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깊을수록 미안한 것이 많다

불교신행에 있어서 참회가 매우 중요하다. 그릇된 업을 고쳐가는 지름길이 참회에 있다. 참회라고 말하면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비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도덕적 부담감이 큰 죄의식의 참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르고 지나갈 번한 작은 에러성의 자신에 대한 참회도 있고 남에게 실수한 사소한 잘못을 자책하는 가벼운 참회도 있다. 참회란 범어의 크사마(ksama)의 역어인데 쉽게 말하면 미안해하는 마음이다.

사람이 쓰는 인사말 가운데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에도 예외 없이 다 있다. 인사말이 있다는 것은 언어적 습관을 통해 우리는 때로 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말의 경우 윗사람에게는 “죄송합니다”라고 경어를 써 예를 갖추어 말하면서, 정말 수줍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사과를 하는 겸손한 인사는 스스로의 도덕 수준을 높이는 인격수양의 모범이 된다. 물론 예의로서의 인사가 인륜의 도리를 세워가는 도덕률 제고의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칫 사람들은 이 예를 잃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현대의 사회심리 현상을 보면 도덕적 정신박약증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환자에게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걸려 있는 병을 아예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병든 환자가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 수행은 자각정신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꼭두각시나 허수아비의 삶을 면할 수 없다.

자각정신을 일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참회의 생활이다. 이는 우리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지극히 소중한 친화력과 화합력을 얻게 하는 원동력이다.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불화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이는 어느 누구의 마음에 잘못이 참회되지 않고 나쁜 업력의 기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회는 자기의 업장을 소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시쳇말로 팔자가 좋지 않다는 것이 업장이 두껍다는 말과 뜻을 같이 한다. 때문에 참회는 곧 자기 팔자를 고치는 일이기도 하다.

문명의 세계 속에서 의-식- 주의 고급을 누리고 사는 오늘의 현대인들이 예상외로 고압적이고 딱딱한 주관을 가지고 적대감정으로 남을 대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남을 곧잘 무시하고 예사로 실례를 범하며 예의가 결여된 행동으로 남을 불쾌하게 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강강중생(剛强衆生)이라고 한다. 강철처럼 단단하여 굽어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겸손해 할 줄 모르는 사람, 다시 말하면 참회할 줄 모르는 업장이 두꺼운 중생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으면 자꾸 불화가 조성되어 개인의 가정이나 단체의 사람들이 불화에 빠지고, 그 여파가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 제 잘난 체만 하지 사람 사이에 친화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시비를 따지고 불평을 하는 데는 남에게 뒤지지 않지만 남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데는 아주 인색해져 버린다.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있어도 인생은 경쟁만이 아니다. 물자의 생산에 있어서 경쟁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서는 양보와 겸손이 필요하다. 또한 삶이란 너와 나의 대립적 자존심 경쟁도 아니다. 이해와 포용으로 정신공간을 더 확장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참회는 증오의 마음을 푸는 일이며 자기 자신을 개혁하는 의지를 가다듬는 일이다. 또한 참회는 자기 마음의 정서를 가장 부드럽게 하는 일이다. 어둠을 비춰주는 등불처럼 내 마음의 등불을 켜서, 내 마음속의 어둠을 없애는 것이 참회이다.

내가 미안해하면 상대방도 미안해한다. 상호간에 밝은 마음을 소통하여 믿어 주고 기도해 주는 순수한 인간애가 참회의 정신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 참회의 마음을 놓치고 산다. 맺어진 인연이 주는 의무와 권리가 동시에 있다면 참회는 분명히 그 인연 속에 지켜야 하는 하나의 의무이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해 주는 마음과 똑같은 것이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그대는 자기가 지은 죄를 얼마나 참회하고 왔느냐?”

좋은 일을 얼마나 하고 왔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얼마나 참회하고 왔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인연이 깊으면 참회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8월 제57호

인연의 빚

남에게 돈을 빌려 쓰고 그것을 갚지 못하면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빚은 내가 갚아야 될 하나의 의무사항이 되어 거래상에서의 내 입장을 약하게 만들어 놓는다. 아무래도 빚을 진 사람이 빚을 놓은 사람보다 큰소리를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빚을 못 갚는 딱한 처지가 되었을 때는 채권자에게 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등 사정을 하는 쪽은 언제나 채무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빚은 우선 내 입장을 약하게 만들면서 나를 근심하게 만드는 불안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빚 없이 살기가 매우 힘들다. 아니 사회적 환경에서 볼 때는 우리 모두 빚을 지고 사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금전적 거래에서만 빚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남의 도움을 받을 때 그것을 빚이라 할 수 있고 생활 전반에 걸쳐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은 모두 빚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 사는 일이 빚 없이 살 수가 없다. 공동의 운명을 갖고 사는 공공관계도 모두가 빚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가게를 차려 물건을 파는 사람이 물건 사로 올 사람을 기다린다. 사고파는 상행위를 하기 위해서 가게를 차렸기 때문에 물건 사러 오는 사람이 없다면 가게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가게에 와 물건을 사 주는 사람에게 나는 빚을 지는 것이다. 그 사람 덕분에 내 가게가 유지 되는 숨은 사연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을 뽑는다. 선거에 당선된 정치인들은 투표를 하여 자기를 찍어준 유권자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지지해 준 사람들의 덕분에 당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은 빚지는 세상이요, 빚 갚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된다. 이를 수치로 계산하지 못하는 인연의 빚이라 한다. 사람은 인연의 빚을 지고 산다. 이 빚이 없다면 내가 살 수 없는 것이다.

근래에 나는 식도 역류증이란 병을 앓고 있다. 여름 내내 기침이 나고 가을이 되어도 감기가 낫지 않아 어떤 사람의 권유에 의하여 이비인후과에 가 검사를 하였더니 위산이 넘쳐 식도를 타고 올라와 성대를 때려 성대가 멍이 든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원장님의 설명은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는 것처럼 위산이 성대를 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을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고 했다. 두 달분 약을 먹고 있어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을 많이 하면 또 기침이 나고 음성이 갈아 앉는다. 나는 주로 경전을 강의하며 살아온 업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보통 1주일에 15시간 이상의 강의를 하면서 지낸다. 이곳 저곳 법회에 다니면서 강의하는 때도 많다. 그런데 어떤 법회에서 강의 부탁을 받았을 때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정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되어 정중히 거절을 하면 거듭 부탁을 해 오는 때가 있다. 부탁하는 사람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더 이상 사양거절을 할 수가 없는 경우가 생기더라는 말이다. 더구나 인간관계에서 맺어진 인연이 괄시할 수 없는 입장을 가져오는 수가 있는 것도 느꼈다. 이럴 때 나는 인연의 빚이란 말을 생각한다.

빚이란 어휘는 물론 부담스럽고 괴로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니며 꿀을 핥던 기분 좋은 꿈을 꾸고, 깨어난 뒤에 빚쟁이가 빚 받으러 올 것이 걱정되어 꽃밭을 날던 나비가 현실이고 빚 걱정하는 사람이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가 나왔겠는가? 그러나 인연이 있다는 것은 빚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 인연의 빚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다. 논리로 말하면 빚은 갚으면 되는 것이고 갚도록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적어도 이 인연의 빚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못 갚아도 이 빚을 상기하고, 돈 떼 먹듯이 떼어 먹으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연의 빚은 나를 살려 주는 고마운 것이기 때문이다. 병든 환자의 몸이 수술을 받고 살아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세상은 인연의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빚을 주고받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아름다운 것이다. 인연의 빚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얹어져 있어 잘하면 마음의 빛이 되고 인연이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8년 12월 제97호

인생의 3박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음성도 고와야 하지만 박자를 잘 맞출 줄 알아야 하다. 박자와 음정이 틀리면 노래자랑에서도 띵 하고 불합격의 차임벨이 울려 버린다. 사실은 노래에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다 박자가 있다. 이 박자가 잘 맞춰질 때 일이 잘되며 성공이 기약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이 잘 된 것을 박자가 잘 맞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옛날부터 갖출 것이 다 갖춰진 만족한 상태를 자연환경을 예로 들어 물 좋고, 정자 좋고, 반석 좋다 하였다.

우리의 삶을 영위해 가는 인생의 박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보통 만나는 인연을 두고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세 가지 인연을 든다. 그것은 천(天) · 지(地) · 인(人) 삼재(三才)의 인연을 두고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지역을 잘 만나야 하고 또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때와 장소는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이 설정되는 근본이다. 언제 어디서라는 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시작의 배경이 되고 이 배경에 의해 누구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와 장소가 사람에게 좋은 기회로 작용하고 알맞은 곳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똑 같은 시간과 장소가 사람 따라 그 사람의 업의 작용이 다르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꽃이 계절 따라 다르게 피는 것처럼 시절 인연에 따라 사람이 하는 일이 때에 따라 잘되는 수도 못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때를 잘 만나는 것은 천운(天運)을 잘 만난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역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사주(四柱)를 풀이하여 사람의 평생 운세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 사주라는 것이 연· 월· 일· 시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땅과의 인연은 환경과 사람의 관계로 사람의 정서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령 바닷가에서 성장한 어린이와 깊은 산골에서 성장한 어린이는 그 정서 발육의 상태가 다르다. 물론 도시에서 성장한 어린이와 옛날의 농촌에서 성장한 어린이도 마찬가지다. 지구상에서도 아프리카 열대에 사는 사람과 북극의 에스키모의 생활이 완연히 다르다.

사람을 만나는 인연은 사회공동생활에 있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교류의 장으로 여기에는 실제생활에 있어 손익의 계산서가 따라 붙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사람 잘 만나고 시절 잘 만나고 지역을 잘 만나는 것은 세간법의 3박자가 잘 맞는 일이다.

이러한 박자가 잘 맞는다는 것은 결국 내 인생에 선택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이 잘된 것을 운이 좋다고 말한다. 실로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문제를 안고 산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까 길을 정하는 것처럼 스스로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 어쩔 수 없이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하여 최상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차선의 선택을 하는 수도 있다. 직업을 선택하고 결혼을 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는 이러한 경우이다.

인생의 3박자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3박자가 있다. 이것은 내 인생의 전체 몫이 언제나 3등분으로 나눠진다는 이야기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수의 몫을 셋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 먼저 후천적으로 노력하는 개개인 자체의 능력이 있다. 이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논리이다. 여기에는 불가항력이 없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매우 희망적인 구호를 높이 외칠 수 있다. 능력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운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후천적이고 자신의 문제를 자기 안에서만 관찰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단세포적인 개인의 의지요 소신일 뿐 인생은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생활의 배후에 항상 숨어 있는 것이다.

내 자신도 모르게 몸에 깊은 병이 잠복해 있다면 병에 감염된 것이 결코 내 의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선천적인 업의 습관 따위가 배여 있어 전생의 인연에 따른 과보가 있다는 또 하나의 등분이 있다. 이것은 모두 과거에 내가 어떻게 하였나? 하는 현실 이전의 업인(業因)이 내 현실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현재의 상황이 과거에 지어 놓은 원인에 의한 결과이며, 또 전생에 잘못된 업인이 있었다면 금생의 결과에서 손해를 감수 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일이 어제의 원인에 의한 결과로 오게 된 것처럼 금생의 운이 전생의 원인에 의해서 오게 된다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분명한 인과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또 하나의 등분은 무엇인가 하면 나의 문제가 남과의 동분(同分)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과일 나무가 땅과 물과 공기, 햇빛 따위가 없다면 나무 자체가 살 수 없어 열매가 열수 없듯이 남과의 동분인연을 떠나서 내 혼자만의 성공은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다. 마치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이 유권자의 지지 없이는 당선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남의 도움 없이는 성공하지 못한다. 부부사이의 관계처럼 내조와 외조가 있어야 내 인생의 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생은 분명 3분의 일짜리가 셋이 모여 하나가 되는 3박자의 템포 속에 진행되는 것이다.

일류의 야구 선수가 3할 때의 타율을 유지하는 것처럼 어쩌면 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은 3할의 작용 밖에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둑을 둘 때 흑백이 서로 이기는 경우를 두고 운칠기삼(運七技三)으로 이긴다고 하는 말이 있다. 운이 7할을 따라주고 재주는 3할 밖에 작용을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운 앞에서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공을 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무사히 발사되어 궤도 진입을 발하는 뜻에서 고사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미신이라기보다는 운에 대한 겸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 7월 제1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