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높은 데를 먼저 비춘다

새해가 되면 연하장을 돌리며 인사를 전하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 상호간에도 덕담의 인사를 나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 인사말이 우리말 인사로서는 단연 최고의 인사말이다. 복 많이 받으라는 건 행운을 맞이하라는 말임과 동시에 소원을 이루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덕담의 인사를 받으면 우리는 그 순간만이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새롭게 자기 일을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이 생기며, 이 마음에는 항상 희망이 실리게 되고, 또 이 희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오늘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다. 올해의 소망들이 모두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보자.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기다리며 또한 내 자신이 무엇의, 누군가의 기다림의 대상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다. 내 존재의 영역에는 언제나 능동적 기다림과 수동적 기다림이 사람의 두 발처럼 동시에 서 있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시간의 진행을 따라 가고 있는 통과의 연속이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쉼 없이 가고 있는 런닝머신이다. 오늘이 하나의 통과점이며, 내일 또한 하나의 통과점이다. 무수히 통과되는 점 위에서 내 스스로가 부여하는 특별한 의미를 두고 어느 점을 맞추려 하고 그 시점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래서 본의가 있든 없든 내 인생은 언제나 기다리는 인생이 되어 있다.

인도의 명상 시인 타고르는 인생은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기다림이라 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그의 시에서 했다.

“죽음이 그대를 찾아 올 때 그대는 죽음의 손님에게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것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 죽음의 손님 손에 들려 보낼 것입니다.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삶이란 하나의 가치 추구”라는 뜻이 담겨 있는 시구이다. 일반적으로 세속적 가치추구의 대상을 복이라 한다면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에게도 복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삶의 가치는 그대로 죽음의 가치와 일치된다는 뜻이다. 생애에서 아름답고 빛났던 것은 곧 죽음에게 바치는 선물이 된다. 수도의 분상에서는 복을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삶의 본질적 의미가 회복되면 유루와 무루의 구분은 사라진다.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에 회통되어 삶 그 자체의 진실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 바칠 수 있는 복으로 인생은 모름지기 이 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길을 만들면 통행이 쉬운 것처럼 복도 사람의 마음 위에 닦아진 길을 찾아온다. 불교의 신행을 복을 닦는 길이라 한다. 복은 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짓는 사람에게 먼저 오는 것이다.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에서 오기 보다는 마음을 바르게 써서 좋은 인연을 만드는 데서 복은 온다. 좋은 인연을 만들려는 노력을 불교에서는 신심이라 한다. 믿는 마음이란 마음을 바로 쓰는 마음이다. 부처님은 이 믿음이 진리의 근본이고 복의 어머니라 하였다. 복을 지어 복을 주자. 그 것이 내가 복 받는 일이다. 어떻게 복을 지을까?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도와주는 일을 하자. 가족끼리 좀 더 정성스러운 마음을 발휘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어 기뻐하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행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 어울려지는 데서 생긴다. 다시 말해 행복은 평화의 공간이 마련되어야 깃든다. 사람에게 체온이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는 정성지수가 있다. 정성의 도수가 높을수록 내게는 삶의 에너지가 많이 비축된다. 자기 인생에 바치는 정성의 도수가 일정한 기준 이상으로 향상되어 올라간 것을 신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심은 자기 인생의 정성지수임과 동시에 인격지수이다. 고대 중국의 사학자 사마광(司馬光)은 그의 제자 유안세(劉安世)에게 평생 좌우명을 삼아야 될 말을 정성 ‘성(誠)’자의 한 글자로서 가르쳐 준적이 있었다. 내가 정성스러우면 복문이 열린다. 인권이 높아진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칫 정성의 도수가 떨어져 사람대접이 엉망이고 불화의 조장이 심화되는 수가 많다. 신심이 단련되지 않고 헛된 야망에 사로잡혀 오만과 객기를 예사로 부린다. 신의가 없어지고 배타적 아집만 강한 사람이 된다. 이리하여 복인이 되지 못하고 남의 복을 방해하는 사람이 된다.

해가 동쪽 산 위로 솟을 때 산꼭대기 높은 곳을 먼저 비추고 복이 하늘에서 내려 올 적에 신의 있는 사람에게 먼저 온다고 했다. 믿음을 통한 복길을 닦아 많은 사람에게 복을 입혀 주는 사람이 보살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2월 제63호

해는 밤을 말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자기 처지를 하소연 하다가 슬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우연이 절에 왔다 법당에 참배하면서부터 눈물이 흘러내리더라 하였다. 집안의 가족 관계 속에서 오해가 얽혀 누구로부터 모함까지 받고 있어 정말 속이 상해 살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 사람이 혹 또 자신을 비관하고 엉뚱한 마음을 먹을까봐 걱정이 되어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하여 주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나와 남을 이루어 산다. 비록 한 가정의 식구라 하여도 그렇다. 자타가 없이 산다는 것은 법부의 생활 경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네가 있으므로 서로의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므로, 주관과 객관이 나눠진 분별 상태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

번뇌가 왜 일어나는가 하면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번뇌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생각이 움직여 일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흐트러진 마음이 되어 때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수도 허다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중생을 번뇌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번뇌가 얼마나 될까? 흔히 팔만사천 번뇌라는 말도 쓰지만 어디 번뇌가 그것뿐이겠는가? 사홍서원에는 다함이 없는 번뇌를 끊는다 하였다.

그런데 중생이 아무리 번뇌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 번뇌는 우리 마음 전체와 비교해서 보면 우파니사타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이라 한다. 우파니사타분이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말로 가장 적은 극미소(極微小)의 분수(分數)를 말한다. 0에 소수점을 찍어 ‘영점(0.)’하고 0을 수없이 붙이고 나서 마지막에 ‘1’하는 수이다.

“중생의 번뇌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 마음 전체에서 보면 우파니사타분의 ‘1’에 불과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번뇌로 사는 중생들이 번뇌가 없는 참 마음의 진상을 모른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가령 마음을 공간에 비유하여 말하면 우리 마음은 우주의 공간보다 큰 것인데 번뇌가 일어나는 부분은 가는 먼지보다 작다는 것이고, 또 비유하면 망망한 큰 바다 전체가 우리 마음 전체라면 번뇌가 일어나는 마음은 한 방울의 물보다 적어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물의 한 분자보다 양이 적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의 번뇌는 기실 극미량에 불과한 것인데 왜 이 번뇌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또 원망하며 증오하고 사는 것일까?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 이유를 전체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번뇌가 일어나는 마음을 ‘망심(妄心)’ 곧 ‘생멸심(生滅心)’이라 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마음을 ‘진심(眞心)’ 곧 ‘진여심(眞如心)’이라 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진여문’과 ‘생멸문’의 두 문이 있다 하였다. 참되고 한결같은 진여에 들어가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하였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살펴 볼 일이 있다. 내 번뇌 때문에 오늘 내가 불행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다. 남을 흉보고, 욕하고, 비방하고 한 일이 있었다면 오늘 하루의 내 삶이 그만큼 불행했다는 증거가 된다. 문제는 내 본래의 마음 ‘진여심’에서는 흉보고 욕하고 비방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우선은 생각을 고요하고 맑게 하여 전체의 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왜 털끝 같은 극미소의 마음이 되어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가? 이러면 나는 끝내 행복 찾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 마음 전체 속을 들여다보면 내 행복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그걸 못 찾고 못 보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허물일 수밖에 없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물정에 부딪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좁아지면서 자꾸 화나고 싫은 일이 많이 생긴다. 공연히 누군가가 원망이 되고 증오스럽기까지 하다. 이럴 때 정신 차려야 한다. 바로 내 번뇌 때문에 내가 스스로 불행해 지는 때이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끝없는 번뇌가 생긴다. 마음은 본래 태양보다 밝은 광명이라 하였다. 광명 그 자체에는 그림자가 없다.

지구에서는 낮과 밤이 있으나 해에는 밤과 낮이 없다. 언제나 밝은 햇볕이 끝없이 나오는 발광체이므로 해는 어둠을 모른다. 어둠을 모르기 때문에 해는 밤의 사정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음이 해와 같아야 한다. 만물을 밝게 비춰주는 해처럼 남을 대해 줘야 하고 내가 잘 모르는 남의 사정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하면서 흉보고 욕하고 비방해서는 안 된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진실하고 깨끗하여 티가 없는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이네.”

다시 한 번 외워 보아야 할 문수보살의 말씀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1년 1월 122호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다리는 짧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모두가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개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삼라만상이 고유한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소나무는 소나무의 모습이 있고 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의 모습이 있다. 또 학의 다리는 본래 길고 오리 다리는 본래 짧다. 두두물물이 개개의 존재로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이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너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유일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존재의 영역에서 보면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변에 밀려 쌓여있는 모래알이 어느 것도 똑 같은 것이 없다. 비록 디자인과 칼라가 똑같이 만들어진 공장의 제품이 있다 하더라도 낱낱이 자기 값을 가지고 있지, 모양이 같다 해서 특정의 하나에만 값을 매기고 나머지는 값을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는 그 존재만이 갖는 자기 값이 있기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의 가치에 대한 의식이 혼돈되고 있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가치의식에 대한 진정한 견해가 바로 서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고 내 비위에 맞는 일에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남은 좋아 하지만 내가 싫은, 내 비위에 맞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몰가치한 것이라고 엉뚱한 판단을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래서 사람들은 자기 가치만 주장하다가 남의 가치를 빼앗아버리는 일방적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상식적으로 볼 때 가치에는 보편타당한 유용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가치의 우열을 논하며 취사선택을 좋아하는 사람의 그릇된 사고방식 때문에 가치가 전도되어 유용한 것을 싫어하고 무용한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러니컬한 일도 많이 일어난다.

이솝 우화에 사슴과 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침부터 숲속을 돌아다니던 사슴은 목이 말라 샘을 찾던 중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을 발견하고 속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사슴은 물을 실컷 마시고도 그 샘을 떠나지 않고 맑은 물을 들여다보다가 자기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은 나뭇가지처럼 멋지게 사방으로 뻗은 뿔이 아주 근사했고 그건 짐승의 왕인 사자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사슴이 물에 비친 뿔에 비해서 다리가 가늘고 길기만 한 것을 보고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슴은 자랑스러운 뿔도 이 보기 싫은 다리 때문에 자랑하러 다닐 수 없다고 다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이때 어디서 왔는지 사자 한 마리가 샘 가까이에 다가와서 곧 잡아먹으려는 듯 사슴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슴은 뛰는 데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자가 뒤따라 달려왔지만 사슴은 사자의 추격을 피해 멀리 달아나 잡아먹힐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무들이 우거진 숲 사이로 뛰어가던 사슴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난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숲 속이라 빽빽이 우거진 뿔이 걸려 꼼짝 못하고 서 있는 사슴을 보고 사자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뿔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리를 못 생겼다고 생각한 사슴은 그 못생긴 다리 때문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는데도 그 근사하고 예쁜 뿔 때문에 사자에게 잡아먹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이 우화는 인간의 그릇된 가치판단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는 우화이다. 진리의 본질에서 볼 때 이 세상에는 가치 없는 것은 없다. 때문에 구조적 연관성에서 보면 모든 가치는 평등한 동급의 가치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집 한 채를 지을 때 필요한 것은 모두 있어야 한다. 기둥만 있고 서까래가 없어도 안 되며 벽만 있고 지붕이 없어서도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것이 비중이 더 크느냐의 우열이 있을 수 있지만 부분의 역할을 구분하여 볼 때에는 어느 것이나 똑같은 자기 역할이 있는 것이므로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의 조화를 꾀해야 전체의 모습이 살아난다. 내 스스로가 부여하는 진정한 의미가 있는 일이 있을 때 가치는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가치창조라는 것이 삶의 질적인 수준향상이며, 동시에 자신을 개발하는 수행의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 무용지물로 버려진 하찮은 쓰레기도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물로 쓰여 질 수도 있다. 쓰레기 더미 위에서 꽃이 피었다면 그 쓰레기가 썩어 꽃을 피우게 한 거름의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생활을 잘 해가려면 숨어 있는 가치를 찾아내어 응용을 잘 해야 한다. 아직 내 자신에게도 내가 찾아내지 못한 숨어 있는 가치가 있는 법이고 또 내 주위의 내가 처한 환경 곳곳에 찾아내지 못한 숨어 있는 가치가 있다. 가치는 꼭 자로 재는 길이처럼 긴 것이 좋고 짧은 것이 좋지 않다거나 짧은 것이 좋고 긴 것이 좋지 않다거나 하는 상대적 우열 논리가 아니다. 본래평등이라는 말은 획일적인 규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긴 것은 긴 것대로 좋고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좋은 것이 본래평등이다. 학의 다리는 본래 길고 오리 다리는 본래 짧은 것. 그것이 바로 본래 평등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4월 제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