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종교배(同種交配) 문화

동종교배(同種交配)란 유사형질(類似形質) 또는 같은 종(種)끼리의 수정 또는 수분을 한다는 유전학 용어다. 동종교배를 반복하면 유전자에 결함이 생겨 결국에는 종이 사멸하는 등 환경변화에 취약해진다. 반대로 이질적(異質的)인 형질간의 교배를 ‘이종교배(異種交配)’ 혹은 ‘잡종교배’라고 한다. 이종교배 1세대에서는 우성형질만 나타나는데 이를 ‘잡종강세’라 부른다. 부모의 강점만을 타고나기 때문에 성장이나, 산란, 수정 등 여러 면에서 부모세대에 비해 우수하다.

이러한 동종교배의 폐해는 여러 방면에서 확인된다. 한 때 외래종으로 우리 하천이나 습지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듯 했던 ‘황소개구리’를 예로 들기도 한다. 확실한 원인을 찾지는 못했지만 결국은 동종교배로 인해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멸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제주도의 말〔馬〕 또한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고는 말을 기를 적지로 보고 사육하였지만 5백여 년이 지난 지금 결국 동종교배로 인해 ‘조랑말’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구촌의 경찰국가로 초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을 두고도 잡종강세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많다. 미국을 세운 사람들 자체가 세계 각지로부터 모여든 이민자들이어서 이들 잡종간의 결혼으로 미국은 전형적인 잡종강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태민족을 잡종강세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유태민족은 지난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전 세계를 떠돌면서 상당히 다른 형질의 민족들과 얽히고 설켰고 그것이 잡종강세로 나타났다고 한다. 천 년 전 신라의 패망을 근친혼으로 인한 지배계층의 퇴화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신라는 성골 진골 등 골품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지배계층을 비롯한 귀족들은 골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골품 내에서만 혼인을 하였기에 근친결혼이 만연하였으니 이야말로 동종교배의 표본이라 할 것이다.

학문의 동종교배도 예외는 아니다. 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학부와 대학원에서 수학할 경우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거치는 동안 내내 같은 교수의 지도를 받으니 이 또한 문제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모 대학에서는 급기야 대학원 신입생의 50%이상을 타 대학 출신으로 해야 한다는 규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인간사회의 조직도 마찬가지다. 한 조직에 오래 근무하다보면 자연스레 그 조직의 논리와 문화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잘 적응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배타적이 되어 다른 조직과 문화를 가진 집단과는 잘 소통하기 어렵다. 이런 게 결국은 사상과 문화의 동종교배일 것이다. 남의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폐쇄된 사회는 쇠퇴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요소들이 엉키고 어우러질 때 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는 효율성만 추구할 뿐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성의 발현은 어렵다. 생각이 다른 사람, 경험이 다른 사람, 전공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야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말로 ○○○ 교우회, ○○○ 전우회, ○○○ 향우회는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KT니 PK니 JK니 하는 용어들이 정치판에서 사라져야 한다. 지연이나 학연이나 혈연이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아니 긍정적인 면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이를 악용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에 o o 회가 개입되었다고 하여 시끄럽다. 사정이나 정보, 인사라인에서 특히 동종교배는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어느 특정인의 지시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은 겉으로는 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외부의 변화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소통을 통한 이종교배로 ‘우성인자(優性因子)’를 키워야 한다. 특히 정책을 입안하는 공직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공유할 때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길 만이 동종교배문화의 우(愚)를 범하지 않는 첩경이 될 것이다.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8월 117호

돌아오신 고 김영성 거사님

지난 7월의 둘째 토요일 오후 영축산 자락 반야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별로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오후 1시를 넘기면서 통도사와 영축산 주변에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오금을 못 펼 정도로 지축을 흔들었습니다. 3시가 지나자 비는 그치고 영축산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운무는 7부 능선쯤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난 3월 가족법회를 마치고 고(故) 김영성 거사께서 여러 법우들과 더불어 올랐던 좌선대 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가 기다리던 고 김영성 거사님의 유해가 생전에 즐겨 타시던 승용차로 반야암 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초파일날 오셨을 때 보았던 초췌한 그 모습이 아니고 아들의 품에 안겨 오셨습니다. 인자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불과 40일전에는 걸어 오셨는데 이번엔 검은 깃을 두른 영정과 보자기에 싸인 유골로 오셨습니다. 더불어 이승에서 그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온 경내를 채웠습니다. 가족들의 흐느낌 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혼(魂)을 법당에 모셔 놓고, 백(魄)을 산천에 모시고자 생전에 망인께서 좋아하셨던 앞산에 올랐습니다. 지난 봄 등산 때 쓰다듬고 껴안고 기대고 하셨던 믿음직한 홍송(紅松)들을 스치며 얼마간 오르다 혼이 배인 영정이 모셔진 법당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에 모셨습니다. 고향 진동(鎭東)에 마련되어 있는 유택도 마다하고 굳이 본인이 이곳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내려와 영축산을 바라보니 다시 운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오시기전에 대지의 오염되고 묵은 기운을 장대비로 하나도 남김없이 씻어 내더니만, 이제 고인이 이 산에 안기고 나니 다시 운무가 이불을 덮듯이 내려 왔습니다. 한시간이 채 못되어 반야암 경내까지도 운무가 날아 왔습니다. 자연의 조화치고는 너무나 신비로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김영성 거사님은 돌아와 편안히 쉬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바세계의 중생은 이승에 무엇이 그리도 미련이 많습니까. 인연 따라 왔다 간다는데 왜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나는 불교를 통해서 사람과 인연을 맺었고, 우리 반야암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번에 가신 김영성 거사님은 남달랐습니다. 법회 날 만날 때마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합니다.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고 하면서 잡은 손의 느낌과, 그 인자하신 표정에서 나는 늘 ꡐ참으로 수양되신 분이구나. 앞으로 가능한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지ꡑ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살면서 남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남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언제나 깊은 믿음과 사랑이 삶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차원 높은 인격을 바탕으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일구어 왔다는 뜻이겠지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가 하면, 남을 배려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와 남이 공존하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을 두고 많은 고민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는 남을 배려하는데 혹은 사업에 무리를 하시다가 육신의 건강을 미쳐 챙기시지 못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간사회는 나 아닌 남의 좋은 것을 사랑하고 좋지 못한 것을 이해로 받아들여 잘못을 용서해 주고 포용하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신 큰스님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하였던 분, 어느 날 말없이 훌쩍 가셨다가 이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신 거사님, 삼가 고 김영성 거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

더없는 행복

교단 생활 자체가 항상 보람과 아쉬움으로 점철되는 일상이지만 요즈음 들어 새로운 안타까움이 있다면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아버지와 자녀의 성(姓)이 다른 학생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자녀 양육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다가 다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 경우와,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자녀를 키우며 살다가 재혼한 경우다. 이런 경우 자녀는 새 아버지(계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 친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현행법으로는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아니 내 좁은 소견으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성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은 ‘피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죽어 이별하는 경우야 그만두고라도, 부부가 혼인예식을 치를 때 서약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파경에 이르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한 가정의 파괴는 인생의 실패로 연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은 전통적 관념이 크게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사회적 성공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다. 그만큼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소중한 것이며,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이 더 없는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리라.

나의 지인 중 한 남자는 세칭 명문대학 인기학과를 졸업하고 언론사에 입사하여 중견간부를 지내고 지금은 쉬고 있고, 그의 부인은 지역 문화예술계의 유명 인사다. 내외가 금슬도 좋고 자녀들도 잘 키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이 친구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이 ‘OOO씨의 남편’이라면 버럭 화를 낸다. ‘내 아내가 OOO이지 내가 왜 OOO의 남편이냐’하는 것이다. 또 한 친구는 지역에서 문단활동과 함께 자타가 공인하는 페미니스트다. 한때는 이름을 쓸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같이 쓰고 자기 이름을 쓰곤 했다. 이 친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OOO의 아내다’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곁에서 듣기가 민망할 정도다. 소개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남편이나 아내 등 가까운 사람을 매개로 하는데 왜 꼭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따지는지 모를 일이다. 누구의 남편이면 어떻고 누구의 아내면 어떤가.

부처님께서도 인생에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더 없는 행복’이라고 설하지 않으셨던가. ‘육방예경(六方禮經)’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를 존중해야 하고 예의로써 대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며, 아내로서의 위치와 안락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또한 아내에게 의복과 보석을 선사하여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 반대로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며, 손님ㆍ내방객ㆍ친구ㆍ친척 및 고용원 등을 잘 접대하여야 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충실하여야 하며,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하고, 모든 활동에서 현명하고 활기차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시대와 사회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부부는 다같이 호혜적이고 평등하여야 하며, 서로를 위해 상호보완의 내조와 외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나아가 사회와 인류를 위하는 ‘더 없는 행복의 길’이 아닐까.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2년 9월 (제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