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먹고 살지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중국산 유해 음식 파동은 언제쯤 끝이 날까. 냉동 꽃게에서 납덩이가 나오더니 찐쌀에서 표백제 주성분인 이산화황이 나오질 않나, 장어에서 발암물질인 말라카이트 그린이 검출되더니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나왔고, 중국 농심공장에서 들여온 노래방 새우깡에서 생쥐머리가 나오더니 이번에는 급기야 유제품이 들어있는 수입과자 등에서 멜라민이 검출되어 온 세계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하다.

이처럼 중국 발 멜라민 공포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일반 식품 전반에 걸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 들어있는 식품첨가물 때문이다. 식품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멜라민이 들어있는 식품에 대해서는 소비자들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지만 일반 식품에는 별로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비자들은 식품 첨가물의 위해성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적어도 합법적으로 사용이 허가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을 해칠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록 건강을 해한다고 할지라도 짧은 기간에 그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위해성을 증명할 방법도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용이 허가된 식품 첨가물에는 살균제나 일정기간 보존제, 산화방지제, 착색제, 조미료, 감미료, 향료 등 6백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대표적인 식품 첨가물이 당류(糖類)와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는 보존제 즉 방부제가 있다. 이와 함께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 첨가되는 향료와 색소도 유해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딸기와 바나나 사과 등의 주스 종류에도 맛과 향을 내는데는 화학물질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색소도 최근에는 천연색소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널리 사용되는 식용색소는 거의100%가 화학물질이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맛과 향은 화학물질로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참 신기하기까지 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유해한 화학물질로 만들어지는 당류나 보존제, 향료, 색소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식품첨가물을 사용한다면 당장 우리의 혀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건강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무얼 먹고 살아야 할지 불안하다. 당을 과잉 섭취하면 영양불균형 뿐 아니라 심혈관질환, 암, 당뇨병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하는가 하면 비만과 각종 암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방부제 등에 사용되는 ‘안식항산나트륨’은 DNA를 손상시켜 간경변이나 파킨슨병을 유발한다고도 한다. 우리네 일반 소비자들은 물질의 성분은 물론 그로부터 야기되는 병명도 모른다.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불량식품이나 부정식품, 위해식품을 모르고 산다. 단지 식품은 100% 안전하고 완전한 것이 없을 것이니까 적당히 따지고 그러려니 생각하고 먹는다.

바라건대 현재의 과학적 기술을 통해 최대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식품제조업자나 연구자, 식품위생법을 집행하고 있는 관계기관은 가공식품을 개발ㆍ생산하고, 소비자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소비자의 무지를 악용하는 악덕업자, 적어도 국민의 먹거리를 가지고 장난치는(?) 자는 법 가운데서도 가장 엄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말만 화려한 식품안전 대책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전시행정이 아닌 진심으로 국민의 건강을 걱정하는 조치가 나와야 한다.

일찍이 세존께서는 ‘파바’ 마을에서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받아 ‘스카라 맛다바’란 요리를 드신 것이 발병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열반하셨지만 입멸 직전 아난다를 통하여 ‘춘다’를 위로하게 하셨지 않은가. 춘다의 마지막 공양으로 ‘남김 없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에 드셨다’는 것이 세존께서 부여하신 의미이니 그 정성과 의도를 높이 평가한 것이리라.

香岩 김 형 춘 (반야거사회 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8년 11월. 제96호

매미의 교훈

여느 해처럼 명절이 지나면 다들 반가운 얼굴로 “명절 잘 지내셨습니까”라는 인사 대신 “태풍 피해 없었습니까”로 바뀐 올해의 추석이었다. 한마디로 ‘어떻게 이럴 수가’할 정도로 철저하게 당했다는 생각이다.

내 무딘 기억이지만 태풍하면 ‘쎌마’니 ‘루사’니 해도 1959년 추석에 불어닥친 ‘사라’만큼 놀란 적은 없었다. 밤새 내린 폭풍우 때문인지 추석을 맞는 설레임 탓인지는 몰라도 다른 날 보다 일찍 방문을 열고 나오니, 마을 앞의 둑이 무너져서 앞들의 벼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사립문을 통해 마당으로 버얼건 황토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게 아닌가. 물은 계속 불어나서 축담까지 올라오고 우리집보다 낮은 앞집에서는 담장을 무너뜨리고 황급히 우리집으로 식구들을 대피시키는 등 난생 처음 물난리를 겪었으니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태풍’ 하면 ‘사라호’라는 기억 밖에 없다. (그때는 ○호 태풍 ‘사라’라고 하지 않고 그냥 ‘사라호’라 하였음). 아마 ‘사라’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은 훗날 태풍 이야기가 나오면 태풍 ‘매미’를 기억하겠지만.

생활고와 경기침체로 사회적 살인이라는 집단자살ㆍ동반자살이 유행처럼 번지는 등 뒤숭숭한 가운데 맞은 추석은 태풍 매미덕분에 그야말로 한반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무너져 내린 산, 뻘밭으로 변한 논밭, 쓰레기장이 된 하천과 도로, 주저앉은 집, 도심의 길가에 나둥그러진 원목, 도심의 도로에 드러누운 배, 어시장 근처의 고기 썪는 냄새, 넘어진 철탑, 과수원의 떨어진 낙과를 보며 통곡하는 아낙네, 진흙투성이의 논에서 쓰러진 벼포기를 등지고 먼 산을 바라보는 농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절규 등 한마디로 참담함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피해는 기실 예고된 것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태풍이 오지 않은 여름이 있었던가. 집중호우와 산사태가 없었던 해가 있었던가. 제방이 붕괴되고 도로가 유실되는 피해가 올해만 있었던가. ‘매미’가 빠른 속도로 날아온다는 기상특보는 농담이었던가. 뻔히 당할 줄 알면서도 요행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수십년 반복되어온 재해를 왜 우리는 그냥 보고 당해야만 하는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국민들의 안전불감증과 미봉적이고 임시방편적인 대비책으로 또 우리는 불안한 내년 여름을 맞을 것인가. 이제 우리 국민은 눈물겨운 피해상황을 더 이상 보고싶어 하지 않는다. 확실한 재난 극복을 위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재난방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실천하는 것을 보고싶을 따름이다. 정치논리에 희생되고 휘둘리는 재난방지대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형춘 글 / 월간반야 2003년 10월 (제35호)

말을 아껴야

작년 초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정치나 사회는 지도자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말미암아 계속 평지풍파가 일고 정쟁으로 연결되었다. 여야와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들고, 상대를 공격하고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지는가 하면, 차마 해서는 안 될 수준의 말까지 하고 나면 당사자의 해명성 발언이 나오고는 진정이 된다.

사뭇 조용해지면 호사가들은 이맘때쯤 ꡒ또 무슨 말이 나올법한데ꡓ 하면서 기다리기라도 하는 분위기까지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가야할 길은 바쁜데 말로써 말이 많아지고 국론이 분열되며 소모성 논쟁만 가중되니 가히 말은 아랫사람이나 윗사람을 막론하고 조심해야 될 일이다.

고려 말의 고승 나옹(懶翁) 혜근(惠勤) 스님은 ꡒ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ꡓ 하시면서 수행자에게 가장 조심해야 할 과제는 ꡐ말ꡑ 조심을 하라고 읊으셨다. ꡒ입이 바로 화를 부르는 문(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이요, 혀가 바로 몸을 베는 칼(설시참도신․舌是斬刀身)ꡓ이라 하지 않았던가. 우둔한 사람의 마음은 입밖에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입은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곧 바로 반박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없이 교만해져서 기분대로 말을 내뱉고 난 뒤 후회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말실수를 해서 다른 사람과 시비를 하려 한다고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게 무얼까.

예로부터 수행자는 남의 일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수행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네 가지(사의재․四宜齋)에서도 ꡒ생각은 맑게 하고 용모는 엄숙하게 하며 언어는 과묵하게 하고 동작은 신중하게 하라ꡓ고 했다.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 중에서도 입으로 비롯되는 업이 가장 무서운가 보다. 그러기에 천수경의 첫머리에 구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정구업진언․靜口業眞言)이 나오지 않는가.

통도사 큰절의 여름 안거 입재 법어에서 ꡒ안거 중 수행을 통해 무엇을 얼마나 얻으려고 하지 말고, 얼마나 버리고 비울 것인가를 고민하라ꡓ고 당부하신 글을 읽었다. 우리가 입을 자주 열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세속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진 것을 버리고 비우고 돌려주기 위해서라면 굳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나무관세음보살.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9월 제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