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뭐길래

연일 뉴스의 첫머리는 대입수능 부정 사건이 장식한다. 자고 나면 가담자가 늘고, 제2․제3의 사건이 드러난다. 도대체 이 사건의 파장이 언제까지 어느 규모까지 확산될지 모르겠다. 오늘도 교육일선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내신은 물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단 한 문제, 단 1점이라도 더 맞추고 성적을 올리려고 선생님들을 독려하고 학생들을 닦달하고 있는 교장의 입장에서는 그 자괴감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11월 17일. 수능 고사장으로 되어 있는 우리학교에서도 25개 고사실에서 685명의 여자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관리에 종사하는 사람은 우리 교직원과 다른 학교에서 온 선생님들과 경찰관을 포함해서 모두 109명이었다. 종사자들은 40페이지 분량의 ‘감독관 유의사항’만 받았지 전파차단기나 금속탐지기 등은 지급 받지 못했고, 수험생의 몸수색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다. 다행이(?) 우리 고사장에서는 부정행위자가 아직은 적발되지 않았다.

요즈음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를 압도하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정보통신기술일 것이다. 이번 수능 부정행위에서도 신세대들은 기성세대 감독교사들을 업신여기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읍소하고 각서를 쓰고서도 자기들의 계획대로 하고야 말았다. 정보통신의 강국답게, 그 강대국의 신세대다운 면모를 ‘디지탈 부정행위’를, 그것도 ‘007작전이 무색할 정도의 작전’으로 해 내었다. 물론 ‘아날로그식 감독관 유의사항’으로는 부정행위를 적발하지 못했다. 아니 제자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유의사항’보다 좀 느슨하게 감독을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후면 학생, 학부모는 물론 교육청 관계자, 고사장 관계자, 감독관들이 줄줄이 문책을 받을 것이다. 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모교에서도 책임 공방은 이어질 것이고, 수능을 총괄하는 교육부와 평가원 관계자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내년을 대비해서 관리대책과 철저한 감독 방법이 강구될 것이다. 전파를 차단하고 금속탐지기도 등장할지 모른다. 부정행위자는 아마 영원히 대학에 가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게 아니다. 수능시험 관리상의 문제로 축소․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수능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그 자체의 문제로 접근하고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 왜 교육부는 이 ‘수능’이란 제도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대학들이 학생 선발권을 돌려 달라고 그렇게 아우성인데 무엇 때문에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들이 교육시킬 학생을 선발하게 해 주어야 한다. 물론 부정이나 잘못이 있을 때는 제재하면 되지 않는가.

보다 근본적인 것은 교육에서 양심과 원칙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는 환경을 학교나 가정, 사회에서 만들어 주고 기성세대가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할 사람이 있는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통렬한 자성이 필요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지식이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도덕성이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요체다. 교육의 우선순위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4년 12월 제49호

대학의 위기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은행이 망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리고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국민의 교육열을 대변하여 ‘우골탑(牛骨塔)’이라 불리던 ‘대학’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여 급기야 ‘문을 닫는 순서’가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이유인즉 역시 우리 국민의 ‘교육열’이 아닌가 싶다. 자식을 낳아 기를 것을 생각하니 양육비도 문제지만 남들처럼 번듯하게 교육시킬 것을 생각하니 이 ‘교육비’가 천문학적 수치로 예상되니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낫다고 보아 출산율이 떨어지니 대학에 갈 인적 자원이 줄어든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때가 되어 내년도 입시가 시작되었다. 수시모집이 이루어지고 각 대학은 사 활을 걸고 신입생을 유치하고 있다. 좀 여건이 나은 대학은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려고, 그렇지 못한 대학은 정원 채우기에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도 그럴 것이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은 줄잡아 66만 여명, 대학의 모집 인원은 4년제가 38만 명 정도에다 전문대학이 26만 여명이니 대학의 입학정원과 고등학교 졸업예정자 수가 엇비슷하다. 여기에 재수생이 있다고 하여도 대입 포기자와 재수 희망자를 생각하면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통계수치만 보아도 우리의 고등교육이 시작부터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모셔온(?) 학생들인데 교육을 소홀히 하고 대접을 예사로 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대학에 들어올 자원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으니 정부가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다.

지난해에 이어 교육과학기술부는 ‘2012학년도 재정지원 제한 대학 평가결과 및 학자금 대출 제한 대학 선정 결과’를 발표하였다. 평가 결과 346개 사립대학 가운데 15%인 43곳이 재정 지원을 제한받는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이들 대학은 일반대학 28곳, 전문대학 15곳이고, 수도권 대학이 11곳, 지방대학이 32곳으로 이 가운데 17개 대학은 내년에 학생들의 학자금 대출도 제한된다.

이처럼 정부는 대학들이 자율적으로는 도저히 구조조정이 불가능하다고 보아 국가 차원에서 칼을 뽑아든 것이다. 2백여 개의 대학과 150개 정도의 전문대학을 신입생 충원율, 졸업생 취업률, 재학생 충원율, 전임교원 확보율, 장학금 지급률, 등록금 인상 수준 등의 선정기준에 따라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먼저 평가 하위 15% 정도의 대학에 정부 재정지원을 중단하고, 다음엔 학생들의 학자금 대출이 제한된다. 그래도 개선이 되지 않으면 경영부실대학으로 선정되고 현장 실사를 거쳐 최종 퇴출되는 것이다. 퇴출의 마지막 순서는 법인의 폐쇄나 대학 통폐합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과정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보고만 있을 대학도 없거니와 정부의 재정지원이나 학생들의 학자금 대출이 되지 않는 대학을 선택하여 입학할 학생도 없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대학들이 ‘자기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이 시대에 걸맞는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역량을 다할 수 있겠는지 엄정한 자기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궁하면 남 탓하고, 남과 비교한다. 그리고는 남에겐 엄정하거나 과소평가하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과대평가하기 쉽다. 자기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진 연후에 스스로 구조 조정이나 개혁을 하는 것이 옳다.

지방대학의 육성이 정치‧경제‧문화의 수도권 집중을 막을 수 있는 큰 대안이다. 구조 개혁의 방향은 가까이 우리의 60년대 70년대 대학에서 찾는 것도 괜찮겠다. 그때는 전국에 대학의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공과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법과대학, ○○농과대학 등 대학들이 특성화되어 있었다.

지금도 선진국의 유명 사립대학들은 그런 전통을 갖고 있지 않은가. 다음으론 수도권과 지방대학의 조화로운 육성이다. 현재 상태대로 두면 전국 대학의 문 닫는 순서는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사학에서 국공립으로 될 수밖에 없다. 지방대학의 육성이 정치‧경제‧문화의 수도권 집중을 막을 수 있는 큰 대안이다.

끝으로 우리 고등교육의 80% 이상을 맡고 있는 사학이 퇴출 위기를 맞을 경우 퇴로(退路)를 열어주어야 한다. 빠져나갈 구멍을 보고 좇아야 한다. 현재의 시설, 인력, 자산 등을 감안하여 가능한 사업과 인센티브를 주어 그들이 우리 국가 사회를 위해 이바지한 공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대학의 구조 개혁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객관성과 일관성을 잃으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차라리 끝까지 서로 경쟁하여 적자생존케 하는 것이 부작용이 적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1년 10월 131호

대 변혁을 기대하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 사람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 나라도, 사람도, 교육도 유기체다.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닌 다양하게 변모하고 상대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이 사회와 더불어 태어나고, 성장하고, 번성기와 쇠퇴기를 거쳐 사멸하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교육이 요즈음 사회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들어서서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다.

지금은 교육이 교육계만의 문제가 아니고 국가적 차원의 화두로 변하고 있다. 어쩌면 교육계 안에서도 한 지엽적인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이 국가의 기강을 흔들고, 정권과 특정집단이 강경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남들이 보면 의아해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도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변화에 대한 거부반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사회의 변화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있게 마련이고, 바람직한 변화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변화를 거역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우리 또한 변화와 더불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국민소득 1만불 시대에서 근 10년을 방황하고 있는 우리 경제와 맞물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하고 그 변화를 위해서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만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는 잘하고 누구는 잘못한다는 식의 해결법은 곤란하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의식의 변화를 이룩해야 한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 시대 우리가 원해서 만든 민주사회는 열려 있는 사회다. 어떠한 상황 , 어떠한 사람과도 만날 수 있다. 옛날 전통사회에서는 폐쇄된 상황에서도 살 수 있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폐쇄된 집단에서는 자연히 서로에 대한 감수성이 무디어지고, 상대방과 공동체의식의 형성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방된 상황에서 외부세계의 다양성과 변화에 적극적으로 부딪치면서 자신의 주장과 역량을 시험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자기 뿐 아니라 우리의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생물학에서 흔히 인용되는 근친교배에서 ‘열성유전’이 나타나는 현상이라든지, 지역주의의 폐해가 오늘의 우리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등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바람직한 유기체의 성숙에는 변화와 결단, 대 타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거대한 변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의 공감대 형성이 급선무다. 먼저 어떻게 변해야 하며, 무엇을 바꿀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원로를 비롯한 지식인,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모여 현재의 시국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이끌어내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정부는 그 추진의 주체가 되었으면 한다.

좁게는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에 이어 나를 포함한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내가 소속한 집단, 직장, 조직의 분위기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몇 해 전 어느 대기업의 총수는 ‘자기의 성과 아내만 바꾸지 말고 다 바꾸어야 한다’고 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의 변화에 이어 나라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음 세기까지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의 이름을 이어가기 힘들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것만 버리면 모든 게 가능하리라.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3년 6월 (제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