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중지해 보자

오늘날 고도의 문화가 발달된 현대사회에서 그때그때 우리에게 전개되는 어떤 상황이 몹시도 우리들의 신경을 자극하는 사례가 많다. 정보사회에 있어서 날마다 듣는 뉴스 하나가 사람의 기분을 바꾸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예를 들면 매일 매일 변동하는 주가지수라든지 환율변동이 사람 마음에 희비를 달리 느끼게 한다. 듣고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소식도 있고 모처럼 반갑게 들리는 의외의 소식도 있다. 매스컴이 발달하고서부터 우리에게 전달되는 각종 보도의 내용에 따라 때로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시청각의 대상이 증폭되고 있는 문화현상 때문에 사람이 말초적 자극을 더 많이 받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고 듣는데서 오는 결과적 반응이 신경과민이 되거나 어떤 선입견이 만들어져 그릇된 판단을 유도하는 계기가 되고 마는 경우도 있고 또 보고 들은 것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 복잡해지며 때로는 불안이 가중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리하여 의식이 혼란해지면서 감정의 질서를 잃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을 번뇌에 시달리는 존재로 설명하는데 이 번뇌라는 것이 객관경계에 무심하지 못하고 경계의 지배를 받아 마음에 좋고 싫은 감정의 흔들림이 일어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모두 보고 듣는 객관 경계를 판단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 불교의 정설이다.

사람의 마음은 지적인 작용과 정적인 작용에 의한 인식이 일어나면서 언제나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업무를 가지고 있다. 우선 내 뜻에 맞고 안 맞고의 판단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만들고 이것이 응고되어 괴로움과 즐거움을 만든다. 그래서 객관경계에 의해 내가 괴로워지면 이는 역경계(逆境界)가 되고 뜻에 맞아 즐거워지는 것은 순경계(順境界)가 된다. 이 역순의 경계 때문에 삶에는 끝없는 애환이 따르는 것이다.

상황판단을 잘 하고 산다는 것은 생활의 지혜라 할 수 있지만 판단은 언제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심적 부담을 안고 있어야 한다. 또한 사람은 사사로운 개인의 입장을 앞세워 이기적 에고이즘에 입각한 판단으로 진리에 부합하는 양심적 판단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곧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할까 하는 입장변명을 위해 우선 말의 합리성부터 찾으려 한다. 또 턱없이 남의 일에 일방적인 편견을 가지고 비평을 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자기 논리를 과시하려는 경향도 있다. 때로는 누구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일부러 고의적으로 반론을 전개하여 자기주장이 타당한 냥 한다. 그리하여 인간사회에는 항상 논설시비가 있다.

그러나 이 논설시비는 인간적 순수의 모습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순수는 논리적 시비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나 어떤 이즘이 사회적 개혁의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삶 자체의 순수는 아니다. 텅 빈 허공이 개조될 수 없는 것처럼 삶 그 자체의 순수는 어떤 인위적 조작으로 고쳐질 수 없다. 자기의 삶을 조용히 음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내면을 향한 조용한 응시만 있을 뿐이다. 세상을 평하는 세평의 언론이 아무리 범람해도 말없는 침묵 속에 조용히 보고 있는 숨어 있는 응시자들이 있다. 결코 방관자이거나 은둔자라고 할 수 없는, 말하자면 무심의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판단을 중지하고 산다. 남의 일을 함부로 쉽게 평하지 않는다. 이들이 오히려 인간의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무심(無心)으로써 유심(有心)을 대하고 무정(無情)으로써 유정(有情)을 대한다. 때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업의 양이 많아져 가는 문명사회는 행업(行業)의 포화현상이 일어나면서 부딪히는 소리가 많다. 동적인 모션이 팽창하고 발설되는 언어의 양이 증가하며 머리 속의 생각도 이 생각 저 생각이 항상 포화상태가 된 가운데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이 상충하고 있다. 침묵의 여백이 줄어들고 생각의 쉼이 없어진다. 심신의 노고가 풀어지지 않고 조화롭지 못한 상태에서 불만과 허탈감이 증폭이 된다. 이리하여 사람의 정신환경이 불우해져 버린다.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무심공부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의식을 멈추게 해보는 일이 무심공부다. 판단을 중지하고 가만히 두고두고 생각해 보면서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고 일어나는 생각들을 여과해 보는 일이다. 원증(怨憎)의 감정에서 벗어나 평등한 본성으로 돌아오는 일, 이것이 바로 진리의길 에 나아가는 일이다.

떨어진 꽃잎은 뜻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라 가지만 洛花有意隨流水

흐르는 물은 무심히 꽃잎을 떠 보내네. 流水無心送洛花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3월 제64호

커피 한 잔의 인사

일이 있어 다니다 보면 낯선 사람을 만나 우연히 인사를 받는 수가 있다. 인간관계는 참으로 미묘한 면이 있어 나는 모르지만 상대는 나를 아는 수도 있고 반대로 나는 아는데 상대는 나를 몰라보는 수도 흔히 있다. 아마 연예계에 종사하는 유명한 스타나 탤런트, 이런 분들은 영화나 TV드라마 혹은 언론 매체를 통해서 얼굴이 많이 알려지고, 또 유명한 정치인이나 예술인, 작가 등도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처음 만나는 사람을 자신은 모르지만 상대방은 알아보는 수가 꽤 많을 것 같다.

특정한 모임이 아니더라도 낯선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아무래도 이것이 인간의 예의범절뿐만 아니라 인격적 수양이 앞선 사람의 처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무어니 해도 사람 사는 사회의 분위기는 사람끼리의 친화력이 높을수록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 한다.

구조주의를 주창한 프랑스의 석학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 박사는 인간사회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라는 말을 썼다. 뜨거운 사회란 사람의 가슴이 뜨겁다는 뜻이고 차가운 사회란 사람의 가슴이 차갑다는 뜻이다.

그는 원시사회가 뜨거운 사회였다 하고 현대문명의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고 말한다. 그것은 문명이 발달된 사회일수록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해지며 남에 대한 배려도 없어져 냉정한 비판은 잘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체온을 나눠주지 못하는 가슴의 온도가 차가워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명사회에 들어와서는 사람과 사람의 유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상호 협력이 어려워지는 시대라 하였다. 이러한 말을 통해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에 친밀감이 나눠질 수 있는 인간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가슴의 온도를 높이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벼운 인사말 한 마디가 사람을 친하게 만들 수도 있고 웃는 낯으로 부드러운 표정 하나 지어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보시할 수 있는 길이 일곱 가지가있다는 [잡보장경]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 말씀도 있다.

온화한 얼굴로 남을 대해 주는 것을 화안시(和顔施), 부드러운 말 한 마디를 해 주는 것을 언사시(言辭施), 고운 눈매로 상대방을 보아주는 것을 안시(眼施),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시(指施), 남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을 좌상시(座床施),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가파른 길에서 수레를 잠시 밀어주는 일은 신시(身施), 그리고 남의 일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거나 성원해 주는 것을 마음으로 베푸는 심시(心施)라 하였다. 이러한 칠시(七施)의 가벼운 이타행에서 사람 사이가 친해지고 사회가 밝아지는 것이다.

지난 주 KTX 기차를 타고 서울서 내려오던 중, 뜻밖으로 기차 안에서 커피 한 잔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얻어 마신 적이 있다. 졸다 깨어보니 기차는 김천구미역을 지나 대구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 자리에 앉아 있던 4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마침 지나던 판매 승무원으로부터 커피를 한 잔 사서 자기는 먹지 않고 나에게 드리라 하면서 한 잔을 사 주는 것이었다. 우선 나는 고마워하면서 그 분이 불교신자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내가 고맙다고 했더니 그분은 역시 내게 합장을 하였다. 커피 한 잔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때 감동스런 고마움을 느꼈다. 그 신도님은 동대구역에서 내리면서도 내게 합장을 하고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도 하였다.

이날 나는 커피 한 잔의 인사 때문에 하루 종일 고마움을 느꼈다. 이 경우는 물론 나는 그 분을 몰랐지만 혹 그분은 나를 알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불자이기 때문에 내가 스님이라 단순한 호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어떤 인연의 계기가 있었던 간에 그분은 내게 친절을 베풀었고 나는 친절의 호의를 받은 셈이다. 이러한 단순한 인사의 공간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질 때 감사의 마음이 되면서 순수한 감동이 은연중 일어날 수 있는 것이리라.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사와 안부는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들며 아무리 자주 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분명 인사와 안부를 자주 나누면 사람 사이가 더 가까워져 친해 질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3월 136호

청산에 흐르는 물처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산과 같고 물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산심수심(山心水心)이 될 때 내 마음 그대로가 자연에 순응된 가장 편안한 마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산수 속에서 계절을 느끼고 살다 보면 산과 물이 그렇게도 고마우며 절친해짐을 느낀다. 산수는 이 세상의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다.

또 산이 있으면 계곡이 있고 계곡엔 언제나 물이 흐른다. 그리고 철따라 꽃이 핀다. 무릉도원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셋이 잘 어울려지면 자연이 빚어내는 최고의 예술인 무릉도원이지 싶다. 물 흐르고 꽃이 피는 미묘한 작용을 산은 끊임없이 나타내 준다. 특히 우리나라의 산은 사계의 정서가 뚜렷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철마다 수많은 회포를 자아내게 한다. 우리 같은 스님들이 출가를 하여 절에 와 사는 것을 산에 들어갔다 하여 입산(入山)이라 말하는 것처럼 산은 또한 수도처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산에 와서 살면 누구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도인처럼 살아진다.

세속의 복잡한 경계를 떠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인풍이 몸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산에 오래 살면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달라지고 인생을 음미하는 맛도 세속과는 달라진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산은 자연의 무한한 깊이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무한한 삶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해 주는 부처와 같은 진리의 교육자이기도 하다. 산을 의지해 살면 인생의 영욕이 쉬어지며 세상의 시비가 쉬어진다. 애증도 사라지고 욕망과 분노도 사라져 산처럼 아무 할 말이 없어진 자신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산은 세상에 대한 불만을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라 하고 서운하고 못마땅한 일에 대한 것들을 어서 체념하라고 가르친다. 항상 은인자중의 미덕을 암시해 주는 산은 그러나 물의 순리를 가지고 물처럼 살라고 가르쳐 주기도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가장 좋은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아래로 흘러가면서 순리에 따라 만물을 적셔 주는 물의 공덕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본받을 만한 것이라는 말이다. 또 솟아나는 샘물처럼 마음을 쓰라는 말도 있다. 지혜로운 생각, 자비로운 생각이 샘물처럼 솟아나 남에게 적셔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진선진미(盡善盡美)한 최상의 공덕이요 정신적 가치일 것이다.

어떤 때는 계곡에 들어가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면서 하염없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물을 통한 사색도 수분이 되어 내 마음 곳곳을 적셔준다는 감상을 자주 느낀다. 청산리 벽계수의 맑은 이미지에 순수를 향한 간절한 소망 같은 것이 정연기(淨緣起)가 되어 일어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의식보다는 관조자의 눈이 되어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골짜기의 물이 그냥 흐를 뿐이듯이 생각도 그냥 흘러 가다가 무심의 둑을 만나 이런 저런 사념을 빠져나오면 물은 절로, 절로, 그렇게, 그렇게,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산은 가만히 있고 물은 흘러가듯이 세상은 자연의 이법에 의해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다. 조선조 중기 문신 김인후의 시조처럼 산절로 수절로의 여운을 생각해 본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 절로 하리라.”

생각해 보면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시간의 진행을 따라 부표처럼 떠서 움직이는 것이 인생사의 사연이 아니겠는가? 숱한 애환과 때로는 분노로 점철된 생애를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 할 숙명 아닌 숙명 앞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도를 향한 무심을 품고 산을 보고 물을 들을 뿐이다.

“청산은 티끌 밖의 모습이요(靑山塵外相)

밝은 달은 선정 속의 마음이네(明月定中心)

꽃을 보고 색의 공함을 깨닫고(看火悟色空)

새소리를 들으며 듣는 성품을 밝힌다.(聽鳥明聞性)

어느 노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무심(無心)으로써 유심(有心)을 대하고 무정(無情)으로써 유정(有情)을 대하라.”

그리고 유명한 선시의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려 본다.

落花有意隨流水 떨어진 꽃잎은 뜻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라가는데

流水無心送落花 흘러가는 물은 아무 생각 없이 꽃잎을 보내 주누나.

산골짜기 계곡물에 떨어진 꽃잎이 떠 흘러가는 것을 보고 지은 시구이다.

인생이 꽃잎이라면 이 세상은 흐르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4월 제1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