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지 않는 죄

“징기스칸, 만약 그에게 열정이 없었다면 그는 한낱 양치기 목동에 불과했을 것이다”

연노랑연둣빛으로 싱그러운 새싹을 틔우는 어느 봄날, 호남선 열차 차창 너머 부드러운 풍경에 무심의 평온을 마음껏 누리고 있던 나는, 어느 증권회사의 텔레비전 광고 한 줄에 모골이 오싹해졌다. 이토록 엄청난 선언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승객들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관심일까? 아니면 무언의 공감과 동의일까? 나는 목적지에 이르는 내내 오늘날까지 인류역사가 예찬하고 있는 징기스칸, 혹은 나폴레옹의 그 ‘열정’과 대다수 사람들이 그저 쉽게 동의하는 ‘한낱 양치기 목동’이라는 말에 대해 거듭거듭 사유했다.

그리고 이후 법회와 강의장에서, 사적인 모임에서 이 광고의 구절을 말하며 소감과 판단을 구해보았다. 대체로 다수의 사람들은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묵했다. 몇 사람은 옳은 말이라고 했다. “나는 그 광고의 한 구절을 동의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 한 구절의 사고를 반성하고 수정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역사는 과거의 오류를 이어 미래에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강한 문제제기에 비로소 몇 사람이 한참을 생각하고서 말했다.

“아하! 그렇군요. 그 열정이란 정복과 천하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전쟁과 살상의 ‘욕망’일 수 있겠군요. 그리고 양치기 목동에게 ‘한낱’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가 않군요. 노동과 노동하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폄하하고 있군요.”

이후, 생각해 보았다. 거의 유전자와도 같은 이러한 집단인식의 전이에 대해. 그리고 얻은 결론은? ‘사람들은 그리 깊게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의 어떤 사안에 대해 분석하고 비교하며 손익을 ‘계산’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감정에 따라 불신하고 ‘의심’은 할지언정, 결코 근본의 이치를 헤아리고 삶의 방향을 세우는 ‘사유’는 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즉, 정보의 분석은 있을지언정 존재의 진실과 사람의 바른 도리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고 살지 않는 것 같다. 사유! 모든 종교를 통틀어 불교만큼 사유를 으뜸가는 실천덕목으로 강조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늘 많이 듣고(聞), 그에 대해 깊이 의미를 헤아려 보고(思), 그것이 진리에 합당하다고 확신이 들면 실천하라(修)고 가르치셨다.

또한 열반에 이르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실천수행에서는 바른 안목(正見)과 바른 사유(正思維)와 바른 통찰(正念)을 말씀하셨다. 당시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나무 밑에서, 혹은 탁발하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가르침의 의미를 깊이 사유하고 음미하며 진리 체험의 희열에 젖었으리라.

그렇다면, 왜 그토록 곳곳에서 사유의 힘을 역설했을까? 그것은 사유가 곧 진리를 증명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참된 이치에 호흡하여 살 때 우리 모두는 행복과 평화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부처님은 늘 제자들에게 거듭 사유하고 사유하여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확립하라고 가르치셨다.

사유의 필요성에 대한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 많은 종교와 사상가들이 백가쟁명하면서 저마다 자기들만이 최고가는 진리이고 고통에서 구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부처님께 찾아가서 여쭈었다.

“모두들 자기들만이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대체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습니까?”

이때 부처님은 누가 옳고 그르다고 답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대략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다. “

절대적 권위를 가진 명망 있는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옛날부터 전승되어 왔다고 해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먼저 깊이 숙고하라. 그것이 이치에 맞는지를,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모든 사람들의 무지와 욕망을 제거하고 해탈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인지를, 그러면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승인한다. 설령 내가 말했다고 해서 진리라고 결정짓지 말라. 나의 말도 의심하고 헤아려보아라”

그렇다. 믿음 이전에, 실행 이전에 전제되는 것이 바로 사유이다. 그렇기에 이치에 합당하기에 믿고 성찰하는 것이며, 행복과 평화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이다. 사유의 힘이야말로 모든 삶의 방향과 몸짓의 근간이다. 그런데 믿음과 명상을 통하여 수행하는 신도들에게서 오히려 진정한 사유를 하지 않는, 혹은 왜곡된 사유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무사유와 왜곡된 판단이 비합리적이고 반생명적인 역사를 만들어낸다. 중세시대 면죄부 판매가 그렇고, 죄없는 여성을 무수히 화형으로 죽인 마녀사냥과 현대의 휴거 소동이 그렇다. 예수님이 최고의 선으로 전파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모두를 평등하게 보듬는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형제를 궁휼하게 여기는 나눔과 비움의 사랑을 실천할 때 천국의 문은 열린다고 하지 않는가? 지극한 상식으로 판단해 보아도 면죄부와 마녀사냥의 허구성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사견에 동의하고 광신적인 만행에 침묵했을까?

성직자와 신자들의 ‘개념없는’ 신앙 형태는 오늘의 문명시대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고 있으며 또한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고 있다. 수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사찰이 무너져라’고 기도하는 목회자들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는다. 쓰나미와 지진대참사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라고 일어난 재앙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 말은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논술고사를 통과하여 대학교육도 받았을 것이고, 정보화사회에 매우 논리적이고 비판적 안목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왜 어처구니없는 비상식에 정상적인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참으로 난해한 현상이 아닌가 말이다.

명상도 자신과 사회에 대한 사유를 가로 막을 위험성이 많다. 당신은 고요한 곳에서, 세상의 번거로운 일 내려놓고서,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응시하고 몰입하면서. 잡념과 욕망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함과 무욕의 자족에 머물면서 미묘한 희열을 경험하게 된다. 명상수행은 매우 좋고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고요함과 편안함에 갇혀 자신과 이웃에 대한 관심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은 그런 관심은 부질없고 세속적 망상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세상 삶의 고통과 모순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통찰하는 일이 명상수행에 방해가 되고 분별심을 조장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부처님에게로 돌아가 생각해보라. 세간에 대한 분석과 통찰, 그리고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한 부처님의 삶을 정밀하게 살펴보기를 바란다.

올바른 사유, 우리를 행복에 이르게 하는 사유를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헛된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욕망이 눈을 가리면 정직한 판단이 흐려지고 무지가 욕망을 충동질하여 또 다른 욕망을 낳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음은, 연민과 자애의 눈으로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라. 그 다음은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의 말과 삶에 편견없이 귀기울이는 성찰을 해야 한다. 이미 그대들도 알고 있듯이,

“묻지 않으면 진리가 내게로 오지 않는다.”

법인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월간반야 2012년 7월 제140호

사람의 목숨은 호흡지간에 있다

“마음의 때가 다하면 영혼이 오고 가는 곳, 생사가 나아가는 곳을 알게 되리라.” 부처님이 한 사문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예, 밥 한 끼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도 도를 모르는구나.”

세 번째로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예, 숨 한 번 쉬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장하다 그대는 도를 바로 알았구나.”

이상은 <사십이장경>에 설해져 있는 이야기이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고 물어 대답을 듣고, 도를 알고 모른다는 판단을 내린 이 이야기는 목숨의 무상함을 알아야 도를 알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지극히 간단명료한 법문이다. 이는 곧 무상을 통해 무아를 알아야 한다는 수도자의 수행관을 명시해 놓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42장으로 되어 있어 경 이름을 <42장경>이라 하는 이경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가장 먼저 번역된 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교경>, ‘치문(緇門)’에 수록된 <위산경책>과 함께 불조삼경(佛祖三經)이라 불려진다.

사람은 태어남에서 늙음에 이르고, 늙음으로부터 병에 이르고, 병으로부터 죽음에 이른다. 그 괴로움은 한량없다. 마음은 괴롭고 죄는 쌓인다. 그러면서도 나고 죽음이 쉬지 않으니 그 괴로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하여 인생이 괴롭다.

또 하늘과 땅, 산, 강 등 천지만상 그 모든 것이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무상과 괴로움, 이 말은 부처님이 가장 자주 하신 말씀으로 경전 속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무상(無常)은 범어 아니탸(anitya)를 번역한 말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무아(無我) 괴로움(苦)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말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도 있다. 사실 불교교리는 무상이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3법인 가운데 ‘모든 것이 덧없다’는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법을 결정하는 첫 번째 도장이다. 무상은 고(苦)와 무아(無我)와 연결되어 불교의 근본 사상적 바탕이 된다. 종파의 구분 없이 불교를 표방하는 근본 색채가 되는 말이다.

<현양성교론> ‘성무상품’에서는 무상의 성질을 세 가지로 설명하면서 일어나는 모습과 없어지는 모습, 그리고 머물러 변화하는 모습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도 무상이었다. “모든 것은 덧없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樂山 지안 큰스님 「불교신문 2801호」, 월간 반야 2012년 8월 141호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사대원무주 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오온본래공 五蘊本來空 오온도 본래 공한 것일 뿐

장두임백인 將頭臨白刃 칼날이 내 머리 내리치겠지만

흡사참춘풍 恰似斬春風 흡사 봄바람을 베는 것 같으리라.

이 시는 승조(僧肇)법사의 임종게(臨終偈)이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맞이한 임종게로서는 일품인 시이다. 승조는 동진(東晋)때 스님으로 당시의 유명한 역경가 구마라습의 수제자였다. 『조론』은 그가 저술한 대표작으로 반야부 경전에서 설한 공의 이치를 논한 책이다. 만유제법이 자성이 없어서 모두가 공한 것이나, 그것은 상대적 공이 아니라 절대적인 묘공(妙空)이라고 주장하여 공을 천명한 내용이다. 이렇게 공에 대하여 철저한 이론을 내세운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수보리처럼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그는 무척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당시 후진의 왕이었던 요흥(姚興)이 그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를 거절해 왕의 노여움을 사 사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흥은 승조의 스승 구마라습을 맞이하여 장안에 머물게 하면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불교를 크게 외호하기도 했는데, 승조법사와는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승조가 31살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조의 사상은 공에 있다. 그는 철저히 공을 체득하여 남다른 경지를 체험한 인물이다. 위의 임종게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사대오온은 육체와 정신이다. 내 몸뚱이가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는 말이다. 마음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도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란 말이다. ‘칼날이 내 목을 내리쳐도 봄바람을 베는 것에 불과하리라’고 한 이 말에서 과연 승조는 공의 달인이라 할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7월 제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