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공산불견인 空山不見人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단문인어성 但聞人語響 말소리만 어슴푸레 들리어 오고

반경입심림 返景入深林 지는 햇살 한 가닥 숲속으로 들어와

부조청태상 復照靑苔上 푸른 이끼 위를 비추고 있네.

시불(詩佛)로 알려진 왕유(王維 701~761)의 시다. 이 시를 읽으면 저절로 귀가 이울어지는 느낌이 일어난다.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중에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도란거리는 말소리에 비로소 닫아 두었던 육근(六根)이 열리면서 주위가 의식되어진다. 숲속 깊이 한 가닥 햇살이 들어와 푸른 이끼 위에 떨어지는 정경이 해가 서산에 가까워진 시간을 읽게도 해 준다.

원제목이 ‘녹채(鹿柴)’로 되어 있는데 녹채란 사슴을 먹여 기르는 나무울짱을 말한다. 왕유가 한 때 망천(輞川)이라는 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은거생활을 할 때 그림을 그리듯이 지어 놓은 시들이 많다. 녹채를 선시의 일품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돈독한 불심으로 선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살은 때문이기도 하다. 32살 때 부인을 사별하고 평생을 혼자 살면서 시심을 불심으로 승화시켰던 사람이었다. 유마거사를 좋아하였고 유마힐(維摩詰) 세 글자가 묘하게도 유는 이름이 되었고, 마힐(摩詰)은 자호로 쓰기도 하였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8월 제69호

비개인 남산에

우수남악권청람 雨收南岳捲靑嵐 비개인 남산에 아지랑이도 걷히고

산색의연대고암 山色依然對古庵 산 빛 의연히 옛 암자를 마주하네.

독좌겅관심사정 獨坐靜觀心思淨 고요히 홀로 앉아 바라보니 마음마저 맑아져

반생견괘칠근삼 半生肩掛七斤杉 이렇게 반평생 어깨에 장삼 걸치고 살았네.

「산당우후(山堂雨後)」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시도 서산대사의 제자인 일선정관(一禪靜觀1533~1608)이 지었다. 비온 뒤 절간에서 산색을 바라보다 심사가 일어나 반평생의 생애를 돌아보며 조용히 심경을 읊어 놓았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사는가 하는 것은 어느 개인의 인생살이의 객관적인 정황으로 화폭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 평생을 산속에 살면서 수도에 종사한 사연 속에도 숱한 애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깨에 장삼 걸치고 살았다고 자기 생의 독백을 내 놓는다.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으면서 승려로서 남다른 고민을 했다는 정관은 전쟁을 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중생의 업보를 몹시 개탄했다고 알려졌다. 업보란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엄청난 악업을 지으면서 도를 어기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생을 헛되게 살고 마는 것이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7월 제56호

불매인과(不昧因果)

중국고사에 800년대 당나라 중기때, 백장선사(749-814)라고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백장선사가 백장산에서 설법을 하는데, 어떤 한 노인이 항상 와서 듣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다른 사람들이 다 물러간 뒤에도 혼자 남아 있기에 백장선사가 궁금히 여겨 물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고 하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나도 과거 가섭부처님 시대에 이 산에서 살았었는데 어느날 학인이 나에게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고 묻기에 나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답했습니다. 그 과보로 인해 500년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자비심으로 제도하여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는 “그대가 나에게 다시 물어보라.”

노인이 다시 묻되, “스님께 묻겠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하되,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불매인과,不昧因果)”고 하였다.

노인이 이 말 끝에 크게 깨닫고는 하직을 아뢰면서 말하되,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우의 몸을 벗어 뒷산 바위 아래에 둘 것이니 불가(佛家)의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루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불락인과’라는 한마디 때문에 여우가 되었던 사람이 ‘불매인과’라는 한마디를 듣고서 어째서 여우의 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는지, ‘불락’과 ‘불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 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셨다면 부처님조차 여우의 몸을 받았을까요?

감히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인과에 떨어지고 안 떨어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치를 환히 아는 사람은 인과에 떨어진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그 도리도 모르는 사람은 “내가 말을 잘못 했나” 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되어 그 의심 하는 자체가 여우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락’과 ‘불매’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미혹으로부터 생겨나는 의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불매는 불락이니 불매니 하는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의 근원적 상황에서 분별의 차원을 초월한 ꡐ불매인과ꡑ라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말이 떨어지기 이전의 자리를 바르게 쳐다보는 정법안목으로 공안을 바로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해스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