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생활 자체가 항상 보람과 아쉬움으로 점철되는 일상이지만 요즈음 들어 새로운 안타까움이 있다면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아버지와 자녀의 성(姓)이 다른 학생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자녀 양육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다가 다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 경우와,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자녀를 키우며 살다가 재혼한 경우다. 이런 경우 자녀는 새 아버지(계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 친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현행법으로는 성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아니 내 좁은 소견으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성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은 ‘피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죽어 이별하는 경우야 그만두고라도, 부부가 혼인예식을 치를 때 서약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파경에 이르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한 가정의 파괴는 인생의 실패로 연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은 전통적 관념이 크게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사회적 성공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다. 그만큼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소중한 것이며,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이 더 없는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리라.
나의 지인 중 한 남자는 세칭 명문대학 인기학과를 졸업하고 언론사에 입사하여 중견간부를 지내고 지금은 쉬고 있고, 그의 부인은 지역 문화예술계의 유명 인사다. 내외가 금슬도 좋고 자녀들도 잘 키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이 친구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이 ‘OOO씨의 남편’이라면 버럭 화를 낸다. ‘내 아내가 OOO이지 내가 왜 OOO의 남편이냐’하는 것이다. 또 한 친구는 지역에서 문단활동과 함께 자타가 공인하는 페미니스트다. 한때는 이름을 쓸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같이 쓰고 자기 이름을 쓰곤 했다. 이 친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OOO의 아내다’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곁에서 듣기가 민망할 정도다. 소개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남편이나 아내 등 가까운 사람을 매개로 하는데 왜 꼭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따지는지 모를 일이다. 누구의 남편이면 어떻고 누구의 아내면 어떤가.
부처님께서도 인생에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더 없는 행복’이라고 설하지 않으셨던가. ‘육방예경(六方禮經)’에 따르면 ‘남편은 아내를 존중해야 하고 예의로써 대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며, 아내로서의 위치와 안락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또한 아내에게 의복과 보석을 선사하여 즐겁게 해 주어야 한다. 반대로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며, 손님ㆍ내방객ㆍ친구ㆍ친척 및 고용원 등을 잘 접대하여야 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충실하여야 하며,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하고, 모든 활동에서 현명하고 활기차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시대와 사회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부부는 다같이 호혜적이고 평등하여야 하며, 서로를 위해 상호보완의 내조와 외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위하고 가정을 위하고 나아가 사회와 인류를 위하는 ‘더 없는 행복의 길’이 아닐까.
김형춘 글/ 월간반야 2002년 9월 (제22호)