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의 무공덕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인 보리달마(bodhi-dharma)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입니다. 그는 520년경 깨달음의 원력으로 중국 광주 남해군에 이르게 되는데, 『전등록』 제3권 보리달마전에 전하고 있는 보리달마와 불법천자였던 양무제의 첫 만남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양무제(梁武帝)가 달마 대사에게 질문했습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로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탑을 세우고, 사경(寫經)하고, 승려들을 출가시키는 일을 수없이 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無功德).”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 일화는 『벽암록』 제1칙과 『종용록』 제2칙 등에도 나옵니다. 달마에 의해 시작되는 새로운 실천적 불교의 특성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일화입니다.

양 무제는 황제로서 평생 수많은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사경을 하고, 승려들을 출가시켜서 불법을 옹호하고 홍포한 불법천자(佛法天子)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법을 위해 평생을 받친 양 무제의 업적을 보리달마는 한마디로 ꡐ무공덕ꡑ이라고 단언해 버렸습니다.

왜, 그는 공덕이 없다고 했을까요?

여기서 ꡐ공덕ꡑ이란 말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복전과는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ꡒ절을 짓고, 보시하고 공양 올리는 것은 복을 닦는 것일 뿐이다. 복전(福田)을 가지고 공덕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공덕(功德)은 법신(法身)에 있으며, 복전(福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법성(法性)에 공덕이 있는 것이요, 견성이 바로 공(功)이요, 평등함이 곧 덕(德)이다ꡓ라고 했고, 『유마경』에는 “깊은 깨달음의 마음(深心)이 곧 진실된 도량이니, 공덕을 증익(增益)하기 때문이다. 심심(深心)이 시도량(是道場)이니 증익공득고(增益功德故)”라고 설하고 있으며, 『위산경책』에서도 ꡒ안으로 깨달음의 마음을 이루는 것을 공(功)이라 하고, 밖으로 편안함을 넓히는 것을 덕(內勤剋念之功 外弘不諍之德)이라고 한다ꡓ고 하였습니다. 즉 불교를 위하고, 혹은 남을 위해서 재물이나 마음으로 베푼다는 것은 복전은 될 수 있어도 공덕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달마는 양무제에게 선불교의 올바른 실천 정신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된 공덕이란 바로 우리 각자가 불법의 참된 도리를 깨닫고, 깨달음의 지혜로 일체 중생에게 진실된 불법을 회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해스님 (동국대강사) 글. 월간반야 2005년 6월 제55호

늦은 저녁이 달다

늦은 저녁

현관 앞 초코허브

눈빛 향기롭다

고마워서,

숱이 많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귓불을 살짝 건들었을 뿐인데

그 아이,

가진 향기를 몽땅, 내 손에 건네준다.

그 손으로 먹는 늦은 저녁이 달다

그래그래, 오늘은 네가

고단한 내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말랑말랑한 스펀지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나온 협궤열차의 기적소리다

정성껏 등피를 닦고 심지를 갈아 끼운 램프 불빛이다

달다. 혼자 먹는 늦은 저녁밥.

文殊華 하 영(시인, 반야불교학당)의 글

눈이 보는 것이 없으니

목무소견무분별 目無所見無分別 눈이 보는 것이 없으니 분별이 없고

이청무성절시비 耳聽無聲絶是非 귀는 들어도 소리가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네

분별시비도방하 分別是非都放下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고

단간심불자귀의 但看心佛自歸依 다만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귀의할 뿐이네

중생은 듣고 보는 성색(聲色)에서 분별과 시비로 세상을 산다. 객관의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망상적 분별을 일으키면서 정작 자기 존재의 정체는 잃어버린다. “내가 나를 모른다”고 하는 선가의 말처럼 자아에 대한 탐구는 하지 않고 바깥의 경계를 따라가면서 시비분별에 종사한다는 말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바깥의 경계를 따라가는 것을 멈추라고 한다. 다시 말해 분별과 시비의 굴속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먼 하늘을 바라보듯이 무심히 이런 저런 탓을 하지 말고 망념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 그대로 있으라는 것이다.

부설(浮雪)거사가 남긴 시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불국사의 승려로 있었던 부설스님이 도반 영조(靈照), 영희(靈熙) 등과 행각을 하다가 두릉동에서 구무원(仇無寃)의 딸 묘화(妙花)라는 여인을 만난 것이 숙세의 업연이 되어 그만 환속을 한다. 묘화가 부설스님에 반하여 그만 상사병에 걸려 다 죽게 되자 이를 낳게 하려고 세속의 정을 받아드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조·영희 등의 비난을 무릅쓰고 세속에 남아 공부를 하였으나, 두 도반보다 도를 먼저 이루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인물이다. 원래 스님의 법호였던 부설이란 이름이 환속한 후에 그대로 불리어 부설거사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3월 제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