처신이 자기 인격을 위배하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내 행동이 내 인격을 위배하고 일어나 주위 사람들의 원성을 사는 수도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 이것들은 모두 자기 인격의 본체인 마음에 이상이 생겨서이다. 자기의 참 마음을 모르는 미혹이 양심부재현상을 낳고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 무면허 운전사의 난폭운전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에 남을 해치는 위협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에는 스스로의 양심이 부여하는 도덕적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이 자격증이 갖춰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무면허 운전자가 되어거나 음주 운전자가 되어버린다.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되어 불안을 야기하는 장본인이 될 때 내 존재의 가치는 빙점이하로 내려가 마이너스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은 이 세상에 없다.

천하를 주유하면서 유세를 다니던 공자가 구곡주(九曲珠)라는 구슬을 가지고 있었다. 구슬 속에 아홉 구비의 구멍이 뚫어진 구슬이라 하여 구곡주라 불렀다. 공자는 항상 이 구슬에 어떻게 하면 실을 꿰어 관통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홉 구비의 구멍으로 실을 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어느 날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공자는 혹시 이 여인이 구슬에 실을 꿰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도 가지고 있을까 하여 물어 보았다.

“이 구슬에 아홉 구비의 구멍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실을 꿸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여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조용히 생각해 보시오.”

어떤 비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성인 공자에게 필부인 뽕따는 여인이 조용히 생각해 보라고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어떤 충격을 받은 공자는 심사숙고하다가 마침 개미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때 공자는 “옳다!”하고 탄성을 지르며 구슬구멍 한쪽에 꿀을 넣어 두고 개미허리에 실을 매어 반대쪽 구멍으로 개미를 들어가게 했더니, 드디어 구곡주가 실이 꿰져 관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은 조용히 생각하면 나온다. 내 마음속 진심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을 준다. 왜냐하면 내 마음 안에는 이미 그 답이 본래부터 준비되어 있었고 또한 문제 이전에 답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자기 질문을 거짓 마음의 망심에게 묻지 말고 항상 진심에게 물어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10월 제 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