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가꾸고 사는 사람

중국의 고전 『채근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돈이 있는 것도 행복의 하나요,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는 것도 행복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이 부당한 과정이 없이 성실한 노력과 남을 해롭게 하지 않고 얻은 것이라면 이는 정원에 심은 꽃과 같다. 즉 땅에 심어 잘 가꾸어 피운 꽃은 향기가 좋고 그 꽃이 상당한 기간을 오래 간다. 그러나 만약 권력에 빌붙고 모략과 중상으로 남을 해치고 얻은 부귀나 명예라면 화병에 꽂아 놓은 꽃과 같아 오래 가지 못하고 곧 시들어버린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정원의 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행복론을 읽어보면 행복에도 뿌리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 된다. 뿌리라는 것은 식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이다. 더구나 땅속 깊이 박힌 뿌리일수록 그 나무가 가뭄을 잘 이기고 태풍이 불어도 뽑혀 잘 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행복의 뿌리도 꽃의 뿌리처럼 튼튼하게 땅속에 잘 박히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성공하여 살고 싶어 한다. 세상일의 그 어떤 것을 목표로 하던 성공을 원하며 그 성공을 통해 자기 인생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공의 법칙에는 예외 없는 룰이 하나 있다. ‘씨 뿌린 자가 거둔다’는 격언처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이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일어날 때 인연이 만들어져 일어나는데 이 인연을 제공하는 단적인 원인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사람의 마음은 모든 것의 원인을 제공하는 제 일의 인자(因子)이다.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바라볼 때 그 비행기가 사람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생기려면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 속에 지혜의 빛이 들어 있어야 하고 덕의 향기가 풍겨져야 한다. 이때의 심인(心因)이 바로 행복의 씨앗이 된다. 꽃씨를 뿌려 잘 가꾸면 마침내 꽃이 피듯이 좋은 심인을 만들어 잘 가꾸면 반드시 행복의 꽃이 핀다. 이 심인이 바로 인생의 뿌리다. 뿌리는 언제나 땅속에 심어져 있는 것이어서 모양새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눈에 잘 띄는 시각의 대상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심인을 잘 속인다. 스스로에게도 속이고 남에게도 잘 속인다.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미혹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세상의 경계가 사람의 심인이 착하게 심어지는 선근의 뿌리를 자꾸만 약하게 만든다. 때문에 의지가 약해지고 공들이는 일에 인색해져버린다. 돈 안주고 공짜로 얻은 물건이 내게 소중한 물건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공짜는 피 땀 흘린 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몹쓸 인간이 자기 인생을 공짜로 살려는 사람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공을 들여 주지 않고 공짜의 이익을 바란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육신의 목숨은 붙어 있지만 이미 정신적인 자살을 해버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인생은 행복의 뿌리를 잘 가꾸고 살아야 한다. 좋은 결과가 맺어진 행복을 초대하기 위하여 공들이는 방을 준비하여야 한다. 반가운 손님을 맞아들일 때처럼 정성스레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려야 한다. 뿌리의 착근이 잘되면 찬란한 꽃이 피고 탐스런 열매가 열릴 것이다.

영국의 찰스 다윈이 대서양을 건너다가 심한 풍랑을 만난 적이 있었다. 파도에 배들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때 바다 위에 풀잎 하나가 파도에 떠밀려가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다윈이 생각해 알아본 결과 그 풀이 바다 속에 뿌리를 깊게 내려 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다윈이 깨달은 바가 있어 이런 독백을 했다고 한다.

“삶의 뿌리를 깊게 박으면 세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인연 종자의 뿌리를 잘 발아시켜 그것을 튼튼하게 키워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생애의 의무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

행복은 누구에게나 있다

또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펼치면서 한 해의 모든 일이 고스란히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염원한다. 새해 벽두의 이 염원이 비록 마음속으로 바라는 희망사항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뭔가 잘 풀리고 잘 되기를 바라는 심정은 누구나 똑같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기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을 행복이라 부른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살면서 행복해지고 싶은 것, 이것이 모든 중생들의 보편적인 바람인 것이다.

인도의 말 산스크리트에 수카(soukha)라는 단어가 있다. 건강한 몸과 평온한 정신에서 생겨난 행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수카는 세상을 어떻게 느끼느냐하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심리적 환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괴로운 마음이 되지 말고 편안한 마음이 되자는 자기의 존재방식을 자각하는 뜻에서 이 말을 자주 쓴다. 번뇌를 이고 사는 중생의 삶을 괴로움이라고 불교는 해석하지만 동시에 이 괴로움을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 나는 괴로움 속에 즐거움으로 존재할 수 있고 반대로 즐거움 속에 괴로움으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사람의 심리상태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은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괴로움에 시달리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행복의 지수에는 객관적 평가기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봄이 오듯이 계절이 오는 것처럼 오지 않으며, 남으로부터 선물을 받듯이 받아지는 것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 행복은 내 스스로 만드는 것이란 말이다. 때문에 자기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은 자기 행복을 잘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잠을 자던 애주가가 갈증 때문에 잠이 깨었다. 주방에 나가 술을 찾았다. 마침 반쯤 술이 들어 있는 술병 하나가 있었다. 이 반병의 술을 두고 그 순간에 애주가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해 주는가? 바로 그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풀이 한다. 잠자기 전에 다 마시고 없을 줄 알았던 술이 반병이나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만족과 기쁨이 와 행복한 마음이 되고, 한 병이 채워져 있어야 할 텐데 반 병 밖에 없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는 불만과 아쉬움이 일어나 불행한 마음이 되어버린 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써 불만이 일어나고 만족이 일어나는 인간의 심리를 이야기 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별 것 아닌 데서 별것인양 집착을 하고 사는 업을 가지고 있다. 사소한 것에 어처구니없는 집착을 하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어떤 어머니가 애완용 개를 기르면서 정을 쏟았다가 어느 날 개가 집을 나가 실종이 되어버렸다. 개가 돌아오지 않아 이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가 거리에 나가 차에 치여 죽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자기가 낳은 친 딸보다 개가 더 좋았고 개를 더 사랑한 것 같았다고 본인이 직접 술회했다. 이 이야기도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다. 살다보면 엉뚱한데 마음을 빼앗겨 어리석은 치정에 빠져버리는 수도 많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동경하면서 바라고 있는 이상이 있다면 그 이상이 기실 허망한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가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정녕 이 세상에는 별 것이 없다. 행복이라는 것도 별 것이 아닐 수 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웠으니 이 속에도 즐거움이 있다”고 한 공자의 말처럼 나물먹고 물 마시는 것이 무슨 별것이겠는가? 별것 아닌 일에 기를 쓰고 죽느니 사느니 하다 보니 세상만 점점 험악해지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고요해지고 밝아지고 편안해지면 그만인 것인데 너무 남의 눈치를 보면서 세상을 의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자의식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괴로움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새해에는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생활의 순간순간 행복을 만들어 가자. 반야 가족 여러분, 새해에는 모두 행복해지시라.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널리 인정받고, 그 무엇보다 자명하고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월 제74호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

사람이 권세와 영예를 누리려는 것은 어쩌면 본능적인 욕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잘나고 보아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 인물가치를 평가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러나 잘났다는 것은 매우 속된 말일 수 있다. 남이 하는 짓이 못마땅해 비난을 할 때도 ‘너 참 잘났구나.’ 하고 핀잔을 주는 경우가 있듯이 잘났다고 말하는 것은 도덕적 허물을 두고 탓하는 말이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잘났다는 것은 순수한 말 자체의 본래 의미로 볼 때는 남보다 뛰어났다는 뜻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쪽이 잘난 셈이 되니까 결국 못난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못난 것이 오히려 잘난 것이 되어버리는 역설적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당나라 때 명찬(明瓚)이란 스님이 있었다. 생몰연대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숭산보적(崇山普寂651~739)의 법을 이은 스님으로 되어 있다. 그가 형악(衡嶽)에 살 때 대중들이 운력(공동작업)을 할 때 그는 같이 일을 하지 않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등 게으르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여 대중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천성이 게으른 그는 대중이 눈치를 주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양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대중들이 그를 게으른 스님이라 별명을 붙여 나찬(懶瓚) 혹은 나잔(懶殘)이라 불렀다. 나찬은 게을러 음식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남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런 스님이었으나 그가 가끔 말을 할 때 매우 뜻 깊은 말을 한마디씩 하곤 했으므로 어떤 이들은 그가 대단한 도인이라 생각했다. 그가 남악사에 있을 때 당시 조정에 있던 이비(李泌)가 모함을 받아 남악사에 와 잠시 은거하고 있었다. 이비가 스님의 행동을 관찰해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침내 밤중에 몰래 스님을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말조심을 하시오. 10년 뒤에 재상이 될 것이오.” 이비가 가르침을 받고 감사를 드리고 물러났는데 명찬의 예언대로 10년 후에 재상이 되었다.

또 그가 남긴 일화에 나찬외우(懶瓚煨芋)의 이야기가 있다. 토란을 굽어 먹은 이야기다. 당시 국왕 덕종이 국사를 모실 스님을 물색하다 나찬의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 궁궐로 초빙하였다. 형산의 석실에 은거하고 있을 때인데 사신이 찾아와 “천자께서 명령을 내렸으니 마땅히 그 은혜에 감사를 표하시오.” 하였다.

마침 나찬은 쇠똥을 모아 불을 피워 토란을 굽어 먹고 있었다. 입가가 시커멓게 검정색이 되었고 콧물을 길게 흘려 토란과 함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먹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스님을 향해 사신들이 행장을 꾸리기를 재촉하면서 도와줄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라 했다. 이때 스님이 한 말이 “조금 비켜 서 주시오.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 라는 말이었다. 날씨가 추어 사신들의 그림자가 스님을 가렸던 모양이었다. 나찬을 끝내 국사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덕종은 나찬을 더욱 흠모하게 되었다 전해진다. ‘햇빛을 가리지 말라.’는 이 말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BC324)의 말과 우연히 일치된 말이었다.

인도 원정을 가던 희랍의 왕 알렉산더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났다. 마침 디오게네스는 반라(半裸)의 몸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선생이 훌륭한 철인이라고들 말하던데 무척 가난한 모양이요. 내게 뭐 도움을 청할 것이 없소?” 이때 디오게네스는 일광욕 중이었으므로 알렉산더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왕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전쟁을 하러 인도로 가는 중이오.”

“전쟁을 해서 무엇 합니까?”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더 강하고 큰 나라로 만들 것이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좀 쉬어야하지 않겠소.”

이때 디오게네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쉬려면 지금 당장 나처럼 이렇게 쉬면 되지 전쟁을 하고 나라를 키우고 나서 쉴게 뭐 있겠습니까? 대왕은 쉴 수 없을 것입니다.”

묘한 뉘앙스가 남는 말이다.

때로는 성공주의, 업적주의가 내 인생을 멍들게 하고 망하게 한다.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우리는 편안해지고 밝아져야 한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5월 11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