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잘 되어 주십시오.

얼마 전 직전 반야거사회 회장을 하신 김형춘 교수님으로부터 금년에도 입춘방(立春榜)의 글씨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새해 입춘방을 쓰게 되었다. 김 교수님은 해마다 입춘방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내 주어 인사를 나누며 한 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해 드리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십 수 년을 입춘방을 보내온 걸로 생각된다. 올해는 구정 전에 입춘이 있어 음력으로 치면 엄밀히 기축년이 아직 다가지 않은 때에 입춘이 있다. 양력으로 2월 4일 아침 7시 48분이 입춘 시이다. 춘축(春祝)이라고도 하는 이 방은 원래 입춘 시 전에 붙이는 것으로 되었다. 대문이나 방문 앞 혹은 안방의 벽이나 천정에도 붙인다.

예로부터 써온 말은 대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나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등의 정형구가 있었다. “입춘이 되었으니 좋은 일 많으시고, 따스한 기운 일어나는 때에 경사스러운 일 많으시라.”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와 지시라.”는 다분히 덕담으로 안부를 전하는 말들이다. 물론 입춘대길의 대구(對句)에 만사형통(萬事亨通) 소원성취(所願成就) 들의 말로 짝을 맞추기도 하였다.

남에게 덕담을 건네며 무사 안녕을 빌어주는 이 입춘방의 시세풍속은 또 하나의 미풍양속이라 할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 등 한문문화권의 나라에 두루 있어온 풍속이다.

절에 사는 나는 법회를 할 때 마다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축원을 한다. 부처님께 우러러 고하면서 나 자신의 원을 빌기도 하고 사람들의 개인적 소원을 대신 빌어주기도 한다. 평소에 많은 시은을 지고 사는 나로서는 정말 진정한 마음으로 내가 부처님께 올리는 축원이 불보살의 가피를 얻어내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축원을 한다.

그런데 축원을 해 주고 사는 내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나타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은 평소에 신심 있고 착하고 어진 사람들이 뜻하지 않는 불행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이다. 어떤 때는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왠지 내 체면과 절의 체면이 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불전에 기도도 열심히 하였고, 평소에 착하고 어질게 살았으며, 절에서 축원도 해 주었는데 왜 몸이 아파 일찍 돌아가거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느냐? 하는 그야말로 가슴이 막히는 듯한 난감한 기분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답답한 심사가 되는 때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길흉화복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 있지만 잘되어야 할 일이 잘되지 못하면 축원자로서의 체면은 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수도 있다. 누군가 축하할 좋은 일이 생겼다 하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고 신이 난다. 설사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경우에도 공연히 내 체면이 서는 것 같고 하여 어느 사이 나는 남이 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체면이 서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조크를 하고 싶다.

“ 제발 모두 잘 되어서 내 체면 좀 세워 주시오.”

사람 사는 것이 잘되도록 노력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성공을 기약하며 사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잘되는 방향으로 목표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기에 확실히 내가 잘 될 때 나의 체면도 서는 것이다. 어떤 때는 내가 체면이 없으면 나의 권속도 체면이 없게 되므로 한 사람의 체면이 여러 사람의 체면을 살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개인의 체면이 집단의 체면이 되기 때문이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2월 111호

정 붙이고 정 떼기

얼마 전에 내가 사는 암자에 누가 기르던 애완용 개 한 마리를 버리고 갔다. 어떤 젊은 주부인듯한 여성이 개를 데리고 와 정자에 놀다가 개를 두고 그냥 가버렸다는 것이다. 주인이 깜박 잊고 미쳐 개를 데리고 못간 것이 아닌지 하고 혹 찾아 올려나 기다렸으나 주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우리 절 식구들은 이 개를 주인이 일부러 버리고 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실제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개를 키우다가 집 밖에 갖다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런데 주인 잃은 이 개는 절에 있는 것이 좋은지 우리 절식구들 아무나를 보면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공양간에 있는 송지월이 개가 불쌍하다고 밥을 챙겨주고 했더니 며칠을 잘 놀고 지내고 있었다. 무척 순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개였으나 안 키우던 개를 절에 두고 있기가 내키지 않아 파출소에 갖다 주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마침 어떤 노보살님이 키우겠다고 데리고 갔다 하였다.

그런데 이 개가 절에 일주일 넘게 있었는데 한 번도 짖지를 않고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이 점을 두고 나는 개가 온순하여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했다. 누가 설명하기를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개를 키울 때 이웃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 개가 아예 짖지 못하도록 성대를 제거해 버리고 키운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나는 처음 들었다. 이 말은 들은 나는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짖지 못하는 개를 만들어 그것을 데리고 예뻐하다가 싫증나면 갖다 버린다니 왠지 취미치고는 알 수 없는 취미인 것 같았다. 정 붙여 키우던 개를 왜 버리고 갔는지? 하기야 꽃도 병에 꽂아 두었다가 시들면 갖다 버리니 개라고 못 버릴 것 없지 않느냐 할런지 모르지만 식물과 동물이 똑같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꽃은 시들면 쓰레기가 될 수 있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동물을 쓰레기처럼 취급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이번 일을 통해서 나는 사람의 마음에 정 붙이고 정 떼는 일이 예사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세속적으로 흔히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정 때문에 산다고 한다. 사람의 가슴엔 언제나 정이 서려있다. 불교에서는 중생은 마음에 정을 갖고 산다 해서 정식(情識)이 있는 존재라는 유정(有情)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정 붙이고 정 떼는, 이것이야말로 증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을 잘 붙여야 한다. 정을 잘못 붙이면 결국 내 인생이 틀리게 된다. 정을 붙이는 대상에 따라서 사람의 의식이 달라지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개를 좋아하다 보면 개에게 깊은 정을 주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러다 보면 개가 사람보다 더 좋아지는 수가 실제로 생긴다.

수년 전에 입적한 숭산스님께서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다.

참선수련회를 열던 어느 때 가끔 절(선센터 : zencenter)에 오는 미국인 아가씨 한 사람에게 수련회 참석을 권유하였더니 “자기가 키우는 개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개를 데리고 와 참선 시간에는 절의 후원에 맡겨 두고 정진시간에만 정진하면 된다”고 하였더니 “그래도 되요?”하고는 선 수련을 시작하는 날 개를 데리고 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쉬는 시간만 되면 개를 안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3일간 참선 수련이 계속 되었는데 둘째 날 이 아가씨의 오빠가 절로 전화를 해 와 이 아가씨를 찾았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으니 빨리 와 보살펴 드리라는 부탁이었다. 오빠의 전화를 받은 이 아가씨는 자기는 개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오빠가 다른 사람을 고용해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었다. 숭산스님은 <선의 나침반>이란 책을 내어 이 이야기를 소개 하면서 농담 같은 말을 덧붙였다. 개에 대한 의식이 너무 지나친 이 아가씨는 죽어서 개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토픽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국의 어떤 여성 부동산 업자가 개에게 125억원의 재산을 상속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동물애호가들이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연 사람이 사람 아닌 동물에게 재산을 상속시킨다는 것이 정당한 처사인지는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사람이 왜 지나칠 정도로 동물에게 정을 쏟을까? 사회 심리학자들은 이를 인간 소외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지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외로움과 허전함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편하게 정 붙일 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만족의 정신적 돌파구를 찾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여성들이 애완용 개 등을 데리고 외출을 하는 일은 이제 생활 풍습처럼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는 시민들이 개똥을 치우는 세금을 낸다는 말도 수년 전 파리에 갔을 적에 들은 적이 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개와 고양이가 어린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눈에 뜨인다고 한다. 문제는 일시적인 감정에 도취되어 인륜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우선주의가 아닌 동물 우선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참된 마음에서 우러난 순수한 정은 자신의 참 마음 그대로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을 뗀다는 것은 방편으로 자립을 도와주는 수단으로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을 뗀다는 것은 순수한 정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런 법문이 있다.

“무정으로써 유정을 대하고 무심으로써 유심을 대하라 (以無情對有情 以無心對有心).”

“떨어진 꽃잎은 정을 갖고 물을 따라 흘러가지만 흐르는 물은 아무 마음 없이 떨어진 꽃잎을 보내 주누나 (落花有意隨流水 流水無心送落花).”

확실히 잘못 쓰는 정보다 무정이 나은 것이고 무심이 좋은 것이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7년 10월 제83호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

“물소리는 밤중에 듣는 것이 좋고 산색은 석양에 보는 것이 좋다.”는 말처럼 보고 듣는 것도 적당한 타이밍이 있는가 보다. 만추의 서정이 산색 속에 느껴지더니 어느새 겨울의 문턱을 넘어 잎 진 나무 가지들이 허허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루의 석양처럼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다가오는 산의 모습을 석양 속에 바라보았다. 어쩐지 무상하고 쓸쓸한 감회가 생기며 벌써 겨울을 알려 주는 산의 모습에 공연히 애틋한 연민 같은 것도 느껴진다.

흘러가는 강물의 어귀처럼 세월에도 계절에도 어귀가 있어, 이 어귀에 맞춰진 타이밍이 저무는 석양에 산을 보면서 쓸쓸해져 보았다. 40여 년을 산거인山居人을 자처하고 산에 살아 왔으면서도 또 산이 주는 뭉클한 서정에 관산청수(觀山聽水)의 산락(山樂)이 또 다른 이런 저런 회포로 번진다. 차라리 산에 푹 빠져 자연과 동화되고 싶어진다.

사람과 자연이 가장 친해질 수 있는 것은 역시 산 속에서 산을 보고 물소리를 들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순간을 가장 자연적이고 인간적이라고 표현해 보면 어떨까?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사는 것도 자연일 텐데, 왜 현대에 와서는 사람과 자연이 멀어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친 인공의 문화가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의 이치를 어기고 있기 때문인가?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진리 그대로이며, 사람은 결국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며 사는 것이다. 아무리 문명의 치장을 많이 하고 산다하여도 사람에게도 본래 가지고 있던 자연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불편하고 힘들 때나 허영과 사치가 지나칠 때 사람은 자연을 거스르면서 살아가게 된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

그중에 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절로 하리라.”

조선조 중엽의 문인 김인후(金麟厚)가 지은 자연가(自然歌)라는 시조이다. 산수를 따라 절로 산다는 이 자연의 노래는 자연의 삶 속에 인간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노래한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자연이 없으면 사람의 행복도 있을 수 없는 것일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면서 행복을 누려야 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 자연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연의 사랑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예를 들면 꽃을 꺾는 것과 같은 일방적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 생각으로 자연을 대하는 것은 순수한 자연 사랑이 아니다.

자연 앞에서 나라는 아상(我相)을 세우고 내가 자연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자연에 대한 실례요, 모독이다. 나와 자연이 동격이 되어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 속으로 들어가야 자연과 내가 만나지는 것이다.

사람의 생활이 기계문명의 위력에 눌리고부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순수성이 사라지고 있다. 톱니바퀴가 서로 물고 돌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문명이 자꾸 자연과의 거리를 멀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물자의 생산에 바쁘기만 하여 시간에 쫓기면서 인공의 속력증가가 가장 우선시 되면서 자꾸 시계의 바늘을 보아야 하는 바쁜 시대가 되었다. 산업의 발달이라는 미명아래 자연적이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생활이 이제는 자연에 대한 그리움마저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L.A.세네카는 이런 말을 하였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 말을 반대로 말해보면 자연을 등지고 사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자연적이라는 것이 가식과 위선이 없는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자연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와 닿는 행위를 인간적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는 것을 인간적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도연명(陶淵明)은 시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

“초막을 짓고 인가 근방에 살아도 거마(車馬)의 시끄러움을 모르겠더라. 그대에게 묻노니 어째서 그런가?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지면 어디서 살 던 외딴 곳이요. 동쪽 울타리 밑에 핀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니 산의 기운은 아침저녁으로 아름답고 새들은 물물이 날아든다. 여기에 자연의 이치가 있으니 말하고자 하여도 말할 수가 없노라.”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12월 1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