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의 둘째 토요일 오후 영축산 자락 반야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별로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오후 1시를 넘기면서 통도사와 영축산 주변에선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오금을 못 펼 정도로 지축을 흔들었습니다. 3시가 지나자 비는 그치고 영축산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운무는 7부 능선쯤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난 3월 가족법회를 마치고 고(故) 김영성 거사께서 여러 법우들과 더불어 올랐던 좌선대 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가 기다리던 고 김영성 거사님의 유해가 생전에 즐겨 타시던 승용차로 반야암 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초파일날 오셨을 때 보았던 초췌한 그 모습이 아니고 아들의 품에 안겨 오셨습니다. 인자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불과 40일전에는 걸어 오셨는데 이번엔 검은 깃을 두른 영정과 보자기에 싸인 유골로 오셨습니다. 더불어 이승에서 그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온 경내를 채웠습니다. 가족들의 흐느낌 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혼(魂)을 법당에 모셔 놓고, 백(魄)을 산천에 모시고자 생전에 망인께서 좋아하셨던 앞산에 올랐습니다. 지난 봄 등산 때 쓰다듬고 껴안고 기대고 하셨던 믿음직한 홍송(紅松)들을 스치며 얼마간 오르다 혼이 배인 영정이 모셔진 법당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에 모셨습니다. 고향 진동(鎭東)에 마련되어 있는 유택도 마다하고 굳이 본인이 이곳을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내려와 영축산을 바라보니 다시 운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오시기전에 대지의 오염되고 묵은 기운을 장대비로 하나도 남김없이 씻어 내더니만, 이제 고인이 이 산에 안기고 나니 다시 운무가 이불을 덮듯이 내려 왔습니다. 한시간이 채 못되어 반야암 경내까지도 운무가 날아 왔습니다. 자연의 조화치고는 너무나 신비로왔습니다. 이렇게 우리 김영성 거사님은 돌아와 편안히 쉬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바세계의 중생은 이승에 무엇이 그리도 미련이 많습니까. 인연 따라 왔다 간다는데 왜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나는 불교를 통해서 사람과 인연을 맺었고, 우리 반야암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번에 가신 김영성 거사님은 남달랐습니다. 법회 날 만날 때마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합니다.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고 하면서 잡은 손의 느낌과, 그 인자하신 표정에서 나는 늘 ꡐ참으로 수양되신 분이구나. 앞으로 가능한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지ꡑ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살면서 남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남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언제나 깊은 믿음과 사랑이 삶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차원 높은 인격을 바탕으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일구어 왔다는 뜻이겠지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가 하면, 남을 배려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와 남이 공존하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을 두고 많은 고민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는 남을 배려하는데 혹은 사업에 무리를 하시다가 육신의 건강을 미쳐 챙기시지 못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인간사회는 나 아닌 남의 좋은 것을 사랑하고 좋지 못한 것을 이해로 받아들여 잘못을 용서해 주고 포용하는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신 큰스님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하였던 분, 어느 날 말없이 훌쩍 가셨다가 이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신 거사님, 삼가 고 김영성 거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8월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