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주의(物神主義)에로의 질주

내가 근무하는 직장과 바로 이웃하여 ‘창원컨벤션센터(CECO)’ 가 있다. 학교의 후문과 CECO의 출입구가 같기에 가끔씩 짜증스럽고 당황할 때도 있다. 예사로 생각하고 평상시에 다니던 대로 드나들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큰길가에 펼침막이 많이 달려있어도 이런 행사가 있구나 하는 정도지 정확하게 날짜를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주차공간이 부족하여 온통 도로가 주차장이 되는 것이다. 어쩌다 외출하였다가 강의시간에 임박하여 들어오다가 차량들 속에 갇히게 되면 낭패를 당할 수밖에.

그런데 이런 성황을 이루는 행사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기에 또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그런데 CECO가 개관된 지 몇 년쯤 지나니까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듯이’ 행사 제목만 보아도 ‘정문으로 다녀야 할지, 후문으로 가도 괜찮을지’를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 어떤 행사에 인파가 많이 몰리는지 터득을 했다는 말이다. 대충 보면 건설 자재ㆍ자동화 기계ㆍ로봇ㆍ자동차 부품ㆍ해양조선 기계 등 산업현장과 관련이 있거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ㄹ모 가수ㆍㅈ모 가수나, 비보이 같은 팀들의 공연이 있으면 주변 일대가 괴롭다. 무슨 총회 행사나 세미나 등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이 시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 앞의 행사들은 물질적 풍요 추구와 직결되며, 뒤의 행사들은 현실적 쾌락의 추구다. 이러한 경향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그러나 이를 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즈음 대학사회에서 일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십여 년 전부터 대학사회에서는 철학ㆍ윤리ㆍ역사ㆍ언어ㆍ종교 등을 전공하는 학과에 지원자가 줄고, 급기야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학과가 통폐합되는가 하면, 인문학부로 모집하여 나중에 전공으로 나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선언‘을 하고, 전국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책임이 인문학적 정신과 가치를 경시하는 사회구조의 변화와 이를 주도해온 정부ㆍ정책당국에 있다며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본래 인문학이란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과, 이상적인 사회란 어떠한 사회인가라는 대답 없는 질문에 끝없이 도전함으로써 우리를 상상과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문학이 세계를 통치하고 관리하며,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자리를 ‘과학-기술’에 내어준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물리적으로 인류 자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졌기 때문에 ‘과학-기술의 득세’는 단순히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 인류를 더 큰 위기에 직면하게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틀어서 지식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묵시론적인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초고속 열차에서 지식인들은 인간다움의 가치를 부정하고 오직 물질적 풍요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지식의 연료를 계속 제공함으로써 파멸로 향하는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때로는 이게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미친 듯이 물신주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 물신주의의 초고속열차에 제동을 걸자가 누구냐.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살만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소리높이 외칠 자가 누구냐. 천박하고, 실용적이고, 범용적인 것들을 버리고 정법을 찾는 수밖에.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장·창원전문대교수) 글. 월간반야 2007년 7월 제80호

문명의 반추(反芻)

TV를 끄고 살아보기, PC 앞에 앉지 말기, 휴대폰 안 갖기. 요즈음 얼핏보아 이해하기 힘든 이런 캠페인성 기사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가족 간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빼앗아간 TV나, PC게임에 열중하고 채팅에 신경을 쓰다가 급기야는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 그 편리함이 급기야는 대학입시 수능 부정 등 범죄로 연결되어 인생을 망칠(?) 지경까지 이른 휴대폰 등, 이른바 첨단 문명의 이기이자 우리 경제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효자 상품들이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이와 같은 시대의 총아들은 물질적 풍요를 낳았고, 지리적 거리를 단축시켰으며, 흩어진 지식을 모아 체계화하였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면서도 첨단의 끝이 어딘 줄 모르고 쉬임없이 질주하고 있는데 이제 그 부작용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첨단 과학과 기술 문명은 인간에게 반드시 유익함만 주는 것인가. 요즈음 세속적인 표현으로 한창 뜨고 있는 NBIT(나노 바이오 정보융합기술)도 사회 문화적, 환경적 측면에서 볼 때는 그 역기능이 만만치 않다. 첨단기술의 발전은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고용의 감소를 초래하는가 하면, ‘나노’나 ‘바이오’ 등 새 기술은 부(富)와 혜택이 특정 소수계층에 편중되어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문제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은 군사적 목적이나 테러 등에 악용 될 소지 또한 많다. 그런가 하면 생명 의료 기술의 발전은 사회 윤리적 문제로 비화되고 있으며, 인간과 환경과 생태계의 교란으로 인류의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나노’ 기술은 인류에게 ‘희망인가, 재앙인가’의 문제로 비화 될 조짐마저 있다. ‘나노’란 ’10억분의 1미리’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기술로 물질을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분석 조작한다. 이 원자와 분자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지금까지 자연계나 기존 재료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여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에 같은 구조로 이루어진 물질이라도 구성 입자의 크기가 ‘나노 사이즈’로 작아지면 인간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동물의 폐와 뇌에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고 환경파괴와 질병을 야기 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비단 이러한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석유 에너지의 남용으로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지구 온난화나 오존층의 감소는 지구의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첨단과학 기술이 인간을 편리하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반드시 인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순기능만 보고 무작정 나아가기보다는 그 역기능도 고려해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과학기술의 평가도 이루어져야겠지만 소비자와 서민들도 이따금씩 부정하고 회의하고 거부하는 시간도 가져 보아야 한다. 원시(原始)에로의 회귀가 아닌 문명에 대한 반추(되새김질)가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5년 1월 제50호

무지와 편견

유난히도 긴 장마에다 국지성 폭우와 폭염으로 올 여름은 세인들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여름의 시작을 북위 60도 위 아래로 오르내리면서 러시아와 북유럽에서 10여일을 보냈다. 예비지식을 갖기 위해 미리 70여 쪽의 자료까지 만들어서 일행들에게 나누어주고, 읽어보기도 했건만 이제껏 머리에 남아있는 거라곤 내 알량한 지식에 대한 부끄러움과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나름의 이성적 판단에 회의(懷疑)를 느낄 뿐이다.

처음으로 나를 당황하게 한 사건은 바이킹(Viking)족이었다. ‘바이킹’의 의미는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하였다. 지금껏 내 상식으로는 ‘스스로 노력하여 생업을 유지하지 않고 이따금씩 바다에 나가서 지나가는 배를 납치하여 재물을 빼앗는 해적’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덴마크의 달가스나 그룬트비를 더 존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바이킹’은 ‘척박한 땅, 부족한 농지에다 기후마저 고르지 못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삶의 무대를 밖으로 향하고 보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한 점을 높이 평가’하는가 하면, 이들이 ‘획득한 재물을 종족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여 ‘종족의 화합을 꾀하고’, 아주 ‘근면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와는 정반대의 시각이었다.

흔히 우리는 스칸디나비아 3국을 비롯한 북유럽의 나라들이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어 국민들이 일하기를 꺼린다든지, 무료하여 자살률이 높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비친 모습에서나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된 것은 우리의 선입관이나 알고 있는 바와는 거리가 멀었다. 건강한 국민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젊은 부부는 거의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처럼 건강보험, 생명보험, 교육보험, 고용보험, 연금보험 따위의 보험제도는 없었다. 열심히 일하고 세금 잘 내고 하면 다른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물론 병원에 가도 돈을 주고받고 계산하는 수납창구는 없단다. 그러면서도 재미가 있었다. 자기의 생일에는 집에 국기(國旗)를 게양하는가 하면, 이웃사람이 죽었다고 마을의 친한 집에서는 조기弔旗를 다는 곳도 있었다. 국기는 나라에 경사스런 날이나 기념일에만 다는 우리로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북유럽의 여름은 ‘백야(白夜)’를 빼면 이야기할 게 없다. 북위 62도 정도의 지역에서 ‘하지(夏至)’를 맞았다. 이곳에서는 ‘성탄절’ 축제 다음으로 ‘하지 축제’가 대단하다. ‘하지’가 들어있는 주말에 3일간 열린다고 했다. 북극에 가까워지면 낮의 길이가 대략 22시간 쯤 된다고 하니 밤이 없다는 말이 옳겠다. 그 반대가 ‘흑야(黑夜)’라 하여 겨울 3달은 낮이 거의 없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했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의 고지에서 하지를 보내고 스톡홀름을 거쳐 헬싱키로 가는 여정은 5성급의 호화여객선 ‘SILJA LINE(실자 또는 실야 라인)’을 이용했다. 발트해Baltic sea의 은빛바다를 백야현상과 함께 하룻밤을 보낼 생각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길이 200m, 높이 13층, 2,800명을 수용한다고 하니 그 위용에 우선 놀랐다. 실자라인 그 자체보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우리 내외는 백야와 함께 꼭 ‘일출(日出)’과 ‘일몰(日沒)’을 보고오리라 계획한 바 있기에 ‘실자라인’ 선상(船上)이 가장 적지라고 생각했다. 계획대로 밤10시 쯤 14층격인 상갑판에 올라가 ‘일몰’을 기다렸다가 10시 반 쯤 일몰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고는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고 새벽 1시경 잠자리에 들면서 2시쯤은 일어나야 일출을 볼 수 있다고 알람에게 부탁했더니 2시 정각에 깨워주었다.

서둘러 상갑판에 올라가서 어젯밤 일몰과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걸. 해뜨기 전의 여명도 아침노을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또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배의 길이가 2백 미터니 얼마나 뛰었을까. 한 바퀴를 돌아 어젯밤 해가 진 곳으로 오니 그곳에서 붉은 여명의 분위기가 보였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내 머리의 한계를 보았다. 분명히 배는 헬싱키가 있는 동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제 해가 진 곳은 어디란 말인가? 분명히 북쪽이었다. 그럼 이 아침에 해가 뜬 곳은 또 어디란 말인가? 역시 북쪽이었다. 해는 동에서 떠서 서로 지는 게 아니라 북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졌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북극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그믐이 가까운 하현은 뱃머리 위에서 나를 향해 씩 웃고 있었다. 인생이란 살아갈수록 무지와 편견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가 보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8월 1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